오늘날 사람들에겐 잊혀진 인물이나, 미군정기 시기 엄청난 권한과 실세를 휘둘렀던 인물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미24군단이 한반도에 입성, 서울에 도착한 미24군단장 존 하지 중장과 조선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항복조인식을 하던 1945년 9월 9일, 장안에는 '미군 사령부에서 영어를 해독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으니 해당자는 내일 점심지나 조선호텔로 나오라'는 통문이 돌았습니다.
다음날 오후 1시가 지나자 본관 1층 건물에는 오천석,조병옥,이훈구,이대외,이묘묵 등 미국,영국유학 경력이 있거나 영어를 잘한느 50여명의 한국인이 모였습니다. 이 '조선인 유지 초청 간담회'에서는 미군과 조선인의 최초의 공식적인 접촉이 됩니다.
이 자리에서 미군은 몇 사람에게 군정청의 조선인 부처장 역할을 부탁합니다. 사실 이 만남은 그 날 오전10시에 한민당의 정일형,이묘묵,최순주 3인과 군정청이 미리 짜놓은 계획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10월5일 미군정은 여운형,조만식,송진우,김성수 등 각계 인사 11명을 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합니다(이 11명의 군정장관 고문들 가운데 조만식,여운형 제외한 9명은 전부 한민당쪽 인사들이었습니다. 조만식은 북한에 있었기에 부재, 여운형은 첫회의후 9:1구도라 봤기에 사퇴했습니다) 이 군정장관 고문직이 미군정기 시기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여기서 미군정기 시기 특히 막강한 위세를 부리던 한국인 한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민당의 이묘묵.
그는 존 하지 중장의 특별보좌관으로 존 하지 중장 바로 옆에서 통역을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는 존하지 중장 및 미군 간부들의 입 노릇을 했지만, 실제로는 미군정의 정책을 움직이는 실력자로 행세했습니다.
이묘묵은 미국유학,영국유학을 거친 엘리트 출신 인사로 일제강점기 시기 2~30년대중반까지만해도 민족개량주의자 입장에서 독립운동도하고 사회운동한 지식인 엘리트 인사였으나 30년대후반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활동합니다
이묘묵에대한 행적들 상세히다룬 친일인명사전 수록내용 캡쳐한거 그대로 올려봅니다.
이묘묵은 미군정기 존 하지 중장의 특별보좌관으로 늘 존 하지 중장 옆에서 보좌하며 통역관 역할했던 유일한 조선인으로 그의 힘은 당대 '남조선 땅덩어리의 반을 먹을 만큼 막강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미군정기 시기 인사,행정,정책등에는 이묘묵 이 사람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었음을 짐작할만합니다.
1947년 5월말에 재개된 제2차 미소공위 사진. 왼쪽부터 허헌,테렌티 스티코프,말리크, 이묘묵, 김규식, 여운형.
미군정기 시기 그만큼 통역관리가 당시 얼마나 막강한 권한과 실세였는지 짐작할만합니다. 통역을 할 수 있을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있는 집 자식들이었고, 이들이 2~30년대까지만해도 대개 춘원 이광수 같은류의 민족개량주의 입장에 있다가 나중에 30년대후반 전후로 친일파로 넘어간 유형의 가능성이 높았죠. 그들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통역을 하면서 세상을 크게 뒤틀어버리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분명히 민족반역이었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벽을 만났을 때 어떻게 판단하게 될까...
연희전문대학교 교장을 했었네요.
기독교+평안도 출신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231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