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다면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의 평양이나 북한 대사관을 방문한 경험, 북한과의 접촉과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관련자들과 북한의 교류가 왜 발생했는지를 알기 위해선 유학생에 대한 당시 한국 정부의 태도와 그들이 처한 환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백림 사건의 최초 제보자였던 임석진은 이 시기에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무방비상태에 방치돼 있다시피"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실제로 1950‧1960년대에 유럽으로 유학을 간 한국인 학생이나 지식인 가운데에는 '형편이 곤란한 고학력자'들이 많았다.
북한 측 공작원들은 생활 형편이 어려운 유학생이나 예술가들에게 개인적인 연락관계를 형성한 후 생활보조금 명목으로 경제적 지원을 해왔고, 여건이 여의치 않은 일부의 사람들은 지원금을 받아썼던 것이다. 차후 동백림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이들이 받은 돈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 하에 수수된 '공작금'으로 변모하게 된다.23)
당시 해외한국공관은 체계적인 관리시스템이나 전문 인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학생과 교포에 '무관심'하거나 '권위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북한의 개입을 쉽게 만드는 허점으로 작용했다.24) 또한 독일연방공화국은 베를린의 존재 때문에 한인들이 신분증에 확인도장이나 특별한 기재를 할 필요 없이 사회주의 구역을 드나들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장소였다.25)
다시 말해, 그들이 활동했던 독일(서독)이라는 장소는 남북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영토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 한국 유학생이 서로 교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건의 경과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문화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들은 1958년 9월부터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利敵)활동을 한 데 이어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도 여기에 관련된 반국가단체라고 발표했다.
이후 사법부는 동백림 및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별도 심리하기로 결정하고 1969년 3월까지 동백림사건 관련 재판을 완료하여 사형 2명을 포함한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을 선고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달리 동백림사건 관련자 중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간첩행위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복이 두려워서 또는 단순한 호기심에 북한에 잘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낸 정도였다.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이라고 하여 무려 203명의 관련자들을 조사했지만, 실제 검찰에 송치한 사람 중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를 적용한 것은 23명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이러한 재판 결과는 동백림사건 수사가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학생과 교민들의 강제연행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서독 및 프랑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여 형기 집행을 면제, 정규명·정하룡 등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