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글 보면..
세종대왕님이 홀로 만드셨다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세종대왕님이 한글창제에 도움을 받으셨던
이야기는 많습니다
세종대왕 말년 치세를 사실상 담당했던 문종은 말할것도 없고
실록에 보면 수양대군은 일종의 한글사전인
운회를 집필했고 안평대군은 자료조사를 담당햌습니다
이후 세조는 한글로 최조의 산문집인 석보상절을
내고 세종대왕은 화답으로 월인천강지곡을 써서
세조가 이 두가지를 합쳐 월인석보를 찍어냈는데
세조의 치세동안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술자리마다 팔아 먹습니다
사실 세종대왕이 레전드인 만큼
당시 신하들 중 세종대왕과 관련된
일을 한 사람들은 열심히 관련 업적을
남기는데 덕분에 한글창제에 담당했다는
신하들의 사료는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신숙주입니다
집현전 학자들이 대거 반대했다는것도 안맞는게
명나라와 전쟁 직전의 심각한 외교마찰이 있은지
50년도 안된 상황에서 진정한 사대주의자는
등장하지도 않아서
한문 대신 한글로 대체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수파에 불과했습니다
세종 - 세조 대 동안 훈민정음 창제는
큰 공로였고
훈민정음을 관료에게 교육시키는 것도
큰 반발이 없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사실 저도 전문가가 아니라
그냥 카더라는 이야기만 모운거지만..
인터넷에는 A라는 카더라가 있는데
사실 B다라는 카더라를 다시 미는 형태가 많이
나오는데 좀 당황스럽더라구요
사실 뭐든 초중고 이상의 서술로 넘어가게 되면
아무도 명확히 사실을 말할 수 없다가 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글 '창제' 자체에는 영행을 끼친게 없습니다.
말씀하신 세조의 운회도 '창제'된 후에 진행된 사업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자체는 아무도 모르게 세종대왕 측근 몇명만 알고 진행된게 맞습니다.
만들고나서 검증등을 다른 사람들한테 맡긴 거라면 몰라도요.
실록에 따르면 신숙주는 외국어에 자질이 있었고
음운을 연구하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요동 등 해외로 13번 출국합니다
그게 창제 이후라고요.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 등에게 요동에 가서 운서를 질문해 오게 하다
세종 27년(1445) 1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01007_005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12030_002
신숙주도 왕이 이걸 왜 알아오라고 했는지 모르고 갔을 껄요? -_-
큰 반발이 없었습니다
반발이 심하지 않았나요???
초창기에 최만리 등이 반발했다가 짜지고 난 후에는 딱히요.
문과시(과거 1차 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넣기도 합니다.
上親制諺文二十八字
上, 임금께서
親, 친히
制, 만드셨다
諺文二十八字, 언문 스물 여덟 글자를.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와 성균관 주부(注簿) 성삼문(成三問)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
세종실록 27년 1월
그 외에도 많아요..
...저기 세종 25년과 세종 27년의 차이는 아시죠?
27년꺼 가져오시면 말이 어긋납니다.
근거여깄네요
역사서에 거짓부렁을 구지 넣었을거같진않고 당시엔 대단히 여기지도 않았을테니
그럼 창제와는 상관 없는 거네요..
말씀대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첫번째 기록이긴 한데..
28년에 정인지 상소에 보면
신(臣)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뒷 내용은 역시 세종대왕 혼자 만드셨다는데
이건 칭찬의 표현이지 진짜 혼자다라고 해석하기힘든것 같습니다
정말 혼자 만드셨고
이후 검토만 28년도 부터 본격적으로 시키셨을 수도 있지만
(실록상으로는 창제 전 이야기는 제가 알기로는 없으니까요)
세조실록과 비교해보면
정말 혼자 만드셨다기보다는 다양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봐야 하는것 같습니다
근데 이것도 카더라니
세종대왕 혼자 만들었다 만큼 무리한 주장이라는거죠
대문글처럼 사실로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해석과 범례는 창제 뒤에 따라온 일종의 후속 작업이잖아요..
영화 해석했다고 평론가가 영화 제작자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해례본에 대한 내용입니다.
해례본은 집현전 학자들이 달라붙어 만든 거 맞고요.
동아전과(해석판/해례본) 만든 사람이 교과서(훈민정음) 만들었다고 하면 안되죠.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臣)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앞부분 일부러 자르고 퍼 오신 건가요?
해례본에 본인이 만들었다고 적혀 있으니, 그것만 믿으면 되겠죠.
사료는 그 무었보다 명확한 증거 자료입니다. 증거를 안믿는다면 이야기 자체가 안됩니다.
증거가 있는데 왜 못믿겠다고 하세요? 증거에 대한 반례를 제시하고 의문을 내야지, 반례도 없는데 의문 제시는 잘못된 순서입니다.
해례본에 내 친히 스믈여덟자를 맹가노니라고 써져있으니 세종께서 만드신게 맞겠죠..
세종 대왕 혼자 만들었다 틀림
세종 대왕과 집현적 학자들이 만들었다 틀림
이라는거죠..
친히 만드셨다고 증거가 남아 있으니, 그 반례를 제시하세요. 그후에 다시 이야기 하시죠.
만화를 비유해 보자면 이현세가 어시스트를 받아 공포의 외인구단을 만들었다. 라고 하면 그 만화는 이현세가 만든거죠.
본문에서는 작성자께서도 카더라로 들은 이야기라고 적으셨지 않나요?
위의 신숙주 건은 연도부터 창제 후이니 상관 없어 보이고요..
그 이전 한글관련한 활동 기록이 없죠.
이후 집현전 학사 8인과 함께 해례본을 책으로 완성하고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같은게 세부적인 내용을 보강하게 되지요.
결론은 뜬금없이 아침조회 시간에 세종대왕이 신하들 앞에서 '나 이거 만들었어 어때?' 라고 하신것
여가에 이일에 생각을 두시와, 이에 신(臣) 신숙주(申叔舟)와 수 집현전 직제학(守集賢殿直提學) 신(臣) 최항(崔恒), 수 직집현전(守直集賢殿) 신(臣) 성삼문(成三問)·신(臣) 박팽년(朴彭年), 수 집현전 교리(守集賢殿校理) 신(臣) 이개(李愷), 수 이조 정랑(守吏曹正郞) 신(臣) 강희안(姜希顔), 수 병조 정랑(守兵曹正郞) 신(臣) 이현로(李賢老), 수 승문원 교리(守承文院校理) 신(臣) 조변안(曹變安), 승문원 부교리(承文院副校理) 신(臣) 김증(金曾)에게 명하시와 세속의 습관을 두루 채집하고 전해 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하여, 널리 쓰이는 음(音)에 기본을 두고 옛 음운의 반절법에 맞추어서 자모(字母)의 칠음(七音)과 청탁(淸濁)과 사성(四聲)을 근원의 위세(委細)한 것까지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이 하여 옳은 길로 바로잡게 하셨사온데
자료 조사은 도움 받으셨다고 실록에 있네요
당시에 한글창제 프로젝트의 콘셉트와 언어기호학적 이해, 그리고 음성학적 능력이 한 사람에게 집합되지 않고서야, 아무리 집현전 인재들인들 그에 걸맞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 아닌데 어찌 가능했을까요? 집현전의 인재들이 아무리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해도 그들을 뽑는 과거라는 행위 자체가 언어 개발의 능력을 증거하는 기준이 되지는 못하니까요.
집현전 학자들이 바탕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류해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언어창제의 대역사를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 했다면 시간적, 논리적으로 최고 완성도의 단일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종대왕의 머릿속에서 콘셉트의 기준과 언어와 기호의 이해, 육체의 음성학적 능력이 모두 갖춰졌기에 그만이 할 수 있는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같이 만들었느냐, 아니냐라는 건 어디에 기준을 정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같이 만들었다'의 그 기준이 어디냐라는 것을 서론에 확실하게 못박고 시작해야죠.
만약 자료 수집과 분류도 창제에 도움이 됐으니까 함께 만든 거 아니냐라고 한다면 그렇게 써야 이론이 없을 것이고요. 핵심적 역할을 함께한 사람이 있다면 그 핵심적 역할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 못박고 이야기해야합니다.
본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는 커녕
오히려 주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글을 하나 적었습니다
여가에 이일에 생각을 두시와, 이에 신(臣) 신숙주(申叔舟)와 수 집현전 직제학(守集賢殿直提學) 신(臣) 최항(崔恒), 수 직집현전(守直集賢殿) 신(臣) 성삼문(成三問)·신(臣) 박팽년(朴彭年), 수 집현전 교리(守集賢殿校理) 신(臣) 이개(李愷), 수 이조 정랑(守吏曹正郞) 신(臣) 강희안(姜希顔), 수 병조 정랑(守兵曹正郞) 신(臣) 이현로(李賢老), 수 승문원 교리(守承文院校理) 신(臣) 조변안(曹變安), 승문원 부교리(承文院副校理) 신(臣) 김증(金曾)에게 명하시와 세속의 습관을 두루 채집하고 전해 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하여, 널리 쓰이는 음(音)에 기본을 두고 옛 음운의 반절법에 맞추어서 자모(字母)의 칠음(七音)과 청탁(淸濁)과 사성(四聲)을 근원의 위세(委細)한 것까지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이 하여 옳은 길로 바로잡게 하셨사온데
신하들이 참여했다는 실록 기록은 있다는 말을
해드리고 싶었네요..
세종대왕이 홀로 만들었다는건 무리인 주장 아닌가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그 이후 가르치는 책이나 해설서(해례본), 발음 같은게 맞는지 검증하는 작업같은 걸 신하들에게 맡긴 겁니다.
'창제' 자체는 혼자서 하신게 맞습니다. 몇몇 측근의 도움은 받았다고 봐도요... -_-;;
가져오신 실록 기록은 '창제'에 신하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아닙니다. -_-;;
이에 사성(四聲)으로써 조절하여 91운(韻)과 23자모(字母)를 정하여 가지고 어제(御製)하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고, 또 ‘질(質)’·‘물(勿)’ 둘의 운(韻)은 ‘영(影)’130) 으로써 ‘내(來)’131) 를 기워서 속음을 따르면서 바른 음에 맞게 하니, 옛 습관의 그릇됨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 글이 완성되매 이름을 하사하시기를,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 하시고
..............
"글이 완성되매 이름을 하사하시기를,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 하시고"
"글이 완성되매 이름을 하사하시기를,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 하시고"
"글이 완성되매 이름을 하사하시기를,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 하시고"
"글이 완성되매 이름을 하사하시기를,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 하시고"
"글이 완성되매 이름을 하사하시기를,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 하시고"
"글이 완성되매 이름을 하사하시기를,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 하시고"
네, 인용하신 [동국정운]에 대한 글은 잘 봤습니다. 일부러 잘라 오신 거 아니죠? ㅋ
아뇨 이름을 하시하신걸 제가 자를 필요가 있나요?
비전문가인 제가 더 뭐라 해봐야
저의 낮은 지식만 보일태니 그만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다른글에 말했고
아는게 없으니 더 말씀드릴것도 없네요
인용하신 부분은 [훈민정음] 에 대한 게 아니고, [동국정운] 에 대한 내용이란 말입니다.
하...........
하물며, 인용하신 그 글에도 [훈민정음] 은 어제(御製), 즉 왕께서 만드셨다고 돼 있다고요. 쫌!
세종실록 117권, 세종 29년 9월 29일 무오 2번째기사 1447년 명 정통(正統) 1447년 명 정통(正統) 12년
동국정운 서문...;;;;
동국정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한 후 언어 정책의 일환으로 당대 조선의 잘못된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한 책이다.
자모의 형태나 배열까지 학자들 중에서 누군가가 관여했다면 기록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세종대왕이 이리 저리 궁리를 해서 몇 가지 안을 만들고 나서, 나중에 여러 안들을 보여주면서 평가를 받았을 가능성은 있겠지요.
실록에는 세종이 만들었다 최만리등 신화들 만대 극심했고 대신 혹은 신화들 중 훈민정음 창제관련해서 기록이 없습니다
추가로 조선 사관들에 기록 수준은 뭐 다들 아실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