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조선왕조실록 얘기하면서
꼼꼼한 기록덕후... 뽕맛에 취하는 분들이 계시던데요.
조선왕조실록은 절대 꼼꼼한 기록이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에 비하면요....;;;;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는 4964만 6667자
승정원일기는 대략 2억 4250만 자 (그나마 절반 이상이 소실되고 남은 거)
단편적인 예로...
정조 16년(1792년)
영남의 유생 일만여명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내용이 길다 보니,실록에서도 기록하기 빡센지라
그 대략 (略曰) 만 간추려 기록한 게 저정도...
(스크롤바 감안하세요...아래에 공간 있어요!)
*참고로 저 상소문은 하도 길어서...
정조대왕도 읽다가 쉬고, 밤에 불 켜고 마저 읽었다고 합니다;;;
한편. 승정원일기.
......아몰랑, 다 적어.
내용은 둘째치고... 상소문에 이름을 올린...
1만 57명 전원의 이름까지 적어놓았습니다....ㄷㄷㄷㄷ
위 이미지가 그 첫 장인데, 이름만 적은 게 무려 94장...
일본만 아니었어도 ㅎㄷㄷ...
매일 저 분량을 일기로 쓴다고 생각해보세요....ㄷㄷㄷㄷ
이 중에 하나 골라보게요.
이 영남만인소는 정조가 바라마지 않았던거라..
이게 위에 말한 만인소 장면입니다 ㅋㅋㅋ 저걸 다 기록한 승정원일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머리 터지겠네요
조선 왕은 넘나 피곤....
사람이 하다가 ... 이 속도로는 앞으로도 90년은 걸린다니까 이제 인공지능 투입 ㅋㅋㅋㅋ
이거 얘기 나온지 한참된거 같은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사람이 하다가 노답이라 인공지능 투입한답니다 ;;;ㄷㄷㄷ
인간적으로 정조대왕께서 야근하는 승지님께 야식이라도 주셨을 거라 믿습니다 ㅋㅋㅋ
'~~라 하신 후, 이 말은 지워라라 하셨다'고까지 쓰던게 조선이라던가요.
어디까지나 [밀담이라 기록하지 못 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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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김류, 이홍주, 최명길이 청대하였다. 주상이 침전(寢殿) 안으로 들어올 것을 명하여 밀담을 나누었는데, 승지와 사관은 문밖에 있었으므로 밀담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경직에게 명하기를
"오늘 한 말은 중요한 일이 아니니, 사책에는 쓰지 말라."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눈앞의 위급한 일은 인보(印寶)와 가도(椵島)에 관한 일이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인보를 잠시 가지고 가서 말하기를, '엄한 위엄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가져오긴 했지만 조종(祖宗)에서 전해 온 구물(舊物)을 차마 하루아침에 마멸할 수가 없으니, 조묘(祖廟)에 보관해 두고 새로 새 인보를 받기를 원한다.'라고 한다면 저들도 혹 옳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백관들이 여울물을 건널 수 없으니, 오늘 가는 것은 반드시 배가 있어야 가능할 듯하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어제 이미 말했지만 오늘도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척화한 사람은 지금 이영달(李英達)을 시켜 보내되 저들과 수작하는 일이 반드시 처리되기를 기다렸다가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밀담이므로 기록하지 못하였다.
인조 15년(1637) 1월 29일. 청대한 김류 등이 입시하여 인보와 가도에 관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민족까기에 전념이 없으시네요"
어느 민족 까기요? ^^a
아, 중간에 전쟁이 두 차례나 있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
날려먹은 자료가 많아서 적은 편이라네요 찡긋 ~_~
전쟁때문에 적은 편이죠.... (빵긋~)
수많은 기록을 삭제해 버린
이멍바끈애 정부가
조선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것들이었던 거죠.
조선왕조실록도 다른나라나 기간에 비하면 엄청난 분량인 것은 맞습니다.
여담으로 중고딩때 지금 생각해보면 식민사관적 정신세계를 가진 좀 나이든 꼰대선생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때 많이 들었던 얘기가 조선인들은 나중에 화가 될까 두려워 일부러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일본놈들이 기록은 참 꼼꼼하게 남긴다고 말하던게 기억나는데...
그 말이 진짜 희대의 개소리라는 걸 대학교 가서야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왕들이 백성을 위해 살았죠
유교가 ... 왕에게 충성하라는것도 있지만
왕도 백성이 없으면 존제 할수 없다는주의라서 생각보다 왕이 편해 보이지는 않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