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 조선 태종, 킹세종의 아버지인 그는 킬방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간략하게 왜 그랬는지와 얼마나 죽였는지 정리해봅니다.
1. 정몽주와 그 일파들 (1392년 - 이방원 25세)
위화도 회군으로 개경을 모두 장악한 이성계 일파였지만, 명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때,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인 것이 이방원입니다. 실제로는 그 수하들이 저질렀다고는 하는데... 이 때 이성계의 의도는 한 때 전투와 뜻을 같이 했던 정몽주를 죽이기 아까워서 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정몽주는 왜적 소탕부터 신돈이 세운 우왕창왕의 폐위, 공민왕의 즉위를 함께 한 전우죠. 게다가 위화도 회군을 찬성하여 이성계를 지지했습니다)
이 시점에 이성계는 와병으로 드러눕고 정몽주가 호위병도 없이 병문안을 오게됩니다. 그 직후 술자리에서 이방원과 정몽주의 유명한 단심가와 하여가로 서로의 의지를 확인합니다. 이 때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 제거 계획과 고려왕실 권력 회복계획 추진 중이었고, 이방원의 수하였던 조영규 등이 죽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세종의 스승이 정몽주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세종이 정몽주의 사당까지 세웠고, 충의 사상의 대표인 것으로 조선시대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때 어째서 정몽주가 호위병도 없이 병문안을 온 것인가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신빙성 있다고 보는 설은, 이미 이성계가 군권을 장악해서 자신을 언제든 제거할 수 있고, 자신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는 의도를 이성계가 알고 있음에도 가만두는 것은, 이성계의 인품이 명분 없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호위병도 없이 병문안을 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성계도 정몽주를 이 때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방원은 '킬' 수 1을 추가하면서 실질적으로 고려왕조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합니다.
아마도 이 때 이성계는 고려를 없애고 왕이 되는 길이 열렸지만, 이방원이 탐탁하게 생각되지 않은 계기가 아니었을 까 추측합니다. 이 후 개국 공신에서도 이방원은 제외되고, 심지어 이방원과는 비교도 안되는 아무런 공이 없는 11살짜리 이복 막내 동생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아무튼 이 일이 두고두고 이방원을 평가하는 포인트가 되어서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이방원을 멀리하게 하는 구실이 되었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입니다.
이후 정몽주는 역적으로 몰려 단죄되고 이방원들의 수하가 시체를 능욕했으며 동생마저 죽였지만, 추후 그의 제자인 길재는 조선시대 사림파로 이어지는 학파를 열었으며, 또 다른 제자인 권우가 세종대왕의 스승이 됩니다. 덕분인지, 추후 세종대왕이 정몽주를 충절의 표상으로 끌어올리죠.
또다른 일화로는 사육신을 욕해서는 안된다고 감쌌던 자를 '거열형'에 처했으나, 세조가 그 직후 정몽주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거열형을 유배로 낮추었다고까지 하니, 정몽주는 절개를 지켜서 이득을 본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상 정몽주의 처단으로 고려를 끝내고 조선의 길을 열고 이성계가 왕이 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죠.
# Kill : 정몽주 & 형제, 고려 저항 세력 처단
2. 제1차왕자의난 (무인정사, 방원의 난. 1398년 - 이방원 31세)
표면적으로는 이복형제인 방석(11살)을 세자로 세운 것에 대한 불만인 것으로 이야기되지만, 내부적으로는 정도전이 세우고자하는 신권 중심의 조선과 이방원이 생각하는 왕권 중심의 조선이 부딪힌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병혁파등의 이슈도 있었지만, 본질적인 대립은 사상의 대립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나오지만, 이방원이 대량 학살을 한 대부분의 이유가 왕권강화입니다.
이미 고려가 나약한 왕권, 강력한 귀족/무신들로 망가진 것을 보았던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과 현명한 왕이 있어야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는 철인정치와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반대로 정도전은 자신의 능력으로 올라온 신권 중심으로 운영하고, (권력을 가지고 태어난)왕은 그러한 신하의 능력을 평가하고 임명하는 선에서 그쳐야한다는 일종의 관료중심의 이상사회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정도전이 필생의 노력으로 만든 경국대전은 어찌보면 관료 중심의 체제에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근대국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1차 왕자의 난의 결과로 이복동생 둘과 정도전을 죽이고, 그 일파를 제거합니다. 이걸 본 이성계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납니다. 이때 다음 대의 왕은 자신의 형이 정종이 되는 것은, 손에 피를 묻힌 자신이 바로 왕이 될 수 없었던 탓이기도 하죠. (이성계는 아마도 이방원을 증오하고 있었으라고 봅니다)
제1차왕자의난을 기점으로 조선은 신권 중심의 사회와 왕권 중심의 사회의 기로에서 왕권 중심의 사회로 기운 것이고, 그럼에도 경국대전을 채용하여 신권과 왕권을 조화시키는 기틀을 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종의 책사인 하륜이 경국대전을 속육전으로 편찬한 것은 서로 상극임이 분명한 정도전과 하륜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하륜이 유학자로서 경국대전을 높게 평가하고 시스템으로 차용할만하다고 믿었던 것이고, 이를 태종 이방원에게 설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의 아이러니는, 위화도 회군 직후 인질용으로 잡혀 있던 계모와 이복동생을 구해낸 것이 이방원이었는데, 이 난으로 죽인 것 또한 이방원이라는 부분입니다. 겨우 1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죠.
또한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정도전이 밀어주던 방석의 주변이 고려시대의 지배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태조가 추진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혼인을 통해 기존 고려 구세력과 얽힌 그 중심에 이방번(공양왕의 사위)와 이방석이 있었던 점이있었던 점. 그래서 이방번을 세자로 앉히려고 했으나 정도전 등의 반대로 이방석이 선택되고 살아 있는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했던 점입니다. 이는 결국 왕권약화와 외척세력의 등장으로 고려시대로 회귀하는 선택이 될 수도 있었기에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었던 문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정도전이 신권 중심의 사회로 가기 위해 왕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부딪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입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해서 정도전이 이 때 추진하던 것이 요동정벌정책입니다. 명과 싸우자는 것인데, 위화도 회군을 겪었던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상극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위해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고, 그를 통해 자신을 약화시키려고 한다고 느낀 이방원은 결국 정도전을 죽일 수 밖에 없었으리라고 봅니다. 또한 이때 이방원의 책사라고 할 수 있는 하륜이 파직된 것도 절묘하게 난의 구실을 주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경과로 인해 요동정벌을 위해 열심히 훈련된 정예병이 투입된 난이었기에 사병들이었지만 정규군을 쉽게 제압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궁궐 호위 군 중 하나인 호분위 전원이 이성계의 가별초 병사로 이성계와 함께 황산 대첩, 위화도 회군 이후 개경탈환 작전등 엘리트중의 엘리트 부대였습니다)
# Kill: 이복형제 이방석, 이방번, 개국공신 정도전, 개국공신 남은, 심효생, 장지화, 이제, 유만수, 변중량, 개성 왕씨들..., 궁궐수비대장 박위
>>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으로 방석, 방번의 어머니였고 지금은 정릉이라고 부른 곳에 안치되었습니다. 이성계가 가장 아꼈던 부인입니다. 정릉은 원래 한성부 중심에 있었는데, 태종 이방원이 이성계 사후 이전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이방원에 의해 왕후에서 후궁으로 강등시켰다가 250년 지난 현종때 우암 송시열의 주도로 복위됩니다.
>> 이때부터 서얼 차별 규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전에는 서얼이라는 단어가 없었으나, 이방원은 이 이후 방번,방석을 서얼 즉, 첩의 자식이라고 불렀으며, 하륜이 이에 더해 서얼(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치 말라고 주장했고, 결국 서얼 금고령이 되었고, 적서 차별제도가 시작됩니다. 후에 세부조항이 반포된 것은 성종 때입니다
3. 제2차왕자의난 (1400년 - 이방원 33세)
박포 등이 1차 왕자의 난 때 큰 힘을 발휘했음에도 보상을 받지 못했고, 이방원의 형 이방간이 왕이 되고 싶은 욕심이 합쳐져서 일어난 난입니다.
결국 선죽교 근처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이방원의 휘하 맹장이 죽습니다. 하륜의 도움으로 준비가 덜 된 난을 정리하고 방간은 유배, 박포 등은 유배후 처형합니다.
이 후 하륜(하륜은 정도전과 상극이라고 불리우는 모사이자 유학자입니다. 고려 때부터 활약한 이로, 이방원의 두뇌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이방원이 태조가 되고 나서도 많은 활약을 벌입니다. 하륜이 만든 것 중에 유명한 것이 신문고입니다)의 노력으로 정종이 태조를 설득해 이방원을 세자로 만들고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제2차왕자의난의 핵심은 형제들의 권력 다툼을 완전히 끝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인 이방의는 이 때 자신의 모든 병사를 국가에 바치고 널널하게 살다가 갔습니다) 이방원의 형은 이방우, 이방의와 이방간 셋이었는데 이 중 이방우는 조선 건국 직후 술마시다 죽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이방간은 이 사건으로 완전히 폐서인, 이방의는 알아서 스스로 배제되었습니다.
이 때는 이성계와 모든 이씨들이 이방원 편을 들었고, 싸움도 오래끌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싸움의 주모자 중 하나이자 형인 이방간은 폐서인되고 귀양갑니다. 죽였다간 안그래도 평판 0인 이방원입장에서는 곤란해질 것이라서 대신 충동질만 하고 자신은 가담하지 않고 집에서 자고 있던 박포가 죽습니다. 하지만 이 후 태종 이방원 사후, 세종대왕 때 신하들의 요청으로 이방간의 아들 이맹종에게 자진하도록 명해져서 죽습니다. (이맹종은 나름 활을 잘 쏘고 간사한 꾀가 많았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능력있고 정권에 위험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Kill: 박포 (어? 왜케 안죽었나 싶죠? 별로 안죽었습니다. 반란군이야 죽었지만, 그 외에 참여한 이름난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 하륜은 정도전과 같이 이색의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며, 정도전이 사이비로 지칭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럼에도 정도전의 사후 그가 남겨놓은 고려사나 경국대전 편찬등을 완수한 사람이고, 태종 이방원의 책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4. 조사의의 난 (1402년 - 이방원 35세)
조선시대 최초의 내란입니다. 조사의는 이성계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이자 앞서 제1차왕자의 난에 죽은 이방석, 이방번의 후견인이기도 했습니다. 신덕왕후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태조 이성계(?!?!)가 이를 인정해서 일어난 반란.
사실상 태조 이성계가 태종 이방원 때려잡겠다고 일으킨 것으로 보이고, 조사의는 일종의 바지사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초기에 인원을 파견해서 무마하려했으나 이들은 순살당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해서 군세를 만명까지 늘입니다. 결국 청천강에서 이숙번을 대장으로한 4만명의 진압군과 대치한 반란군 1만명이 싸웠으나 결국 대패. 사실상 이성계 인생의 유일한 1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 진압 후, 차마 이성계를 처벌할 수 없으니 그 주변 사람들이 대신 처벌받고 죽은 것으로 주모자가 이성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사의는 주모자로 이름이 있으나, 겨우 참수형으로 죽은 것으로 바지사장이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부분이 조선시대 난이 별로 없기도 하지만, 국왕이 친정(직접 군사를 내어 출병)한 유일한 사건임에도, 친정으로 조사의의 난이 있는 함경도로 가지 않고 전혀 다른 방향인 원중포로 향합니다. (그러고는 바로 4일만에 돌아오는데, 이 때 회양부사 김정준에게 말 1필을 포상으로 줍니다. 이 때 아마도 이성계를 생포한게 아닐지?하고 추측됩니다)
# Kill : 조사의와 그의 아들 16명 (어라? 왜 죽은 애들이 이렇게 적을까요? 이유는 아마도 이성계 때문이 아니었을지? 나머지 반란군 가담자들도 많았지만, 죽이지는 않습니다)
5. 자신의 처가를 몰살시키다 (1410년 - 이방원 43세)
제1차 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 이방원의 큰 힘이 되었던 처남들인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 모두 첫째인 왕세자 양녕대군을 지지하고 외척세력을 형성하자, 옥사를 만들어서 모조리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병을 얻어 장인인 민제가 병사했죠.
# Kill : 처가 처남(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부회), 장인(민제)
> 이 때 쯤에 태종 이방원은 신하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세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길기도 하지..ㅠㅜ)를 추증하였습니다. 자기가 죽여놓고 직위는 왜 주는 거...?
> Kill은 아니지만 첫째인 양녕대군을 폐위할 때 그 장인을 외지로 유배보냅니다. 죽을 수도 있었지만 고분고분하게 살아남아서 후에 복귀합니다.
> 태종 이방원의 책사인 하륜을 만나게 된 계기가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와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6. 세종대왕(이 후 세종대왕)의 장인(국구)을 죽이다 (1421년 - 이방원 54세)
이때는 이미 태종 이방원은 왕권을 세종대왕에게 넘겼지만, 세종대왕의 와이프인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후를 영의정부사로 임명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냅니다. 이 때 병조참판 강상인의 보고 문제를 이유로 삼아 모반대역죄로 심후와 함께 죽음을 당합니다.
하지만 일부러 외척세력을 약화시켜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이는 부분이며, 심후는 앞서 몰살당한 태종 이방원의 처가 민무휼과 사돈 관계이며 세조의 외조부이기도 합니다.
# Kill : 세종의 장인이자 세조의 장인/국구(심온), 세종의 장인의 동생(심정), 병조참판 강상인,
7. 자신의 수하를 숙청하다
- 이숙번을 유배보내다(1417년) - 이숙번은 문관, 무관이면서 태종 이방원의 측근이었습니다. 하륜에 의해 천거되었고, 제1차왕자의 난에서 방석,방번을 제거하고, 정도전,남은 심효생을 제거한 공을 가지고 있는데다, 박포의 난을 평정했으며, 조사의 반란까지 진압한 오른팔이었지만 거만하게 굴고 세력을 형성하려하자 삭탈관직 후 유배보내집니다
- ... 그 외에도 수많은 공신들이 세종대왕 즉위 전후로 숙청되었고, 이유는 단한가지. 왕권강화를 통해 중앙집권적 조선을 만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렇게 노력한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모든 오욕을 짊어지고 고려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이상적인 조선을 만들려고 했었습니다.
덕분에 외척 세력도 없고 왕권을 위협하는 자들이 없는 조선의 왕이된 세종대왕은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킬방원이라고까지 불리지만, 실제로는 명분 없이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고, 심지어 난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책임이 없으면 죽이지 않는 의외로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할만 합니다. 격동의 시기 여말선초에 태어나 고려에서 대과에 급제하고 조선의 왕이 되기 까지 끊임없이 올바른 사회가 되기 위한 길에 대해 모색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죠.
PS. 그런데 세조가.... 그런 왕권을 약화시키고 한명회같은 자들의 권신들의 붕당정치를 만들어서 조선이 부패한 것은, 태종 이방원이 예상하지 못한 미래의 이야기죠
시대의 괴물이면서 혁명가의 이중성...
그것에는 공감합니다.
이방원의 나라죠
똑똑하고 냉정하고
죽일 만해서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혹시...친일사관을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라면 죄송합니다만 친일사관의 단골 레파토리네요.
과거급제한 문과 엘리트중에 엘리트죠.
경국대전은 성종때 완성된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조선경국전은 경국대전의 기초가 된 책이죠.
이성계의 아들이고 킬방원이라 무력캐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만
사실은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었고, 정몽주와 랩배틀에서 볼 수 있듯이 문과적인 능력이 뛰어났었죠.
세종의 장인이라 후를 붙여주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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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이 세우다라고 표현하면 옹립한 것처럼 보이고 신돈의 핏줄로 의심되는 개념이겠지요
그리고 신돈은 이미 공민왕때 처형당했는데 어찌 새로운 왕을 세우겠습니까
또한 위화도 회군으로 옹립된 왕은 창왕이고, 귀양 간 우왕의 복위 시도로 인해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허수아비 왕이 공양왕이지요.
나름 재밌게 쓰셨는데 오해의 소지를 위해 정정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