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경기도 성남 구시가지에서 자랐습니다.
분당 말고요. 구 시가지에요 중원구 쪽.
거기서도 은행동이라는데를 살았었습니다.
성남 구시가지라는 도시가 거의다 그렇지만 특히 은행동 쪽은
산을 대충 깎아서 그 고개마다 마을이 생긴 곳입니다. 고개가 무척 많죠.
심지어 배를 굶주린 적이 있을 때는 그래서 길가다가 빈혈이 와서
하늘이 보랏빛으로 보이고 정신을 잃을 지경도 있었던 -_- ;;;; 먼 얘기같지만 90년대 얘깁니다...
.........인데 벌써 30년전 얘기잖아. 먼 얘기 맞네요 -_- ;;
암튼 저는 그래서 10대 중반까지는 개념 자체가
"집" 은 "고개를 올라야 존재하는 마을이 있는 곳, 즉 올라가서 있는 곳"이었고
"시장"이나 "번화가"는 "내려가야 있는 곳" 이었어요.
당시에는 집도 판자촌이라서... "화장실"은 실외에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죠.
그래서, 중2 때쯤 친구따라 놀러간 친구의 부잣집 친척이 있는 양재의 어떤 그 집은
실내에 화장실이 있는 곳, 집에 복도가 있는 곳, 무엇보다.....
아무리 걸어가도 고개가 안 나오는 마을이 있는 곳... 이었습니다. 신기했죠.
다시 현대로 돌아와서 ㅋ
예전에 모공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어요. 이런 얘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못 사는 집 누나가 동생에게 피자를 사주고 먹는법을 가르쳐주면서
'너는 어디가서 이런걸로 창피당하지마'" 같은 얘기.
그 때는 '왜 그걸 못먹었다는 걸로 창피해하느냐, 열등감일뿐이다' 라는 의견도 있었고,
저는 왜 그게 공감이 가는지 ... 따위의 쓸데없는 설전을 벌였죠.
어차피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세상과 가치를 판단하는 거겠죠.
판교의 알바생도, 그 누나도, 어떤 서러움이 있었을 것이고 어떤 불안감이 있었겠지만
여전히 그걸 공감하실 분도 계시겠고, 열등감이라며 핀잔을 주실 분도 있을 겁니다.
그냥 저는 그래요. 그런 사람들에게 '독해져야 성공하는거야' 같은 얘기 안했으면 좋겠어요.
자극을 줘야 성장한다며, '너 그거 열등감이야, 서러우면 돈 벌어서 성공해' 같은
가시돋힌 얘기하지말고, 공감이 안되면 그냥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한마디 더 얹는다고 해서 그 서러움이나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아요.
척척석사의 문장을 빌어서 말하자면, "저는 알아요". 제가 겪어봤거든요.
조언이랍시고, 불필요한 자극과 가시돋힌 말이 내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제 케이스에 국한될진 몰라도 오히려 그것보다는 세상 따듯한 말 한마디가,
어차피 책임져줄 수 없는 희망이라도 희망을 북돋워주는 말들이 더 고마웠습니다.
문화컬쳐는 자극적인 말로 오지 않아요.
하지만 상냥한 태도는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때도 성남이랑 분당(정자동 이쪽)은 진짜 격차가 크긴 했죠 ㅎㅎ
서울도 재개발이 많이 진행 되어서 예전과는 반대의 인식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달동네 였지만, 이제는 높은 동네가 좋은 동네...
연해주 고려인들 소련이 이주시킨것 처럼
하지만 상냥한 태도는 마음에 남더라고요.
저는 이 글을 마음에 남기겠습니다.
한마디 더 얹는다고 해서 그 서러움이나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아요’
마음에 와닿는 말씀 입니다.
남 지적하는거 쉽죠. 자극을 준다고 하는 말이겠지만 실상 본인 감정 위해 하는 말들이죠.
힘든 삶을 견뎌내야하는 사람에게 위로도 필요하고,
때로 아무말 없이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감가는 맺음말이네요.
울림이 있는 말이네요.
겪어보지 못한 계층의 탈이해화가 가속될꺼 같습니다.
왜냐면. 자기만의 어렵다는 상황은 객관적인 정량화가 어려운거거든요
한마디로 "빵 없으면 케익 머겅" 이런말을 쑥숙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꺼란 걱정입니다
난 아닌데 넌 왜 그러냐 라는 태도는 언제나 마음에 안드네요.
자극적 워딩은 그냥 문화적 빈곤에서 나오는 거죠. 70년대 박정희 정서에 부합하는 꼰대문화의 기반.
문화적 소양이 폭넓은 이해를 낳고 공감과 유머와 친절함을 낳습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력과 문화적 지능이 필요한 일이죠.
주인 집과 같은 마루를 쓰며 쪽방에 네식구 오손도손 살던 시절이 기억나네요.
그러다가 서울 부촌으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는데...
친구들이 워크맨을 생일 선물로 주는 것을 보고 문화 충격을 받았고,
호텔 피트니스 클럽에 2천을 태우는 것이 당연한 것임이 놀랬고,
모든 대륙에 가본 나라가 있는 것이 대다수인 것을 보고 조용히 있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나름 공부 잘 하는 줄 알았다가, 반 꼴등으로 입학해서 충격 받은 것
그리고 이 악물고 공부해서 상위권으로 올라갔더니 교무실 불려가서 컨닝했냐고 한참 선생들한테 털렸던 기억...
말씀하신대로 자극적인 말은 안해도 몸으로 다 체감하니, 따뜻한 한마디가 더 기억에 남죠.
여기에 투기꾼들이 가세해서 입주권 되팔이를 했는데 정작 이렇게 입주권을 사서 간 사람들 역시 와 보니 개판 5분전이었다는거죠.
교통도 없어, 일자리도 없어, 집도 없어... 이런 황망한 상황에서 경기도가 이제 이사를 했으니 돈을 내라... 고 던져준 청구서는 원래 약속한 금액의 몇 배가 되는 돈이 찍혀 있었던거죠.
그리하여 1971년 누군가는 "광주투쟁"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광주폭동"이라고 부르고, 또 518 민주화 투쟁과 구분하여 "광주대단지사건"이라고 부르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들은 집단 행동을 하게 되고, 그 와중에 서울시와 경기도의 의도된 무책임, 그리고 경찰기동대 투입. 초기에 투입된 경찰기동대는 주민들에 의해서 개박살이 났고, 그 지역이 전체적으로 무정부상태로 며칠 지나가자 결국 정부가 백기를 듭니다. 이때 수습책으로 성남시가 탄생하였습니다.
(광주폭동이라고 부르는 분들 중에는 나름 잘나가는 진보 인사분들도 계십니다. 체계적인 조직적 구성과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항거가 아닌 폭력사태로 부터 시작된 일이라는거죠. 이러한 사전적 정의에 가치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므로, 저는 이러한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제 생각과는 다릅니다.)
정부가 백기를 든 나름 성공한 투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민이 모여서 토지만 덩그라니 있었던 이 동네의 개발이 계획대로 이루어졌을리는 만무하죠. 그 뒤로도 88올림픽 등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서울시 내의 빈민들은 서울 밖으로 내몰렸고, 그 중 한 곳이 구성남 지역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난개발은 지속되고 지금의 구성남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님 신혼때 광주로 가면 땅에 줄치고 눌러 앉으면 집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들려와서 그리로 가셨다고 했어요.
울퉁불퉁한 언덕배기에 그냥 길과 노끈으로 구획만 되어 있고 거기에 하꼬방 집 짓고 살기 시작한거죠. 그러다가 자기 집 되고.
사람들 모여들면 작은 가게 생기고 국수집 생기고 쌀가게 생기고.
그러면 거기서 민과 관 사이에 싸움도 있었겠죠. 그거를 운동권 사람들은 투쟁이라고 이름 붙여서 의미부여를 했나본데, 요즘도 재개발 하면 조금이라도 이익을 취하려고 아줌마들 웃통 벗고 시청에 가서 깽판 치고 난리나요.
구시가지 재개발로 판교로 아파트 배정받아서 이사간 사람들 얘기 들어봤는데, 성남시청 1층에 아줌마들 자기들 못 건드리게 윗옷 빨개벗고 대자로 누워서 난리도 아니었다네요. 결국 판교 아파트를 쟁취했고요.
언덕이 하도 높고 많아서 성인이 됐을때는 종아리가 거의 헬스한것처럼 튼튼하죠
독해져야 성공하는거야
이런얘기는 성공한 사람들이 하는 얘기죠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말은 독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그거 정신병인데
참 언덕이 많은 동네구나 싶었어요. 근데 역삼동도 그래요.
가건물 집들은 80년대에 있었는데 소방도로 생기면 그 집들이 당시 가격으로 5천만원대로 올라가서 투기용으로 집사러 오는 사람들 꽤 있었어요.
물가 엄청 싸고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남은 본시가지 전체가 언덕길입니다.
그래서 제가 허벅지가 탄탄한지도 모릅니다.
성인이 되어 서울로 대학을 다니면서 성남에 대한 이미지가 낙후된 도시라고 인식되고 있다는 거를 알았네요.
나중에 중심가 살던 사람 만나보고 서울 살아보고 하면서 그 때가 그랬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