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인비와의 대화
어찌 살바 모른채 앞뒤로 구르던 20세 때에 지인 형님의 추천으로 읽었던 책입니다. 물론 지금도 어찌 살 바 몰라 앞뒤로 구르고 있지만요...
참로고 저는 제 하루 일정에 위기(?)가 생겼을 때 만 신을 찾고 무사안운을 비는 저급한 "기복신앙"정도의 레벨을 갖춘 무신론자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종교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내다 작년부터 논란이 되어온 종교, 특정종교의 행태를 접하게 되고 어린시절 읽었던 책 기억이 다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비록(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피상적이지만 저 책을 보고 가깝게는 제 삶, 그리고 크게는 인간에 있어 종교의 역할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논리를 건너 뛰겠습니다.
토인비는 인간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과제를 "자기중심주의"이고 이러한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철학, 종교, 도덕이라 하였는데,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과연 종교가 본래의 역할,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아니올시다...라고 말하고 싶고, 더 심하게 말해서는 "본래 기능을 잃어버린, 소금의 짠맛을 잃어버린 종교는 아편보다 더욱 인류에게 해를 가하는 암적 존재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책을 붙잡고 정독하고 싶지만, 이미 게을러지고 나태해진 머리와 몸뚱아리 탓을 하며, 인터넷에 이를 잘 정리, 요약하고 본인의 느낀바를 잘 정리한 Brunch- Site 글이 있어 올려봅니다.
전문을 보고 싶으면 다음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s://brunch.co.kr/@pedkang01/4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같이 느끼며, 공통되는 문제와 함께 맞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인류는 어떠한 방식으로 미래를 살아갈 것인가”, 바꾸어 말하면 산업혁명 이래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인 이 새로운 인위적인 환경에서 인간의 삶을 어떠한 식으로 영위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문명의 도래 이전부터 인간은 스스로 자연의 주인이 되기를 바래왔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은 현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달성이 되었는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가 정복하고 부분적으로 파괴한 자연환경에 비해 이 새로운 인위적 환경에서의 삶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인간은 깨닫게 됩니다.
◉ 삶의 목표와 보람
나는 인간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사랑, 예지, 창조의 수행에 그것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이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능력과 정열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치 있는 것은 대부분 어느 정도 자기 희생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모두 욕망이지만, 이 욕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몰각(沒却)하여 타인이나 세계 혹은 우주의 배후에 있는 것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고자 하는 욕망이고, 또 하나는 우주를 빼앗아 자기 자신 속에 침몰시킨 다음 자기의 목표 추구에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자기 자신을 몰각하여 다른 생명을, 타인을, 우주를, 그리고 우주의 배후에 있는 것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며 모든 대상 중에서도 제일 먼저 자신과 동류인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이 있는 것,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사랑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자연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자연도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우주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이외의 것을 사랑한다는 마음은 서방세계보다는 인도나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서방세계에서 이러한 흔적을 찾는다면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태양, 바람, 공기, 구름, 불을 우리의 형제라 하고, 생존해 있는 모든 인간을 우리의 자매라 하면서 신을 찬미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형제이며 자매라는 의식이 매우 강했던 것입니다.
인간 이외의 생물을 인간의 목표 추구를 위한 도구로 삼거나, 소나 말처럼 마구 부리거나 혹은 도살하여 먹어치우는 것을 사랑과 양립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인간이나 가축, 곡물에 유해한 생물을 제거하는 도덕적 권리를 우리는 갖고 있을까요? 해충이나 잡초를 제거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인간 이외의 생물과 마찬가지로 감정과 무의식적인 동기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고작 마음의 표면에서 감돌고 있을 뿐인 것, 그것이 인간의 이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인간성의 합리적인 면과 비합리적인 면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삶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의 보람은 삶이 창조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는데, 창조적이라 함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말합니다. 가능한 한 이 우주에 나쁜 것이 아닌 좋은 것을 첨가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시작은 우리들 눈에 보이는 우주가 분명히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럽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얼마나 많은 불완전이 이 우주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생물이 있으며, 그들 생물 대부분은 서로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어떤 동물을 막론하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거나 혹은 식물을 먹이로 취합니다. 생물은 물론이고 생명이 없는 자연까지도 대책을 마련해 놓지 않거나 관리를 소홀히 할 때에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주게 마련입니다.
◉ 자기중심주의의 극복
기아와 가난으로부터 해방되고 신체의 안전을 지키는 가운데 휴양을 즐기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본질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또 모든 개개의 생물도 역시 자기중심적입니다. 사회나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류나 늑대, 혹은 비버와 같은 사회적 종(種) 뿐 아니라 모성 본능이 강한 다른 종에서도 자기중심주의는 여전히 현저합니다. 사실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 바로 이 자기중심주의입니다. 따라서 자기중심주의란 살아 있다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무릇 생물이란 무엇일까요? 생물이란 일종의 분리된 반세계(反世界)라는 형태로 자립하고 있는 우주의 작은 한 조각입니다. 이 우주의 작은 한 조각은 나머지 우주의 조각을 자기의 목적 달성에 봉사하게 함으로써 자기를 주축으로 하여 움직이게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곧 자기중심주의의 의미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는 소망입니다. 모든 종의 생물은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극도의 슬픔에 빠졌을 때 비로소 자신이 갖고 있는 자기중심주의의 아이러니를 자각합니다. 그리고 그 공허함에 직면하여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생물의 일종인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기중심주의적이지만, 인간은 의식적으로 어느 정도 자기중심주의와 싸울 수 있으며, 어느 정도는 극복도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철학이나 종교는 모두 최우선적으로 이러한 자기중심주의의 극복을 문제시해 왔습니다.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태교의 견해는, 얼핏 보기에는 아주 판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고찰해 본다면 모든 종교가 최우선적으로 개인의 심리 혹은 영혼에 작용하고 있으며,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도록 영혼을 설득하고 그 수단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어느 종교든 모두 같은 해결책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종교는 이 자기중심주의는 사랑에 의해서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 다른 생물에 대한 사랑, 그 밖에 인간을 초월한 것에 대한 사랑, 우주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정신적 존재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