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모공에 실망한 날은 처음인 거 같습니다. 아무리 페미가 싫고 PC가 싫어도 그걸 이 사안과 싸잡아서 회피하면 안되는 겁니다.
제 의견을 대신할 더 글빨좋은 칼럼이 있어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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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의 고백, 처음이 아니다
그렇다. 샘이 자신이 당한 인종차별 사례를 이야기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물론 <비정상회담> 초기만 해도 그는 “한국 사람들이 몰라서 실수를 하는 거지, 진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방송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2014년 연말, ‘차별’을 주제로 토론을 하던 샘은 조심스레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었다. 단역배우 아르바이트조차 백인들은 앞줄에 세우고 흑인들은 뒷줄에 세우는 차별을 피할 수 없었던 이야기, 한국인들의 편견과 차별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국에 오는 걸 망설인다는 그의 흑인 친구들 이야기, 샘의 광고 화보가 큼지막한 걸개그림으로 인쇄돼 쇼핑몰 건물 전면에 걸린 것을 보고는 마침내 흑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이 사라지나 싶어서 울었다는 친구의 사연까지. <말하는 대로>에서 들려준 이야기 중 절반가량은 이미 2년 전 <비정상회담>에서 나온 이야기다. 2014년 말 <비정상회담>을 다룬 기사들은 대부분 이 이야기를 큰 비중으로 다뤘고, 많은 이들이 “처음 알았다”, “놀랐다”,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고, 2년이 지난 지금 우린 마치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사람들처럼 다시 같은 이야기를 반복 중이다.
샘은 <비정상회담>에 입성하는 순간부터 차별을 겪어야 했다. 2014년 7월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사회자 전현무는 첫 방송 시청률이 3%를 넘기면 샘 오취리 분장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다른 인종이 흑인의 짙은 피부색이나 곱슬머리, 두꺼운 입술 등의 인종적 특징을 흉내내는 것 자체가 흑인에 대한 조롱이자 인종차별이란 사실을 가볍게 간과한 것이다. 1980년대 말 한국방송 <쇼 비디오 쟈키> ‘시커먼스’와 1990년대 말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게으르게 소비하던 한국방송 <개그콘서트> ‘사바나의 아침’을 보고 자란 한국인들에겐 흑인 분장이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1800년대 미국에서 백인 배우들이 얼굴에 검댕을 칠해 흑인 분장을 하고는 무대에 올라 과장된 춤과 노래로 흑인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악의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하던 ‘블랙 페이스’의 악습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전현무의 ‘샘 오취리 분장’ 공약은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었다. 국경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표방한 <비정상회담>의 시작은 사실 그렇게 지독한 인종차별과 함께 시작했다.
나는 과거에도 이 지면에서 한 차례 ‘시커먼스’와 ‘사바나의 아침’을 인종차별적 코미디의 예라고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주장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건 인종주의가 아니지 않냐’는 의견이 메일함에 수북했다. “그냥 랩 음악이 흑인 음악이라서 흑인 분장을 한 것이지 비하를 하려던 건 아니지 않나”라거나, “웃음을 위해 차용한 소재를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대체 무엇으로 웃길 수 있단 말이냐” 등의 반응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았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에는 인종차별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이주노동자와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을 차별하는 것은 “이들이 불법 체류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흑인을 ‘흑형’이라 부르며 흥이 많고 신체기능이 탁월한 인종이란 식의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 흑인이 많기 때문에 칭찬 삼아” 하는 일이 된다. 이 논리 구조 속에서 한국인들은 ‘이유 없이’ 부당하게 차별하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77729.html#csidx3cd2611bf17b8a4abf61a768010317c
피부색은 그 자체로 비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죠.
욱일승천은 나찌 하켄크로이츠와 같이 군국주의의 상징입니다 그 자체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는 전세계적으로 금지되어야 마땅한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경우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들어 나찌 독일을 그린 작품같은데서 PC를 들먹이며 뭐라 할 수가 없는거죠 얼마전 논란이 된 바람과함께 사라지다도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거니 애초에 논란이 될 수 없습니다
의정부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비하나 희화화할 의도가 있었다면 그것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지, 유명 캐릭터를 모사한 것 그 자체가 욕먹을 짓은 아니라고 봅니다 PC를 끼얹을 대상이 아니라구요
하지만 관짝 소년단은 목적이 그게 아니자나요.
왜 하면 안되는지에 대한 이유는 없어지고 형식만 남은거죠...
자꾸 이 이야기가 거론 되는 것도
각자 생각하는 차별과 비하에 대한 기준이 다르고, 그에 대한 체감을 가까이에서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지나가는 흑인에게 "어?? 깜둥이네??" 하면 확연히 저건 인종차별적이고 비하적인 표현이다라고 느낄겁니다.
허나 이번일 같은 경우에는
왜? 흑인분장을 한것 만으로 흑인비하가 되느냐?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그랬구요.
그 이면에서 저게 왜? 흑인 비하가 되는지 이해하려는 자세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지금이 그 시기이고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는 중이라고 봅니다.
이미 몇번이나 말을 했는데 왜 몰라? 라고 하기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을 처신할 수 있었던
경험이 적었던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님과 같은 의견을 가진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내 의견이 다른 의견인데 반론하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요.
생각없이 그냥 악플에 비아냥 다는 사람들은 논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