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이 건물주 명의가 아니라 해서 ? 표 달았습니다
그러나말거나 자기꺼나 마찬가지일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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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출근 할때마다 들러서 빵 사가던 곳 건물인데
시가 2천억 짜리 건물이라니
강람역 5번 출구 바로 앞
초역세권!!!!
(관련기사)
https://news.v.daum.net/v/20200716050602700
등기부등본을 보면, 백씨는 장남 명의로 돼 있던 땅에 건물을 올려 1994년 12월 역시 장남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를 마쳤다. 당시 장남 나이는 41살이었다. 백씨의 재산 형성 과정을 추적한 전필건 전 교육부 사학혁신위원은 “40대 초반 나이에 강남 한복판에 대형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명의신탁에 의한 차명소유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와..........
간도 독립군 어르신들이 지하에서 대성통곡하시겠네요...
운봉 운산 항도
구인천전문대
구인천대인문관
하늘에서 보면 한자로 왕중왕으로 보였어요.
저 두매국노!!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어찌 살고 있는데...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4978677CLIEN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5163580CLIEN
백선엽이 동생백인엽 비리로 문제생길때마다 빼준게 한두번이 아닌데 공범이 아니라고요? 선인학원 이름부터 형이름 동생이름 섞어지은거고 이사진 중에도 가족이 섞여있는데도요?
백인엽씨가 사고칠때마다 그거 감싸주는 행동 얼마나 보여줬는데.. 그것만봐도 최소 방조내지 공범인거 확신범 정도입니다.
진지하게 댓글달면 신은 인간사 상관 안하고 원래부터가 인간계도 지옥이라 불릴만 하죠..그럼 축생은?
지옥이네 어쩌네 해도 축생보다는 인간계가 낫죠..인간사 덧없는 한낮의 꿈이라고 하는데..우리모두 건강하자구요.
돈만 많으면 그게 정의가 되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길바닥에 스포츠카가 많이 굴러다니는 사회도 절대 좋은 사회가 아니죠. 그만큼 부가 편중되어 있다는 증거죠.
모두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
진짜 저들을 우리가 독립군이라고 부르는게 맞다고 생각하시는건지요
가끔은 김일성도 독립군으로 불러드려야 한다는 분도 계시긴 한데 이런분들은 드물고
대부분은 역사 잘 모르시고 주사파들에게 선동당하셔서 막연하게 독립군이라고만 알고 계시더라구요
세상에 똑똑한 사람 많구요 전 그냥 평소 역사에 관심이 좀 있었을 뿐입니다
그냥 만주군 경력 자체가 문제지 독립군 때려잡았다 해버리면 김일성부대를 우리가 독립군이라고 불러드리는 셈입니다
백선엽은 친일파가 맞습니다.
하지만 간도특설대가 때려잡은건 독립군이 아니라 동북항일연군이고
독립군으로 볼수있느냐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https://blog.naver.com/chralee/221395324369
위의 글을 한번 읽어보시고, 위의 글이 꼭 진실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위의 글보다 더 잘정리된 논리로 동북항일연군이 독립군이라고 주장하신다면 저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 기준에서야 북한 독재정권을 세운 이들의 직접적 조상이니 다 악질 빨갱이로만 보이겠지만, 1930년대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조차 자신들의
반공판결을 후회할 정도로 사회주의가 국제사회의 중요세력이었습니다. 특히 식민지 민족운동에서의 영향력은 더 대단했구요. 사회주의가 실패로 결론난 것이 1990년대지, 194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50년 뒤의 일을 어찌 안답니까. 우익적이었던 충칭임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안에서조차 국유화가 강령으로 들어가던 시절인데.. 친일이 쓰레기같은 짓거리라는 것은 당대에도 진리였지만, 사회주의를 추종한다는 건 당대에는 지금처럼 오류로 보이지 않았다는거죠. 김일성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했다는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으로, 한국전쟁은 한국전쟁대로 평가해야죠. 백선엽의 친일은 친일이고, 한국전쟁에서의 공은 공대로 보는 것처럼. 뒤의 것이 앞의 것을 그리 쉽게 덮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동북항일연군의 관할주체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였고, 또한 총사령은 중국인이었으며, 그 구성원중 1/3정도만 조선인이었습니다.
백선엽은 1942년 자원이 아니라 "발령"을 받아서 간도특설대에 들어갔구요.
20년에서 45년 말씀하실 것이 없습니다.
백선엽이 근무한 42년부터 동북항일연국이 과연 민족의 독립군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역사적으로 말씀 부탁 드립니다.
그게 항일이 아니면 뭔가요? 이거 되려 자폭이라는거 알고는 있으신지?
빨갱이 타령 외치는거말곤 논리가 없어요. 하여튼...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 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 정부와의 대응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 -1937년 9월 26일 8로군 중대장 이상 모든 간부들을 모아서 실시한 마오쩌둥의 훈시.-
실제로 마오쩌둥은 일본군과 싸웠다고 자기 부하를 혼내기도 합니다
"(팔로군 부총사령관)팽덕회는 우리 편이 아니다. 백단대전(百團大戰)은 국민당을 도와 일본을 물리쳤던 것인데 이는 장개석군(軍)의 입지를 강화시켜 준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애국이 아니다. 일부 동지들은 처음에 일본이 영토를 적게 점령할수록 좋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나 그것은 짧은 생각이다. 일본이 영토를 많이 점령하게 해야 우리측에 유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장개석의 나라를 애국하는 꼴이 된다. 나라중에 나라 만들고 장개석, 일본, 우리(공산당) 삼자가 각축을 벌리는 ‘삼국지 형국’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리루이(李銳), 로산(廬山)회의 실록
솔직히 중공군 팔로군이 항일을 제대로 했는지도 회의적입니다
항일은 뒷전에 두고 국민당 뒷통수나 치면서 공산세력 확장에나 골몰한 것들을
왜이리 사람들이 중공 팔로군 항일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는지
공산당의 프로파간다가 성공적이었긴 하네요
여튼 오늘은 항일을 뭐라고 한게 아니구요
왜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이 김일성부대 잔당과 중공군을 독립군이라고 불러드리고 있는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을 프로파간다라고 하는 것이 프로파간다입니다. 이들의 항일투쟁이 다소 과장되어 있고 그 와중에 국민당과의 세력다툼을 함께 진행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그러나 시안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는 알고 계시겠죠? 관동군이 활약하던 만주지역이 대체 누구 세력권이었습니까? 아니 그럼 항일투쟁 열심히하던 국민당군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항일투쟁도 안하는 세력도 형편없고 오직 프로파간다만 있던, 심지어 공산제국 소련의 냉담속에 활동하던 중국공산당군에게 쫓겨나 대만으로 도망간건 무슨 하늘에서 천군이라도 내려와 도와서 그렇답니까? 마오쩌둥 멘션 하나 긁어와서는 국제 사회와 학계의 통념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뻔뻔하게 프로파간다를 들먹이니 참.. 더 할 말이 없네요. 70년대 국민윤리 교과서에서나 볼법한 얘기들을 2020년에도 듣고 있으니 ..
"팔로군은 지역에서나 관심을 가질 법한 느슨한 방어전에나 제한적으로 나섰다. 적이 쳐들어와 싸움이 시작되기만 하면 팔로군은 산으로 뒷걸음질쳐 충돌을 피했다."
TASS 통신 의 특파원 블라디미로프의 회고.
"특수 지역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회의가 군부대에서 수행되고 있는 유일한 작업입니다. 여름에는 여기에 농산물 비축 작업이 약간 추가됩니다."
TASS 통신
일본 주력군을 상대하던건 어디까지나 미국 지원을 받던 국민당군이었구요
중일전쟁 시점에 공산군은 4만명이었구요 국민당군은 300만이었습니다
공산당은 마오쩌둥 말대로 일본과 국민당군 사이에서 뒷통수나 치면서 자기 세력 확장에 정신이 없었어요
무슨 팔로군이 항일을 합니까 일본군 입장에선 주적은 300만 국민당군이지 4만 팔로군 따위 비적 취급 이었습니다
80년대 주사파 학회에서나 들을법한 낭만적인 팔로군 항일 이야기를 2020년에 듣고있으니...
"중공은 일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일본의 대륙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는 국공 합작이 있을 수 없고, 우리는 발전할 수 없고 최후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데, 내가 보건대 일본의 침략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일본에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마오쩌둥 1956년 전 일본군 육군 중장인 엔도 사부로에게-
마오쩌둥이 원하던 대로 된거죠 국민당군이 항일하면서 일본군에게 300만에서 1000만씩 갈려나갈때 불과 4만이던 중공군은 마오의 계획대로 국민당 뒷통수 치면서 야금야금 공산세력의 확장에 성공했습니다. 중일전쟁 말기에는 국민당군과 붙어볼만할 정도로 세력확장을 해요. 국민당군이 일본군한테 수백만 단위로 갈려나갈때 오히려 공산군은 중일전쟁초기엔 4만대 300만 비율에서 어떻게 전쟁말기에 제대로 항일 하면서도 병력피해는 커녕 국민당에 비등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는지 설명해 보세요. 어디서 주사파 자료를 가져와서 팔로군 미화나 하고있으니 참...
..
백선엽 장군이 명예원수 추대에 대해 논란이 있을 때 채명신 장군은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경석 장군이 '백선엽 장군이 명예원수에 추대된다'고 하자 "큰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라며 반대했다. 채명신 장군은 이 일로 인사복지실장이 채명신 장군을 만났다. 인사복지실장은 채명신 장군과 대담 후 더 확신을 가지고 김태영 장관에게 보고하였다. 이로써 명예원수 추대 해프닝은 끝났다. 박경석 장군이 말하길, 명예원수 추대를 무효화시킨 이 일은 채명신 장군이 조국에 바친 마지막 봉사라 한다
님의 논리대로라면 채명신 장군 비롯한 백씨의 성역화에 반대하는 참전용사 군원로 인사들도 빨갱이겠네요?
주사파라는둥 이런 정신나간 소리 함부로 들먹이는것에서 더이상 논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예우를 갖춘 현충원 안장 찬성하는 참전용사 군원로가 훨씬 더많을텐데요
그냥 만주군 경력 자체가 문제입니다. 독립군 운운 해버리면 김일성부대 중공군을 우리가 독립군이라고 불러드려야 한다구요
팔로군을 독립군으로 포장하려고 어디서 팔로군 항일 찬양하는 정신나간 소리 들먹이는 것에 대해선 저도 논할 가치를 못느끼겠네요
환빠에서 518 북한군 개입설까지 대체로 상식적인 이야기까지도 아니라하는 인터넷 블로거들이나 정체불명 미국 극우 연구소들이 기사 한 줄, 멘션 몇 개 가져다가 쓰는 글들에 놀아나지 마시고, 제대로 된 학자들이 쓴 정상적인 글들을 좀 보세요. 공산주의에 대한 개념이해가 없는 것은 정치성 탓이라 해도, 최소한의 사료비판도 없이 가져다 쓰는 말같잖은 글들로 중공군은 그렇다쳐도 독립운동했던 조상님들까지 욕보이시면 어떻합니까? 동북항일연군은 차치하더라도 중공군이 항일투쟁을 안했으면 그들과 함께 항일운동했던 조선의용군을 비롯한 수많은 좌익계열 무장독립운동 세력은 다 뭘했다는건가요?
뭐 이런 얘기 백날한다고 이런 분이 책을 읽을리도 없고, 여기다 에너지를 쓰고 있는 제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님이 아니라 이러고 지나가면 혹 오해할 사람들 있을까봐 순국선열들 뵙기 부끄러워 한 줄 더 적고 갑니다.
당시 중공에서 마오쩌둥의 위상도 모르시는 분과 이야기 했던 제가 한심하네요
중공군 미화하시는 분 앞에서 중공군과 싸웠던 순국선열들 뵙기 부끄러워 한줄 적고 갑니다
실제 있었던 팩트들에 대해서 대답한 번 해보세요. 2차대전 종전 직후 국민당군이 공산군의 4배였습니다. 세계 최강 미군의 압도적 무력 지원도 등에 업고 말이지요. 인터넷 블로거들도 당시 중국 공산군이 소련군의 지원을 받았다곤 차마 못하겠죠. 둘 사이 더럽게 안좋았으니까. 그런데 왜 공산군이 이겼습니까? 국민당군이 그때도 일본군과 싸우느라 바빴나요? 시안사건 당시 장학량은 왜 항일투쟁 안한다며 장제스를 납치했나요? 장제스가 공산군과 싸워야한다면서 국공합작 결렬은 왜 선언했나요? 이런 상식적인 역사책에도 나올 얘기 계속 해봤자 518 북한군 잠입설 신봉자들과 얘기하는 것처럼 아무 얘기 안되겠지만.. 저런 질문들에 대답 한 번 해보세요.
물론 일본 제국의 항복 이후에도 국민당군이 우위였던 건 사실이지만 중일전쟁 이전과 비교하면 일본 제국과 피터지게 싸워 승리를 얻어낸 국민당과 달리 세력 확장에 올인한 공산군과의 간격은 많이 좁혀진 상태였습니다. 일본의 대륙타통작전으로 국민당군 정예사단들이 갈려나갔던것도 컸구요
마오쩌둥은 국공합작에서 합의한 대로 국민당에 복종하는 대신 중일 양국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곳곳에 해방구를 확보하며 급격히 세를 불렸습니다. 본래 국민당은 공산군을 제8로군으로 편입시키면서 담당 구역을 지정해 주었으나, 공산당은 이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역을 확장하였고, 심지어 이미 활동중인 국민당 유격대를 공격하여 해방구를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마오쩌둥은 일본군과 싸웠던 백단대전이 공산당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며 비판하였고, 이런 기조에 반발하여 항일을 촉구하는 당내 반대파들을 우경 영합주의자로 몰아 대거 숙청하였습니다.
이제 공산군이 마오쩌둥의 명령도 무시하고 항일전쟁에 집중했지만 국민당군이 겨우 1.3배 늘어날때 공산군 군세는 25배 이상 불렸다는 님 주장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맥락으로 퉁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황당하네요
팔로군을 미화하시려고 마오쩌둥 따위 쩌리 취급하시는군요 황당하기 짝이 없네요
참고로 중일전쟁기간중에 전사한 국민당군 장성은 200여명에 달하지만(일본군과 싸운 난징방어전에서만 19명이 전사 자결) 전사한 공산군측 장성은 고작 두명 인데 그중 한명은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참 국공내전당시 중공은 소련 스탈린의 협조로 만주의 일본군 무기들을 대량으로 공여받아 무장을 몇 배로 강화했습니다.중공 소련 사이가 틀어진건 스탈린 사후 흐루시쵸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난 후에요
"1937년 7월, 일본은 중국과 전면전을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중공 고위간부들에게 항일 정책에 관한 긴급보고 하였다. 마오는 보고에서 '우리가 항일을 많이 해야 애국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장개석 국민당 정부를 돕는 일일 뿐이다. 중공의 조국도 전 세계 공산당인들의 조국인 소련이다. 우리의 방침은 일본으로 하여금 더 많은 영토를 점령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장, 일, 우리(蔣,日,我) 삼자가 삼국지와 같은 형국으로 끌고 갈 수 있다. 이러한 구도가 우리에게 유리하다......우리 당의 무장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우리는 '一分抗日, 二分應付, 七分發展(항일이 1푼이면, 정부와 마찰 2푼, 내부 확장은 7푼으로 비중을 두라-721정책)'를 고수해야 한다. 그 누구도 나의 방침을 위반해서는 안된다." -코민테른 중공연안 대표 겸 타스통신사 특파원이었던 피터 브라지미노프의 '연안일기'-
국민당 장군(將軍)의 전사자는 206명에 달하였으나, 공산당 장군 전사자는 2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중 풍설봉(彭雪枫) 장군은 국민당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대만국방부가 펴낸 항일전쟁사-
마오쩌둥의 표현에 따르면 4만명에 불과한 중공군은 8년 항전기간 721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7할의 힘으로 확장한 결과, 군대를 120만명으로 확충하고 1억 인구를 가진 근거지를 소유했습니다 이는 이후 국공내전 승리의 밑거름이 되구요
공산군 4만명 가지고 항일 해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고 공산당의 최종승리를 위해서는 결국 마오쩌둥의 안목이 옳았다고 봐야죠
가족간에 재산 싸움이 나서 소송이 있었고, 결국 장남 소유가 되었답니다.
나라에 충성하면 최하급 보호 받으면서 살고?
끼리끼리죠...
핑크당이 전대갈 살인마 추앙하듯이...
안타깝네요 그냥 청렴하셔서
백선엽과 다까키 그리고 백선엽 동생의 일화가 있네요 ㅋ
백선엽 다까키 일본 앞잡이 군인
백선엽 동생 6.25 때 민간인 학살
나치 부역자들 모조리 참수해서 꼬인 역사를 풀어냈죠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치 부역 사실이 밝혀지면 처벌할 정도니...
분위기로 봐선 정말 갈 길이 멀구나... 하고 한숨만 나오네요...!!
이 정부가 친일 부역자들 정말 부끄러워서 입도 뻥긋 못하게 숨어 살거나 지탄의 꼬리표들 달아서
다 때려 잡고 국민들 의식 개몽도 공익광고 하듯이 하고 해서 정말 친일매국 잔당들 목소리 없어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정하고 부적절한 돈에 의해 자행되어지는 끝없는 사회문제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검찰보다 강하고도 강도 높은 조세개혁이 시급하다 봅니다.
당대에 재산이 없으면 최대 10대까지 내려가서 다 환수 시켜라
제게 더 충격적인 내용은 동생인 백인엽에 관련한 내용이 었습니다.
1994년 단군이래 최대 사학비리라는 인천대가 동생 백인엽이 세운 학교고, 무수한 부정 편입학과 졸업장 거래로 정부가 관선이사를 내려 보냈는데 그게 형인 백선엽이고, 이후 인천대는 국립대가 되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