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부산에서 재현한 조선통신사 축제)
고대 중국의 후한서 등의 기록에서부터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행문, 심지어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 등 한국 내부의 지리지 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모여 노는 걸 좋아한다, 시도때도 없이 술을 마시고 모여서 춤을 춘다, 곳곳에서 축제가 열린다, 노는 사람이 많다, 한국 제사는 사실상 마을 축제와 같다 같은 내용 천지입니다. 일부 기록은 일제가 조선은 너무 노는 걸 좋아해서 미개하다 이런 식으로 왜곡도 있지만, 그건 끼워맞추기로 당시 한국인들은 새벽에 께어나 할 일을 다 하고 노는 걸 왜곡한 거였죠.
그 외에도 탈춤과 유랑극단, 광대 등이 많았다는 점 역시 그들이 축제 등에 불려간 일이 많아서기도 합니다. 이런 축제 말고도 제사와 여러 의식들도 축제나 잔치와 비슷한 모습을 띕니다.
그래서 마을 역사가 오래된 경우 그 마을 전통의 축제가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게 보존되었으면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보여주는 즐김의 장이자 외국 관광객들도 찾아올 정도로 큰 축제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게 없어졌나고요?
먼저 일본이 저런 걸 미개함, 게으름, 나태함으로 몰아세우며 없애려 했고, 그나마 남은 작은 축제들은 박정희가 없애버렸죠.
이런 축제나 잔치는 경제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았고, 저런 축제가 단번에 민주화 운동이나 반정부 시위로 돌변하는 걸 많이 봐서 특히 없애려고 했고요.
그래서 박정희는 일 하면서 근로의욕을 고취할 수 있는 작은 마을잔치나, 풍어제나 기우제 등의 제사,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관제 행사만 남겨버렸죠.
전통 축제가 씨가 말라버린 건 일본과 박정희의 작품인 겁니다.
추천글 보고 적어봅니다.
전통주도 많이 사라졌대요..... 비나 더 와라.
걍 비나 더 와라 !!!
그러면서 일본 사케 칭찬하는 사람들 보면 참 씁쓸하죠..
각카는 스빡스리갈을 좋아했죠.
연예인 대학생 옆에 끼고..
부관참시 하고 싶은 욕구가
특히 6.25이후 50~60년대에는 축제를 할 여유가 없을때고 70년대 박정희 정권중후반에 탄압되면서 일제시대부터 보면 2세대이상 약 3세대가 제대로 열린적이 없으니 사라질만 하죠
박정희가 주범으로 봐야죠, 그리고 다까끼마사오의 모국!
임진왜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셋다 겪은 사람도 있을법하게 100년 안에 다 일어남) 때도 명맥을 유지했는데요 뭐...
네 핵심입니다
역사를 대충 훑고 겉모습만 보는 이들이 주로 곧잘 우리 깎아내리고 일본을 동경하곤 합니다
근원을 알게 되면 같은 마음도 의례 표현을 다르게 하게 되지요
게임한다고 하면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노는걸.. 터부시하는 분위기는 있었다고
옆에서 삼촌이 말씀하시네요.
열심히 부지런함이 가장 큰 미덕이었다고..
해외여행 자유화되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렸었죠..
라니..
일본과 일본인의 작품이군요.
조국 일본의 뜻을 이어받은거군요...
진주 유등축제, 강릉단오제, 공주 부여의 백제문화제 이런식의 축제나 서울 종묘대제, 당진 기지시줄다리기 등등 문화재 관련이라던가, KCDF 공예주간, 지역 문화재단에서 하는 행사라던가... 재밌는거 많으니 잘 찾아다녔으면 좋겠습니다 ~
많이 어울려주고, 잘 놀다보면 또 다른 전통 축제가 만들어지는게 아닐까 합니다.
어느 문명이든 술을 맛과 향으로 즐기고 그 문명수준의 걸맞은 술을 아직까지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지만,
문화대국 한국에서는 소주조차 전통조주법이 끊겼고,
아직도 주정에 물 탄 걸 술이랍시고 마시며 술은 (맛없고) 쓰지만 인생의 쓴맛으로 먹는 거야, 혹은 취하기 위해 먹는 거라는 황당하고 상스러운 주류 문화를 갖게 만들었죠.
전통신들의 존재가 잊혀진 것도 많이 아쉬워요
한국전쟁은 현대식 전쟁이라 쑥대박 된거지만 규모나 시기면에선 위에 전쟁이 더 큽니디
99% 한국전쟁때 큰 단절이 있어서 없어진거라기보다는 지속적인 금주령 및 주조회사 독점과 전통주 말살 정책이 이뤄낸거죠.
지방마다 예전에 밀주라고 해서 다 술 빚어 만들어 팔고 사먹었습니다.
한국전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던 시기(임진왜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 3단콤보)때도 살아남은 축제가 6.25로 끝장났을거라 생각합니까?
조상 대대로 한마을에 살던 사람이 서로를 죽인 비극에, 마을은 온갖 외지인이 다 뒤섞이고, 정치 혼란기에, 먹고 살기 까지 힘들고 하던 와중에 축제할 겨를이 있었겠어요?
호란 경신대기근까지 연달다 겪었습니다.
왜란으로 남부지방
호란으로 북부지방
대기근으로 전국토 초토화를 겪는데 80년이 안걸렸어요.
심하면 셋다 겪은 세대가 있을 가능성이 클정도에요.
게다가 경신대기근때는 냉해 가뭄 홍수 태풍 병충해 구제엳 질병이 한번에 몰아쳤습니다. 양반가에서 조차 아사자가 속출했어요. 관리들조차 사망자가 다수 나왔습니다. 625 난리는 이거에 비하면 애들 장난입니다.
경신대기근 당시 사망자가 150만(아사자만. 질병은 40만정도 추가...)까지도 보는데, 이는 조선인구(1200만에서 1400만)의 10퍼센트정도입니다. 현재로 치면 만 2년이 안되는 시간에 500만이 넘게 죽는거에요.
625 사상자가 160만정도인데, 부상자 포함임을 감안하면 단순 사망자만 100만이 넘었던 경신대기근만 해도 엄청난 사건입니다. 인구는 2배인데 사망자는 비슷하니까요. 여기에 두번의 전란까지 합하면...
이 글에 저 의견이 뒷 받침 될만한 그 어떠한 근거나 증거가 없음에 불구하고 박정희랑 일본 까는 글 이니깐 얼씨구나 댓글 다시네요.
본인편이 당할 때는 근거나 증거을 원하지만 내가 공격 할 때는 뇌피셜로 충분하죠.
전쟁 한방으로 문화가 다 죽어버릴 거 같았으면 한국은 수십번도 넘게 문화가 사라졌을 겁니다. 한국전쟁도 비극이었지만 한국전쟁보다 더 오래 전 국토를 초토화시킨 전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전쟁은 한 요인일 뿐, 거기에 누군가가 힘을 써야 문화가 사라지거나 바뀝니다. 문화란 게 그렇게 약한 게 아니에요.
https://archive.vn/Dqy9l
우리 다카기 마사오님, 대닛폰제국을 까면 불편합니다.
특색있고 괜찮다 싶으면 서울시에서 베껴서 따라서 축제를 해버리니 지방축제가 죽어버리죠.
우리 민족이 참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전통축제를 할 만한 지방에 사람이 별로 없고 딱히 큰 볼거리가 되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 참가하는 사람/관광객이 거의 없고
그러다 보니 규모를 크게 하기 부담스럽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볼거리가 없어지고
그러다 보니 더더욱 돈이 안되고..
전통축제는 아니지만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저마다 무슨축제 무슨축제 하면서 종류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다만 가보면 다시는 안온다 수준의 질 떨어지는게 대부분이구요.
그나마 제대로 자리 잡은게 화천 산천어축제, 진해군항제 등등
돈 되면 다 합니다. 돈이 안되서 안하지
현대인한테 재미있을진 의문이군요
사람들이 모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겠죠.
http://www.law.go.kr/%EB%B2%95%EB%A0%B9/%EA%B1%B4%EC%A0%84%EA%B0%80%EC%A0%95%EC%9D%98%EB%A1%80%EC%A4%80%EC%B9%99/(29950,20190702)
이게 만들어지면서 각 지방마다 특색있는 관혼상제와 그것과 엮이는 각종 풍속이 획일화되었어요. 왜냐하면 저걸 강제했기 때문이죠.
장례식만 해도 어떤 지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엄숙한 분위기기도 했고, 어디는 마을 잔치급이었죠. 그런 걸 없애버린 거에요.
일명 양반출신이라 족보에 입적때문에 본가에 가서 배운 가례와 일반적으로 법적으로 등록된 건전가정의례준칙과 비교 하면 많은 부분이 다릅니다.
특히 진설법에 홍동백서나 조율시이 같은것도 많이다르고 음식을 놓는 가지수와 형식 모두 집안마다 다릅니다.
이걸 일괄적으로 어떻게 해야한다가 @남삼정님 이 올려주신 링크의 건전가정의례준칙입니다.
이게 박정희때 만들어졌고 해당 기준이 도시를 기점으로 획일화 되는 계기가 되었죠
예전에는 더 크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현재에는 기준이 박정희때 만들어진 건전가정의례준칙이라는겁니다.
계속 같은말을 되풀이하는것 같아서 . 약간 요약한다면.
@zamdoli님 이 계셨던 시골과 같은곳(씨족이나 대가족이 있었던경우)에서는 국가에서 준칙을 정해도 사실 무시당했습니다.
술도 밀주로 남아 판매가 되고 있었고 시골 큰 잔치도 남아있었습니다만.
서울로 이주 및 대가족화의 붕괴로 제사자체가 줄어들고 . 술도 꾸준한 단속 및 수요 감소로 없어지고.
마찬가지로 인구의 유출 및 독재 시절 국가에서 집회 및 관제행사 이외의 대규모 행사 금지로 인해서 없어졌습니다.
그뒤로 제사의 규모가 줄어들었나 위의 준칙이 걸려서 그게 일반적인 제사가 되어버리고 현재남아있는 제사는 대부분 박정희시대의 준칙에 머무르게 되었죠
댓글에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으면 그부분에 대한 설명을 말씀해주시면 좋겠네요
왜구들 말살정책에 전통문화 많이 사라지고
토왜들이 막타쳤죠.
고려장같이 왜구들 문화를 한국문화로 조작한 사례도 많고요. 토왜들이 이걸 또 교과서 통해 전파하고 교육근간이 일본스타일로 바뀌었죠.
http://www.law.go.kr/%EB%B2%95%EB%A0%B9/%EA%B1%B4%EC%A0%84%EA%B0%80%EC%A0%95%EC%9D%98%EB%A1%80%EC%A4%80%EC%B9%99/
이게 만들어지면서 각 지방마다 특색있는 관혼상제와 그것과 엮이는 각종 풍속이 획일화되었어요. 왜냐하면 저걸 강제했기 때문이죠.
장례식만 해도 어떤 지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엄숙한 분위기기도 했고, 어디는 마을 잔치급이었죠. 그런 걸 없애버린 거에요.
그 외에도 새마을운동을 보면 낡은 폐습, 미신을 없앤답시고 무속색을 띄는 전통 축제가 갈려나갔어요.
이것들만 없었어도....
우리나라 지방에 축제 지금도 하긴 하는데, 솔직히 지역 주민마저도 관심도와 참여도가 별로 없다는게 크지 않나 싶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축제한다고 하면 지역 상인들 뿐만 아니라 학생들까지 출점도 하고, 몇달전부터 모여서 공연 연습도 하고 준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축제하면 전국 돌아다니는, 해당 지역이랑 별 상관 없는 상인 위주고, 행사 준비나 참여도 하는 사람만 하는게 현실이지 않나 싶네요.
할거면 확실히 하고, 안할거면 안하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우리나라의 '축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럴싸한 축제는 매우 적었을 거라는 거죠.
강력한 중앙정부가 오랜 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하거나 지시에 의해서 이행되는 형식적인 축제는 거의 없었을 거에요.
그냥 같이 놀고 먹고 마시고 또는 지주가 주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놀이패를 부르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마을끼리 돌팔매질하는 석전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그런 것에 아주 적합한 단어가 '잔치'죠.
우리가 알고 있는 공연성의 놀이패들은 대부분 근대에 와서야 확립됐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농악 또는 풍물놀이는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치면 백중놀이 같은 것은 도시화 때문에 줄어든 것이 맞고 두레굿 역시 마을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자연스레 줄어든 거죠.
조선통신사 축제는
올해는 코로나 떄문에 연기가 되었다고..
부산 조선통신사축제 2020 (부산문화재단)
기간: 2020.10.24 ~ 2020.10.25
위치: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길 35-26
장소: 용두산공원, 광복로 일원, 조선통신사역사관 등
연락처: +82-51-744-7707
홈페이지: http://www.tongsinsa.com
일본에서도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하는 축제가
매년 이즈하라, 쓰시마에서 열렸다고 하네요.
출처: 일본정부관광국
https://www.welcometojapan.or.kr/board/tong/
625를 그냥 일개 전쟁으로 생각 하시는분이 많이 보이는데, 한국의 뿌리깊은 신분제를 뿌리채 뽑아버린게 625 전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