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영방송사 Arte에서 아주 훌륭한 다큐를 한 편 제작했습니다. 제목은 "은이 만든 세계(Comment le métal blanc a façonné le monde)"입니다. 또 다른 제목으로는 은의 제국, 중국인데(La Chine: Empire d'Argent), 은이라는 광물이 중국 역사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수행했는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총 3부작으로 각각 무려 1시간씩인데, 인터뷰에 참여한 인물들을 보니 아주 쟁쟁하더군요.
중국사 관련해서 이미 저서 몇권을 확보한 인물들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Robert Bickers 는 중국 근현대사 전문가로 "중국분할 1832-1914: 청제국을 무너뜨린 악귀들(The Scramble for China: Foreign Devils in the Qing Empire, 1832-1914)", "중국에서 꺼져라: 서구지배의 종식(Out of China: How the Chinese Ended the Era of Western Domination)", 그리고 "중국으로: 존 스와이어가 만든 제국(China Bound: John Swire and its World)" 등의 저서를 쓴 학자입니다. 아쉽게도 그가 저술한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는데, 국내 번역업계는 정말 각성해야 합니다.
아무튼 그가 관심있어하는 주제는 아편전쟁, 서양세력의 중국침투, 그리고 서양열강에 대한 중국의 대응, 그리고 서양인들이 만든 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 등입니다. 특히 아편전쟁 무렵 큰 돈을 벌게 된 존 스와이어의 경우 지금도 홍콩에서 위세를 자랑하고 있는 재벌그룹으로, 홍콩의 여러 부동산과 회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Rana Mitter 또한 본 다큐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 영국 캠브릿지 출신의 중국 근현대사 전문가로 그의 저서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2020년 "중일전쟁: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국민당 중심으로 중일전쟁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Xu Jin 은 사실 처음 알게 된 인물인데, 그는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FT) 중국지부 선임편집장이더군요. 상하이대, 푸단대를 나와 도쿄대에서도 강의한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중국에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데, 최신작이 2018년에 출판한 "백은제국"이라는 책인데, 은을 중심으로 한 중국역사, 송나라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예일대학교 출판사에서 번역작업을 맡고 있다고 하는데, 어서 영어판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아무튼 본 다큐멘터리는 명나라가 왜 은을 기본통화로 사용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과 스페인의 광산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보여줍니다. 남미의 포토시 광산에서 노예노동력으로 캐낸 은은 곧장 필리핀을 통해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중국은 스페인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은으로 경제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제국의 몰락으로 은의 공급이 위축되자 명나라의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 반란과 외침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중국 청나라에서도 은은 요긴하게 쓰였는데, 은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광동을 무역항으로 만들어 다수 서양세력과 거래하면서 은을 확보했습니다. 중국에 온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영국인들이 은을 지불하고 차와 비단 그리고 도자기를 수입해갔는데, 이는 서양인들과 중국 모두에게 윈윈이었습니다. 그리고 본 다큐는 그 과정에서 중국의 문화 특히 도자기 등이 유럽의 왕실에 얼마나 큰 인기였는지 보여줍니다. 저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는 별궁에 중국사원을 모방한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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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대제가 지은 중국식 건물
하지만 결국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물건이 너무 많고,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리자 영국은 특히 불만이 컸습니다. 그 결과 무역수지를 조정하기 위해 1793년 매카트니 경을 중국에 파견했으나, 협상은 파국으로 끝나고 그는 빈손으로 영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30년 후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죠.
다큐에서 다루는 아편전쟁 내용은 저희가 대부분 알고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대신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중국과 서양이 얼마나 서로 가까이 연결되어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당대 중국, 아니 세계 최고 부호 오병감을 보여주며 그가 미국의 델라노 가문과 포브스 가문 등과 얼마나 긴밀히 엮여있었는지 보여줍니다. 특히 델라노 가문은 훗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를 배출했고, 포브스는 미국 철도산업의 기반을 마련한 가문입니다. 이 두 가문은 중국에서 큰 돈을 벌었고, 이들이 돈을 버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오병감이었습니다. 그래서 델라노 가문의 별장에 오병감의 초상화가 남아있더군요.

중국 최고 부호 오병감, 델라노 가문 소장
또한 아편전쟁 이후 영국세력은 중국에서 점점 세력을 늘려갔고, 특히 청일전쟁을 계기로 홍콩과 상하이에 기반을 둔 영국은행 HSBC가 폭발적인 성장을 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중국이 일본에 지불한 전쟁배상금은 모두 HSBC를 통해서 이루어졌거든요. 아울러 중국이 근대화의 일환으로 설립한 "근대적 세관"은 총책임자가 영국인이었고, 직원들도 서양인이 다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하이가 어떻게 중국과 더 넓은 근대세계 간의 창구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한편, 동시에 중국의 일반인들이 받았던 고통도 균형감 있게 보여줍니다.
또 세계경제공황 당시 중국이 의외로 은본위제를 택한 덕분에 나름대로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조명하면서, 그 중심에 있었던 뛰어난 중국인 관료 한 명을 조명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1935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은구입법을 시행하자 중국에서 은 유출이 심각해지면서 결국 국민당 정부는 큰 위기를 맞이 하게되는데, 마치 명나라와 청나라의 운명을 반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마 Xu Jin이 저술한 "백은제국"이라는 책이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내용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어서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나저나 프랑스에서 이런 다큐를 기획하고 제작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사실 Arte 채널이 아주 양질의 다큐를 여럿 제작해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 서양역사는 물론 자기네 역사니까 꽤나 수준있는 퀄리티를 자랑하는데, 동양사 분야에 대해서도 여러 다큐를 제작하고 있네요. 최근에는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 다큐를 제작하기도 했고, 또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둘러싼 가톨릭, 정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간의 갈등에 대한 다큐도 제작했는데, 모두 꽤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저 다큐를 제작한 사람들이 현대에 와서 그 역사(아편전쟁 같은..)가 다시 한 번 반복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세계의 공장이었던 중국이 성장해서 미국과 트러블을 빚는 상황이 과거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내용은 같은데 제목만 바꾸셨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주에 2탄 한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