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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공원

그간 조선소 근무의 소회 (feat. 내가 이직하는 이유) 18

34
2020-04-15 11:04:15 58.♡.55.191
훼브릿즈

어제 이직면접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뭐 처우협의 정도 남아있는데 아예 다른 업종이고

이전부터 붙으면 무조건 옮기겠다는 결심이 서있던 만큼

현직장은 되도록 2주? 안으로는 사표 쓰고 그만두게 될 듯 합니다.


어제는 연락을 받고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아 밖에 나가 하염없이 걷기만 했는데

오늘은 지금까지 저의 생각을 어딘가에 기록을 하고 싶었습니다.

(투표는 사전투표 완료했고, 진지는 오레오 오즈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소회와 제가 이직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관련 업계 계신 분들은 다 아는 얘기일 수도 있고,

어느 정도 제 뇌피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 국내 3대 조선소 중 한 곳에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 내려올 때 남들은 지방간다 오지간다 어쩌고 불평할 때

저는 그 누구보다 오래 이곳에서 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죠.


제가 처음 들어갈 때는 업 자체가 무척이나 흥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한국이 품질, 납기, 선가에 우위를 갖고 안정적인 독주체제에 들어섰고,

해양은 유가가 백불이 넘나들며 아무리 깊고 고비용의 심해유전이라도

뽑아다 팔기만 하면 이득이니 선주사고 오일메이저고 너도나도 돈들고 와서 

제발 빨리 만들어달라고 아우성이었죠.


조선소는 기본적으로 상선류(컨테이너, 유조선 등)으로 기본 일감을 채우고

이른바 고부가가치인 LNG, 드릴쉽으로 막대한 이익을 내는 구조였습니다.

해양은 수주금액 단위는 매우 크지만 리스크가 커서 적자내는 일도 빈번했고

PC로 수주하면 돈을 남기고,

EPC면 간신히 똔똔으로 맞추고 Change Order로 흑자내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다 첫번째 위기가 10년도 초반에 옵니다.

중국굴기로 일어난 중국 조선소가 일반 상선에서 저가로 치고 들어온 것이죠.

품질과 납기가 매우 떨어지지만 선가가 매우 매력적이라

선사들이 단점을 감수하고 배를 맡기기 시작했고,

중국애들도 몇년 만들어보니 상선에서는 한국 조선소와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왔음은 물론

나중에는 LNG선까지 엇비슷하게 만들어내는 수준까지 올라옵니다.

최근 국내 조선소들은 상선 수주경쟁력은 거의 상실한 상태라 보면 됩니다.


이 때 한국조선소는 해양산업을 돌파구로 삼습니다.

일단 프로젝트당 돈 단위가 수조원에 달해 몇개만 수주해도 그 해 수주목표는 쉽게 달성되고

국내조선소가 그동안 기술력이 충분치 않아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간신히 돈 남기는 수준이었는데

그나마 이 정도도 세계에서 제일 잘 하는 수준이므로, 우리보다 더 잘할 곳은 없다.

본격적으로 올인해서 기술력 쌓아 조선에서처럼 해양에서 절대우위를 점하자는 생각이었고

이때부터 해양분야에서 공격적인 수주를 시작합니다.

근데 발주처도 바보가 아니니 조선 일감 떨어지는 국내조선소의 상황과

국내조선소들끼리 과도한 수주경쟁까지 하는 약간의 병크가 합쳐져

협상의 우위를  점해 발주처에 유리한 EPC나 헤비테일 방식으로 계약을 해줍니다.


이 때 계약한 초대형 공사들이 2~3년이 지나 납기때가 되니 결국 문제를 일으켜

연 조단위 이익을 내던 조선사들이 적자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조단위로 말이죠.

애초에 우리에 앞서 거의 백여년 이 바닥에서 사업해 온 유럽 유수의 엔지니어링 사를

겨우 제작만하는 한국 조선소가 컨트롤 해가며 그들의 잘못을 우리가 책임까지 져야하는 계약이 말이 안됐죠.


설상가상으로 셰일이 어쩌고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유가는 서서히 떨어져 40~50불 수준까지 떨어져버리니

발주처도 뜨내기는 다 떠나고 진짜 경쟁력 있는 오일메이져 몇 군데만

이익을 낼 수 있는 유가수준이라 공사수도 적어지고 이익내기도 더욱 박해지는 상황이 됐습니다.


예전처럼 노다지는 아니고 그냥 현상유지만 하겠구나 싶던 찰나에

해양사업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경쟁자가 나타납니다.


싱가포르 셈코프마린인데요.

중국조선소는 조선은 따라왔을지 몰라도 해양은 아직은 절대 안된다 생각했는데,

이 싱가포르 조선소들은 이미 기존에 일부해양품목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던 곳이고

이번에 사업영역을 넓힌 격이라 못할 거 없다는 마인드였죠.

근데 너무나 막강한 게 선가에서 한국조선소가 도저히 경쟁할 수준이 안되더란 겁니다.

원래 조선소가 그간 국내에서도 고임금으로 소문난 곳이었는데

그 쪽은 현장노동자를 주변 동남아에서 싼값에 조달해와서

인건비가 한국의 절반 수준이라는 얘기까지 돌았습니다.

물론 싱가폴도 자국인 임금이 낮은 곳은 아니나

오히려 영어를 잘 써 발주처 대응이 잘되고 도시국가라 생활이 편해 발주처가 선호하는 요인이 됐죠.

국내 조선소 입찰가에 15~20%를 후려쳐버리니

그토록 보수적인 해양산업계에서도 가뜩이나 저유가로 발주처도 힘든만큼

속는셈치고 맡겨본다고 일을 주면서 기대했던 대형공사들을 뺏기는 상황까지 갑니다.


이제는 저유가로 서서히 낮춰가던 선가가 손해를 보지 않으면 수주자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한 경영진은 급한맘에 한동안 저가에 수주를 하고 

원가절감해서 돈을 남겨보자는 병크짓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거는 현재진행중이고요,

그리고 해양은 이제 노답이다 다시 조선으로 가자 했는데

그간 해양에 올인하면서 기존에 잘하던 조선조직도 망가져서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고 기사회생을 한게

중국에서 만든 LNG 선이 운용 1년만에 폐선을 하는 기념비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또 대형공사를 가져간 싱가폴 조선소가 기대보다 너무 공사를 소화하지 못하자

이게 싸다가 막 넘길게 아니구나 하고 한국조선소가 재조명받기 시작해 수주를 받기 시작하고

또 그때쯤 카타르 LNG선 150척 신규발주 얘기가 나오면서 군불을 지피기 시작해서

이 물량만 나오면 한동안 물량걱정 없다고 희망고문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실제 최근 1~2년 LNG선을 국내조선소가 싹쓸어오다시피 했고,

해양도 적자수주지만 일단 일감은 있는만큼 열심히 해서 돈 남겨보자 하고 으쌰으쌰 하는 찰나

이번 코로나, 유가폭락이 한번에 터져버린거죠.

제가 느끼기엔 이번 건은 진짜 시한부 선고 같았어요.

회사 상태 생각하면 샤워하다가, 밤에 자다가도 불안한 미래로 가슴에 답답함이 밀려올 정도였으니까요.


이번 코로나 사태는 세계 물동량 감소로 상선 발주물량 감소를 의미합니다.

단기적으로 코로나 자체로 인한 경제불황으로 소비가 줄면서 물건을 실어나르기 위한 배 수요가 적어지겠죠.

장기적으로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각국이 여러 생존에 필요한 필수물자까지 부족을 경험하게 되었고

"전세계는 하나, 전세계의 공장 중국"이 아니라 어느정도는 국내에서 제조업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껴

견고했던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의 붕괴와 해체가 나타날 것이고 이로 인한 장기적 물동량 감소가 예상됩니다.


해양은 더 심각합니다.

교과서에서 듣던 100년 남았니 150년 남았니 소리는 개나줘버려가 되버렸죠.

셰일혁명으로 인해 이미 나락으로 떨어지던 오일산업계였는데

땅바닥에서 퍼올리는 기름값이 10불에 팔리는 걸 보고 누가 심해개발하려고 할까요.

뭐 잘 협의하고 감산하면 다시 예전 금액 회복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생각할 수 있는데

앞으로도 서너개 남짓 나라가 서로 수틀리면 언제든 같은 상황 반복될 거라는 거 이제 다들 알고 있죠.

큰 해양광구 하나 개발하려면 시추해서 뽑아올리고 운반에 정제까지 

수조원에서 수십조가 투자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입니다.

이러한 프로젝트가 진행되려면 장기간 수익권이 보장되는 선에서 

유가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망이 있어야만 하겠죠.

이러한 유가의 큰 변동성이 해양산업의 근간을 흔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저를 더 진절머리 나게 만든 건 위의 일련의 사태를 10여년 간 겪어오면서

임직원들이 패배의식에 싸여있고, 아무런 의욕도 없는 사람들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점심에 부서원들 회의실에 모여서 대놓고 공기업 시험 스터디 하는 광경이 이해가 되십니까.

실제 준비를 하든 안하든 회사 그만둬야지 뭐하러 열심히 하냐 이런 마인드 뿐이고,

회사가 부실하니 관리자의 조직장악력도 떨어져서

어차피 일도 없는데 잘됐다 대충 근무시간이나 떼우자는 행태도 팽배해져

업무집중도도 예전에 비해 상당히 떨어져 있습니다.

어디 공기업 같은데 붙어서 퇴사하는 사람은 부러움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나가죠.

망해가는 회사를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그간 빨리 탈출해야 된다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저는 이제 앞으로 아예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원망의 마음은 없습니다.

그간 나와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있고,

또 조선소가 무너지는 국가적으로도 문제인만큼 다시금 일어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앞으로 저와 조선소 모두가 같이 흥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훼브릿즈 님의 게시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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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
Hue-Man
IP 121.♡.199.248
04-15 2020-04-15 11:06:27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에드워드웅
IP 211.♡.150.238
04-15 2020-04-15 11:13:17
·
ㅎ저랑 같은 회사였던거 같은데 저도 시추선쪽에서 십년 넘게 있던터라 저는 나왔어요 2년전에.. 상황을 보시는 안목이 굉장히 높으시네요. 저랑 비슷한 시기에 다니신거 같은데.. 아무튼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머리에꽃을
IP 124.♡.159.183
04-15 2020-04-15 11:13:37 / 수정일: 2020-04-15 11:13:50
·
한편으로는 전세계가 다 힘든터라 이번 고비를 잘 넘기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도 힘들지만 중국, 일본, 싱가폴 등도 힘든건 매한가지일테니..
삭제 되었습니다.
쟈나저씨
IP 118.♡.254.43
04-15 2020-04-15 11:13:44
·
마음 한켠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글이네요. 힘내세요.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시지 않을까도 점쳐 봅니다.
대갈-
IP 39.♡.115.122
04-15 2020-04-15 11:14:42
·
디테일한 상황 묘사 감사합니다.
그 업계를 현장에서 본 것처럼 느꼈네요.
아주 오래전에 저도 연봉만 보고 조선업계에 발 들일 뻔 하였는데, 안정성을 택했죠.
옮기시는 곳에서도 원하시는 바 이루시길 바랍니다.
인생은정말아름다워
IP 121.♡.135.188
04-15 2020-04-15 11:14:47
·
잘 읽었습니다.
/Vollago
showtime1
IP 121.♡.60.22
04-15 2020-04-15 11:15:17
·
잘 읽었습니다.
룰러헛다
IP 8.♡.149.117
04-15 2020-04-15 11:17:09
·
수고하셨습니다

아... 셰일이 여럿 죽이네요.

앞으로 신재생이 급속히 치고올라가니

원 투 펀치에 3쿠션까지.... ㅜㅡ
meteoros
IP 175.♡.11.180
04-15 2020-04-15 11:17:23
·
조선에 대해서 단순히 요새 잘 나간다는 것만 들었는데 속으로는 다른 사정이 있군요.
후.... 코로나 이후에 대해 진짜 단단히 준비해야 할 듯.
훼브릿즈
IP 58.♡.55.191
04-15 2020-04-15 11:29:46 / 수정일: 2020-04-15 12:26:32
·
@게으른카페님 계속 힘들지 위로만 받다가 최근 1~2년에는 조선 다시 살아난다며?
이런 얘기 참 많이 들었죠~
그냥 할많하않 이었습니다ㅎㅎ
삭제 되었습니다.
eoghks
IP 112.♡.207.90
04-15 2020-04-15 11:17:41
·
조선업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경제가 걱정됩니다. 우리 자식들은 뭘로 먹고 살아야할지.
그래도 이직하신건 축하드립니다.
훼브릿즈
IP 58.♡.55.191
04-15 2020-04-15 11:32:51
·
@eoghks님 사실 제조업에서 중국이란 경쟁자 등장으로 인한 위기는
모든 산업계에 다 해당된다고 생각하는데
조선업은 특히나 제일 먼저 더 직격으로 맞은 곳이라 생각됩니다.
반도체같이 엄청난 자본력과 기술력으로 진입장벽을 치고 있지 않는 이상
장기적으로 중국을 이길 산업군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 지경이네요 ㅠ
plywood1
IP 112.♡.133.160
04-15 2020-04-15 11:27:56
·
저와 다른 분야라 저녀 몰랐는데..
심각한가보네요... 건승하세요..!
bab1818
IP 175.♡.20.72
04-15 2020-04-15 11:32:18
·
같이일하는 과장님이 삼중에서 배관설계하다 이쪽으로 넘어왔는데 퇴사할때 분위기도 안좋고 개인건강까지 겹쳐서 마니 힘들었다 하더라고요. 다행히 잘안착하나 싶었는데 이회사도 막장오브막장이라 또 다른 분야로 이직준비중이네요... 일도 잘하고 사람도 좋고 참아쉽습니다 작년에는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라고 예전회사에서 복귀하라고 콜도 오고 그랫다는데 다시 다운이군요..
영송이
IP 2.♡.134.77
04-15 2020-04-15 12:12:17
·
좋은글 감사합니다.
출사
IP 114.♡.102.2
04-15 2020-04-15 12:17:44
·
선박 관련 업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조선 상황을 가감없이 보여주네요.
새로운 출발에 건승을 기원합니다.
크아옹
IP 117.♡.26.115
04-15 2020-04-15 14:41:40
·
dsme세요? 저도 한동안 조선쪽에 몸담았는대 남일같지 않군요 ..
삭제 되었습니다.
참치Jr.
IP 211.♡.150.78
04-21 2020-04-21 07:54:07
·
안목이 높으시네요
전 2017년도에 탈출했네요 ㅠ
아는 동료는 2015년쯤에 해양은 비젼이 없다고 선언하고 퇴사
그 선언이 사실이 되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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