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egg79님 뭔 근거긴요 흥선대원군이 욕먹는 이유 중 하나가 무리한 경복궁 재건사업인데요.
경복궁이 검소하다고요? 조선 말기 그거 짓다가 경제 파탄났어요;;
나무가 모자라 남의 산소에서 나무 뽑아가고 강제노역 시키고 세금 올렸는데 조선이 바라보는 백성의 눈높이요? 백성을 얼마나 아랫것으로 생각했으면 저런 대궐을 증축했는지는 알겠네요.
일본이 파괴한게 잘못이라고 저렇게 무리해가면서 궁궐 확장한게 잘못이 아닌건 아니죠.
삭제 되었습니다.
등가려
IP 175.♡.74.7
06-19
2019-06-19 09:17:01
·
@님
처음엔 규모가 작었고 나중에 무리하게 규모를 키워서 결국 국력을 탕진했다 이러면 된건가요?
ddungddi
IP 211.♡.207.80
06-19
2019-06-19 09:21:00
·
@bigegg79님 자금성만 놓고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서울에는 경복궁만 있는게 아니죠. 서울시내 법궁인 경복궁외에 이궁인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등 여러 이궁을 합하면 면적이 더 넓고요, 궁의 담장 높이가 낮은 이유는 덜 권위적이라서가 아니라, 중국에 비해 목재구하기가 어려워 목조 건물도 크게 지을 수 없었고, 목재가 없으니 벽돌과 기와를 구울 수 있는 땔감도 구하기 힘들어서 크게 건설하기 힘들어서죠. 그렇다고 돌을 쪼아 만들자니 우리나라는 대부분 화강암이라 가공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박리지
IP 175.♡.171.163
06-19
2019-06-19 09:22:19
·
전세계에 검소한 궁전이 있나요?
세라공주
IP 211.♡.203.11
06-19
2019-06-19 09:25:02
·
@1N9님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토목 건설인 경복궁 재건이 문제이긴 한데, 국력 탕진의 원흉은 명성왕후와 그 민씨 일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애착
IP 121.♡.12.136
06-19
2019-06-19 09:27:14
·
bigegg79님// 백성의 눈높이라 오랜만에 웃고갑니다.
고서적
IP 125.♡.28.107
06-19
2019-06-19 09:55:45
·
ㅋㅋ 자금성에 비할바는 아니에요
자금성 관문 하나 지난 크기랑 비슷하려나..
삭제 되었습니다.
dolbuda
IP 223.♡.40.221
06-19
2019-06-19 11:10:51
·
중국 우리나라 궁 크기로 비교하여
좋은 나라 더 조은 나라.. 따지는건... 아니지 않나요??
그때야 뭐...
물론 그때를 그리워 하는 놈들도 있는 판이니..
afrernoon님 // ddungddi님 // 가재울님 // 애착님 //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 이야기 http://naver.me/Ftg9gZzY
...
서양의 건물들은 닫혀 있다. 두꺼운 벽과 문으로 튼튼히 보호되고 있으며, 내부 역시 방과 방으로 견고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나의 큰 건물 안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기거하며 활동한다. 그러나 동양의 건물, 특히 한국의 건물은 닫혀 있는 동시에 열려 있다. 개개 건물은 대체로 작고, 벽체도 얇으며, 종이만 바른 넓은 문(門), 그리고 호(戶)와 창(窓)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넓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밖에서, 또 밖의 기척을 안에서 감지할 수 있다. 궁궐의 주요 건물은 대개 가운데가 마루, 양옆이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
afrernoon님 // ddungddi님 // 가재울님 // 애착님 //
낮은 궁궐 담은 백성과 함께 하려는 조선의 정치철학이었다 http://naver.me/xLRixRhZ
...
일본의 높은 성벽과 해자도 통치자의 두려움에서 생겼는데 동양 삼국 중 조선의 정치 철학만이 백성이란 함께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학문과 정치가 지향하는 길에 백성이 있었으니 백성과 사이에 담벽을 높게 할 수도 없고 해자를 만들어 백성과 떨어질 수도 없었다.
이 낮은 궁궐 담으로 반정이 두 번이나 있었고 조선의 국모가 왜인들에게 시해 당하기도 하고 왕자들이 이복동생 세자를 죽이기도 했지만 해자가 없는 낮은 궁궐 담은 백성과 함께 하려는 조선의 정치철학이었다
...
afrernoon님 // ddungddi님 // 가재울님 // 애착님 //
덕분에 과거에 라디오로만 들었던 제대로 확인하게해줬네요..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한 왕조로 통치를 할수 있었던건 단순히 운이 아닙니다. 일본애들이 만든 쓰레기 같은 역사관이 아직도 우리세대에도 남아있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몽골제국, 로마와 같은 거대 제국을 만들었던 국가는 아니었지만, 백성을 중시하는 국가정치 경제 모두 그 당시 남 부럽지 않은 자부심을 가질수 있는 국가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조선시대 세종대왕때는 노비 남자들도 육아휴직 30일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좋아졌지만 몇년전 대한민국보다 훨씬 백성을 생각하는 국가였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조선왕조실록등의 기록유산은 인류역사상 찾기힘든 기록유산 입니다. 500년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 것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한것도 대단합니다.
보존이 가능했던것도 지금 DR센터같이 한곳에만 보관하지 않고 두군대도 아닌 4군대에 보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임진왜란때 3곳의 자료가 손실되었지만 한곳을 지켜내어 보존이 가능했던거지요. 단순히 DR 3개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통치의 기록을 소중히 했고 , 이것을 보존하는 수준이 너무 높았다고 전 생각합니다.
애착님.. 절 비웃는건 좋은데요. 우리나라의 자랑스런 역사는 비웃지 말아주세요.
tirpleA
IP 39.♡.46.77
06-18
2019-06-18 22:45:50
·
이거 생각나서라도 일본 여행은 못가겠어요...
후지와라분타
IP 59.♡.37.86
06-19
2019-06-19 09:21:24
·
하지만 매년 한국에서 일본을 가장 많이 방문하죠ㅜㅜ
애착
IP 121.♡.12.136
06-19
2019-06-19 09:28:52
·
tirpleA님// 일단 클리앙자체가 일본기기 사용자모임이죠
moxx
IP 223.♡.146.37
06-19
2019-06-19 09:51:28
·
@애착님 정확히는 클리앙의 시작이 그랬던거죠. 클리에가 더 이상 없어서 그런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죠.
월넛브레드
IP 175.♡.209.21
06-19
2019-06-19 13:41:48
·
@후지와라분타님
월넛브레드
IP 175.♡.209.21
06-19
2019-06-19 13:42:48
·
정말 생각없는 것들 많습니다.. 일본 여행가서 쓰는 돈이 아베가 만드는 미사일이 되어서 한국에 날아올 게 불보듯 뻔한데요
남양 급으로 멀리해야하는데 이런 인식이 잘 세워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Peregrine님 출처가 나무위키가 아니라, 나무위키는 단순히 아카이빙 해논 플랫폼인데요?
백성들이 불질른거에 대한 레퍼런스는 해당 문서 찾아가면 있으니 참고하시길.
참고로 저 자료의 사료는 선조실록인데, 선조실록의 신뢰성을 의심하는건 좀 수상하네요
거가(車駕)가 떠나려 하자 도성의 간민(姦民)이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훔쳤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공사 노비 문적이 있는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궁성의 창고를 약탈하고 방화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일시에 모두 없어졌다. - 선조 수정 실록 -
경복궁 재건은 1865년(고종 2)에 가서야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시작되어 1868년에 완성되었다. 경복궁은 270여 년 만에 정궁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이후 경복궁의 역사는 순탄치 못했다.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고,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겨간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경복궁의 수난은 그야말로 비극적이었다. 일제는 한국의 정신을 모욕하기 위해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훼손하였다. 일제는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어 민간에 팔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경복궁의 훼손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개최된 이른바 '시정(始政)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였다. 일제는 이 행사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는 경복궁을 가로막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광복 후에도 경복궁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 속에서 서울 시가전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얼마남지 않은 경복궁 전각 일부가 폭격에 사라지기도 했다. 광화문도 이때 폭격을 피해가지 못하고 뼈대만 남게 되었다. 1952년 휴전협상이 부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당시 부산에 있던 정부는 경복궁의 복원에 대해 국무회의에서 잠깐 논의했지만, 이를 진행할 재원이 없어 손놓고 기부만을 바라는 형국이었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전체가 홀라당 타버렸을 때 고종과 조정은 창덕궁으로 이어할지, 경운궁을 재건할지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경복궁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쯤되면 경복궁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거의 혐오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보인다.
\
한일 강제 병합 후에는 식민지의 사기를 꺾고 실용성도 따질 겸 일본 총독부의 만행으로 인해 가장 훼손된 정도가 큰 궁궐 가운데 하나[19]이기도 하다.[20] 일제는 우선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동쪽 담장을 안으로 밀어넣으면서[21] 약 4,000여 동의 건물을 없애 버렸고, 이후 경복궁 내부 중앙 축선에 근정전과 광화문을 가로막는 형태로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지은 뒤[22] 광화문을 다른 자리로 옮겨버리기까지 했다.
다른 선수를 안정환 플레이어라고 제목이 잘못된 글을 한참 방치해서 사람들 속이고
댓글로 잘못된거 알면서도 안바꾸다가 핫글로 가서도 수정하기는 커녕 그냥 삭제하신 분이
거짓 정보 운운 하시는거예요? 진짜 내로남불이시네요?
핫글에서 정말 안정환인줄 알고 플레이 다 보고 댓글보고 어이없어했던 1인입니다.
삭제 되었습니다.
수박주스
IP 211.♡.69.204
06-19
2019-06-19 08:02:26
·
@Amunezia님 에휴 왜 아직도 기웃거리세요 ㅉㅉ 낙인은 무슨..
soulzd
IP 223.♡.39.83
06-19
2019-06-19 08:03:49
·
@smr님 후 임진왜란이랑 일제강점기랑 시대구분좀 하고 뭔 백성이 불질러서 파괴되고 폐허 방치를 언급하냐 흥선대원군이 복원시켰는데 그정도 시대 구분도 못하냐???, 그리고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며 전각을 뜯어 경운궁 전각을 세웠다는걸 퍼왔는데 덕수궁(경운궁)이 경복궁을 저 사진처럼 다 밀어야 할 정도의 사이즈인지 좀 제발제발 기본적인 상식좀 생각하고 말하길, 친일토착왜구야
@까촌남님 거가(車駕)가 떠나려 하자 도성의 간민(姦民)이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훔쳤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공사 노비 문적이 있는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궁성의 창고를 약탈하고 방화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일시에 모두 없어졌다. - 선조 수정 실록 -
지들 = 조선 난민
abcchocolat
IP 222.♡.90.64
06-18
2019-06-18 23:16:58
·
moxx
IP 223.♡.146.37
06-18
2019-06-18 23:17:37
·
@smr님 그걸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다 복원했다니까 왜 자꾸 보고 싶은것만 보고 딴소리 하시는지....
@smr님 우와 같은 문화재에 불지른사람이라..선조시대 경복궁은 문화재가 아니라 그냥 궁궐이에요.
게다가 당시 전세계 어느곳에도 문화재 신경쓰는사람 없었습니다. 역사에 대해 1도 모르시는거 같아요. 님이 어느나라 찬양하시는지 모르겠지만(일본 아니면 설마 미국은 아니겠죠??? 미국은 당시에 아에 없었는데) 그 나라도 임진왜란시기 따져보면 문화재 훼손 장난 아닐건데 말이죠. 프랑스는 무려 18세기에 지네 궁궐 침략해서 왕 죽여버렸는데 이건 어찌 생각하시려나.
제발 본인 스스로 무식을 뽐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아나바시스
IP 110.♡.175.59
06-19
2019-06-19 01:59:41
·
그러게요.
차라리 반도신민들을 위해서 선정을 베푼 조선총독부 건물이 남아있었어야 제대로 된 역사적 상징이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아쉬워 죽을 지경이시겠어요.
몹쓸크롱
IP 218.♡.177.90
06-19
2019-06-19 04:45:01
·
@smr님 저위에 질문하신거 보니 궁금해서 한게 아니고 조선인이 궁을 뿌셧다 라고 정해놓고 자료 찾아다니셧네요
... 조선인이 뿌셧단 증거는 찾고 이렇게 떠들어 되시나요???
kaulkaul
IP 39.♡.59.157
06-19
2019-06-19 06:30:41
·
@moxx님
저분 ㅇㄱㄹ 라고 메모중인데
논란을 일부러 만드는거 같습니다
moxx
IP 223.♡.146.37
06-19
2019-06-19 06:38:16
·
@좋은날이나와라님 하긴 지난번에도 다른 글에서 기미가 보였는데 정말 그러네요. ㅌㅊㅇㄱ가 아니라 ㅇㄱㄹ이군요. ㅎㅎ
조각조각 쪼개어 그 중 한 조각 들고 팩트팩트 거리는 게 언젠가 많이 들끓던 모 사이트 회원 같은 느낌마저 들어요.
Tableworks
IP 175.♡.50.98
06-19
2019-06-19 03:03:31
·
참고로...건축기술이 지금과 같이 발달하지 않고 온전히 인력으로 완성시킨 목건축물이라 조선 중기 내내 공사중이었다고 합니다..
phones
IP 114.♡.195.90
06-19
2019-06-19 03:04:59
·
저 그림이 맞으려면 두번째 그림에 아래 건물이 다있어야죠. 15개인데 최소
”일제 시대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년(고종 2년)에 건설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설한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에 지은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23]“
DArkZerO
IP 121.♡.170.231
06-19
2019-06-19 03:06:27
·
댓글 소름...
Jefecito
IP 124.♡.124.58
06-19
2019-06-19 05:13:52
·
정말 일본의 '일' 자, 일본어만봐도 치가 떨려요. 혐오스러운..
애착
IP 121.♡.12.136
06-19
2019-06-19 09:31:51
·
Jefecito님// 흠 클리앙이 원래 뭐하는 커뮤니티인지는 알고 가입하신거죠?
moxx
IP 223.♡.146.37
06-19
2019-06-19 09:54:57
·
@애착님 클리앙이 지금 뭐하는 커뮤니티인데요?
ghkehdmq10000
IP 211.♡.147.22
06-19
2019-06-19 06:22:26
·
일본 얘기만 나오면 경기 일으키는 사람도 나온거 보니 둘이 얘기 잘 통하겠네요. 일뽕 아니라는데 더 그렇게 보이는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가 싶네요.
커피칼디
IP 60.♡.106.9
06-19
2019-06-19 06:36:19
·
팩트 체크 능력도 없으면서 팩트 체크하자는 댓글이 있네요.
증거가 있고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때 반박을 하는 건데, 결론을 정하고 위키에서 증거를 긁어모으는 분이군요.
심기가 많이 불편한가봅니다.
학또
IP 39.♡.58.102
06-19
2019-06-19 07:03:47
·
일본이 용서를 구한적이 없기에 우리는 일본을 용서할 의무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의 자유겠지요.
그래서 전 저 짓거리를 하고도 뻔뻔하게 모르쇠하는 일본을 증오합니다.
region
IP 211.♡.142.131
06-19
2019-06-19 07:07:21
·
인터넷에서 하나정도 보고 팩트체크 하자는 상식 부족한 사람에 일베도 있고....댓글이 참 이상한 몇명이 있네요.
예태
IP 119.♡.144.184
06-19
2019-06-19 07:29:05
·
저런거 보면 니뽕 으로 여행가는 사람도 별로 좋아보이진 않아요.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dhunggo
IP 221.♡.163.80
06-19
2019-06-19 07:30:49
·
경복궁은 단순 터 뿐만 아니라,
뒷산도 같이 봐야지 않나 싶네요.
유홍준 교수 말마따나 스케일이 크죠.
경복궁이 파괴된 것은 대부분 일제에 의한 것이 맞습니다. 예를 들면, 시정5년 조선물산공진회 같은 것을 경복궁에서 대대적으로 열면서 공간 확보를 위해 4천 칸 정도를 헐어버렸거든요. 다만, 일제강점기가 되기 전에도 경복궁에 있던 몇몇 전각(건물)을 다른 궁궐(창덕궁, 덕수궁)의 전각을 짓는데 자재로 사용하거나 아예 그대로 옮겨 짓기도 했습니다. 전체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규모였죠. 그리고 경복궁 말고도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같은 것이 있어서 조선왕조 자체로서는 서울(한양) 내에서 궁궐 권역이 차지하는 면적이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경복궁뿐아니라 창덕궁이랑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일껄요. 일제가 아주 잘근잘근 쪼개놓고 부셔놓고...
수탈이라고 하기엔 궁궐이 엄청나고 호화롭다기보다는, 업무용+상인+일하는사람 숙소등등 건물들도 잔뜩 있었고..
그리고 다른나라 왕궁들에 비하면 그렇게 호화롭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전국INFP협회
IP 175.♡.92.12
06-19
2019-06-19 09:17:30
·
그냥 요즘 느낌으로 보면 정부 종합청사 아니었나요?
구타류발자
IP 180.♡.19.25
06-19
2019-06-19 09:27:40
·
와 본문 댓글을 보니 예송논쟁이 왜 일어났는지 알 것 같습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sdf12
IP 58.♡.46.71
06-19
2019-06-19 09:29:50
·
우리말 잘하는 일본인들 많네요 ㅎㅎ
Yunty
IP 123.♡.13.134
06-19
2019-06-19 09:51:59
·
댓글에 인생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 보이네요...
사유
-
일시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삭제 되었습니다.
baekho14
IP 112.♡.183.109
06-19
2019-06-19 10:16:16
·
왜 ㅋㅋㅋ 이러시나들..
어바읏
IP 112.♡.218.86
06-19
2019-06-19 10:25:32
·
다 부수고 박람회 열고 동물원 만들고 가관이었죠. 너무 찌질하게 괴롭혀서 진짜 짜증이 솟구치는 짓들만 골라서 잘해요 쪽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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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건물이 빼곡했군용 ㄷㄷ
나라 크기 생각하면 갈려나간 백성들 비율이.. 쿨럭.
자금성은 왕족이 사는 곳이고, 경복궁은 딱 왕의 가족만 살고 세자를 제외하면 왕의 다른 자식들은 결혼과 동시에 출궁해 바깥에 살았습니다. 궁의 규모는 크지 않아요.
북경에 2년간 머물면서 주말에 심심하면 자금성에 가서 산책하고 놀았는데....
경복궁 대비 크다고 느껴 본 적 없습니다.
건물들이 그대로 있었다면, 자금성이나 경복궁이나 별 차이없다고 느껴질듯 하네요.
조선의 궁이 세계에서 인정하는 부분이 벽이 낮고 권위적이지 않다는거죠. 유럽의 성 , 자금성과 비교하면 경복궁은 검소해요. 조선의 백성을 바라보는 눈높이를 보야주는 겁니다.
갈려나간 백성들? ㅡㅡㄱ 뭔 근거로..
자금성이라는 성 전체 면적으로 따지면 한 10배 차이나긴 합니다. 근데 보통 ‘자금성=자금성 황성’이니...
경복궁이 검소하다고요? 조선 말기 그거 짓다가 경제 파탄났어요;;
나무가 모자라 남의 산소에서 나무 뽑아가고 강제노역 시키고 세금 올렸는데 조선이 바라보는 백성의 눈높이요? 백성을 얼마나 아랫것으로 생각했으면 저런 대궐을 증축했는지는 알겠네요.
일본이 파괴한게 잘못이라고 저렇게 무리해가면서 궁궐 확장한게 잘못이 아닌건 아니죠.
처음엔 규모가 작었고 나중에 무리하게 규모를 키워서 결국 국력을 탕진했다 이러면 된건가요?
자금성 관문 하나 지난 크기랑 비슷하려나..
좋은 나라 더 조은 나라.. 따지는건... 아니지 않나요??
그때야 뭐...
물론 그때를 그리워 하는 놈들도 있는 판이니..
다음 총선은 잘해서.. 더 잘살아 봅시다.. 우리모두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 이야기
http://naver.me/Ftg9gZzY
...
서양의 건물들은 닫혀 있다. 두꺼운 벽과 문으로 튼튼히 보호되고 있으며, 내부 역시 방과 방으로 견고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나의 큰 건물 안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기거하며 활동한다. 그러나 동양의 건물, 특히 한국의 건물은 닫혀 있는 동시에 열려 있다. 개개 건물은 대체로 작고, 벽체도 얇으며, 종이만 바른 넓은 문(門), 그리고 호(戶)와 창(窓)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넓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밖에서, 또 밖의 기척을 안에서 감지할 수 있다. 궁궐의 주요 건물은 대개 가운데가 마루, 양옆이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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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2C5kORvoMGFw1Ge0AAK1Ra1zBT8kNqlQyrnVLdWfR3N4LCSkgsxFGe3YarV4ZjlJ?nttId=6016&bbsId=BBSMSTR_1008&pageUnit=10&searchtitle=title&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Wr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mn=NS_03_07_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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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거주하는 궁궐은 어느 정도 위엄을 갖추기는 해야 하지만, 그것이 크고 화려하다는 것은 백성들을 괴롭힌 흔적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을 단순히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경제력이 안 됐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못 사는 나라의 경우에도 거창한 건물들은 세워질 수 있다.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은 국가 전체의 경제력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부가 어디에 편중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궁궐은 소박하다는 그 점에 바로 조선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며, 조선의 특색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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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궁궐 담은 백성과 함께 하려는 조선의 정치철학이었다
http://naver.me/xLRixR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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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높은 성벽과 해자도 통치자의 두려움에서 생겼는데 동양 삼국 중 조선의 정치 철학만이 백성이란 함께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학문과 정치가 지향하는 길에 백성이 있었으니 백성과 사이에 담벽을 높게 할 수도 없고 해자를 만들어 백성과 떨어질 수도 없었다.
이 낮은 궁궐 담으로 반정이 두 번이나 있었고 조선의 국모가 왜인들에게 시해 당하기도 하고 왕자들이 이복동생 세자를 죽이기도 했지만 해자가 없는 낮은 궁궐 담은 백성과 함께 하려는 조선의 정치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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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과거에 라디오로만 들었던 제대로 확인하게해줬네요..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한 왕조로 통치를 할수 있었던건 단순히 운이 아닙니다. 일본애들이 만든 쓰레기 같은 역사관이 아직도 우리세대에도 남아있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몽골제국, 로마와 같은 거대 제국을 만들었던 국가는 아니었지만, 백성을 중시하는 국가정치 경제 모두 그 당시 남 부럽지 않은 자부심을 가질수 있는 국가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조선시대 세종대왕때는 노비 남자들도 육아휴직 30일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좋아졌지만 몇년전 대한민국보다 훨씬 백성을 생각하는 국가였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조선왕조실록등의 기록유산은 인류역사상 찾기힘든 기록유산 입니다. 500년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 것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한것도 대단합니다.
보존이 가능했던것도 지금 DR센터같이 한곳에만 보관하지 않고 두군대도 아닌 4군대에 보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임진왜란때 3곳의 자료가 손실되었지만 한곳을 지켜내어 보존이 가능했던거지요. 단순히 DR 3개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통치의 기록을 소중히 했고 , 이것을 보존하는 수준이 너무 높았다고 전 생각합니다.
애착님.. 절 비웃는건 좋은데요. 우리나라의 자랑스런 역사는 비웃지 말아주세요.
남양 급으로 멀리해야하는데 이런 인식이 잘 세워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왕의 일가
궁녀
내시
도합 몇백은 될건데 너무 건물이 없더라니...
조선후기에도 메인은 창경궁이라고 들었는데
알고 댓글다는거 맞아요? 일부러 거짓정보 퍼트려서 갈라치기 하시는듯한데
혹시 일뽕이라고 매도하실까봐 미리 사상검증 합니다. (아베개x끼, 일제개x끼)
백성들이 불질른거에 대한 레퍼런스는 해당 문서 찾아가면 있으니 참고하시길.
참고로 저 자료의 사료는 선조실록인데, 선조실록의 신뢰성을 의심하는건 좀 수상하네요
거가(車駕)가 떠나려 하자 도성의 간민(姦民)이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훔쳤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공사 노비 문적이 있는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궁성의 창고를 약탈하고 방화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일시에 모두 없어졌다. - 선조 수정 실록 -
경복궁 재건은 1865년(고종 2)에 가서야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시작되어 1868년에 완성되었다. 경복궁은 270여 년 만에 정궁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이후 경복궁의 역사는 순탄치 못했다.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고,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겨간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경복궁의 수난은 그야말로 비극적이었다. 일제는 한국의 정신을 모욕하기 위해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훼손하였다. 일제는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어 민간에 팔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경복궁의 훼손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개최된 이른바 '시정(始政)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였다. 일제는 이 행사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는 경복궁을 가로막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광복 후에도 경복궁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 속에서 서울 시가전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얼마남지 않은 경복궁 전각 일부가 폭격에 사라지기도 했다. 광화문도 이때 폭격을 피해가지 못하고 뼈대만 남게 되었다. 1952년 휴전협상이 부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당시 부산에 있던 정부는 경복궁의 복원에 대해 국무회의에서 잠깐 논의했지만, 이를 진행할 재원이 없어 손놓고 기부만을 바라는 형국이었다.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royalPalace.do
본문에 2번째 사진의 정도로 파괴한게 일제가 맞냐는게 의문인데
제가 찾은 일제시대때 경복궁은 다음과 같은데요?
참고로 일뽕으로 매도당할까봐 무서워서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거짓정보를 퍼트리는건 일뽕들에게 흠잡힐짓 주는거라
팩트체크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거짓정보는 smr님이 퍼트리고 계신거 아닌가요
1. 저 사진이 어느년도의 사진인지
2. 정확히 경복궁 내부의 사진이 맞고
3. 그것을 일제가 파괴한게 사실인지
4. 팩트체크 바랍니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전체가 홀라당 타버렸을 때 고종과 조정은 창덕궁으로 이어할지, 경운궁을 재건할지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경복궁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쯤되면 경복궁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거의 혐오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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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 병합 후에는 식민지의 사기를 꺾고 실용성도 따질 겸 일본 총독부의 만행으로 인해 가장 훼손된 정도가 큰 궁궐 가운데 하나[19]이기도 하다.[20] 일제는 우선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동쪽 담장을 안으로 밀어넣으면서[21] 약 4,000여 동의 건물을 없애 버렸고, 이후 경복궁 내부 중앙 축선에 근정전과 광화문을 가로막는 형태로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지은 뒤[22] 광화문을 다른 자리로 옮겨버리기까지 했다.
이 결과로 본문의 두번째 사진이 사실이라 이거죠?
경운궁 대화재와 경복궁이 뭔상관인데요
1. 자꾸 논점 이탈 하지 마시고
2. 애초에 제 댓글의 내용은
3. 본문의 두번 째 사진으로 만든게
4. 일제가 한것이냐는 것입니다.
5. 글을 안읽는건지 이해를 못하시는건지
6. 헷갈려서
7. 이렇게 넘버링해드립니다.
8. 다시한번 말하지만 논점이탈좀
9. 자제해주세요
https://ko.m.wikipedia.org/wiki/경복궁
여기 일제시대 파트 보세요.
1. 왜 자꾸 일본이 부순게 팩트인 경복궁을 고종때 부셔졌다고 하세요?
2. 위에 글에도 멀쩡하게 "17년 대화제때 일부 헐어서 복구에 사용했다"라고 되어있는데요?
3. 1917년이 고종시대라고 생각하시는건 아니....죠??
이렇게하는겁니다.
그냥 문장별로 넘버링하는게 아니라 논점마다 다는겁니다. 넘버링 남용 자제 좀 하세요. 보고서 써보시긴 한거죠?
본인부터 잘 합시다.
안 써본 것 같네요... 저런 넘버링은..
대학교 리포트조차 저렇게 달면 바로 감점될테니까요.
> 우리나라 한우는 그냥 우물안 개구리네요
한우vs와규 이런건 겜이 되질 않겠어요
> 우리나라도 BTS니 김연아니 박지성이니 하면서 솔직히 국뽕이 좀 있긴한데 ...
저사진은 과장같은데요. 언제적사진인지 근거 만가져오면 논란종료인데 아무도 못가져오시는걸요
다른 선수를 안정환 플레이어라고 제목이 잘못된 글을 한참 방치해서 사람들 속이고
댓글로 잘못된거 알면서도 안바꾸다가 핫글로 가서도 수정하기는 커녕 그냥 삭제하신 분이
거짓 정보 운운 하시는거예요? 진짜 내로남불이시네요?
핫글에서 정말 안정환인줄 알고 플레이 다 보고 댓글보고 어이없어했던 1인입니다.
원래 저런 사람입니다
왜 신고당할 먹이감을 주세요...그런걸 노리는거 같은데...
...
티키타카 ㄷㄷ
그거 다 그 당시의 그 나라 국민(특히 서양은 식민지의 몫까지)들의 고혈이 들어갔을텐데요
지들 = 조선 난민
게다가 당시 전세계 어느곳에도 문화재 신경쓰는사람 없었습니다. 역사에 대해 1도 모르시는거 같아요. 님이 어느나라 찬양하시는지 모르겠지만(일본 아니면 설마 미국은 아니겠죠??? 미국은 당시에 아에 없었는데) 그 나라도 임진왜란시기 따져보면 문화재 훼손 장난 아닐건데 말이죠. 프랑스는 무려 18세기에 지네 궁궐 침략해서 왕 죽여버렸는데 이건 어찌 생각하시려나.
제발 본인 스스로 무식을 뽐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차라리 반도신민들을 위해서 선정을 베푼 조선총독부 건물이 남아있었어야 제대로 된 역사적 상징이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아쉬워 죽을 지경이시겠어요.
... 조선인이 뿌셧단 증거는 찾고 이렇게 떠들어 되시나요???
저분 ㅇㄱㄹ 라고 메모중인데
논란을 일부러 만드는거 같습니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3582044?po=0&sk=id&sv=smreodhkcnadmf&groupCd=&pt=0CLIEN
이 글보면 굳이 계속 상대 안하셔도 될 듯 합니다.
그놈의 양비론
”일제 시대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년(고종 2년)에 건설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설한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에 지은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23]“
증거가 있고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때 반박을 하는 건데, 결론을 정하고 위키에서 증거를 긁어모으는 분이군요.
심기가 많이 불편한가봅니다.
그래서 전 저 짓거리를 하고도 뻔뻔하게 모르쇠하는 일본을 증오합니다.
뒷산도 같이 봐야지 않나 싶네요.
유홍준 교수 말마따나 스케일이 크죠.
고종때 복원확장하고,
일제강점기에 다시 파괴한 건 왜구들.
현대와서 다시 일부 복원함.
팩트는 왜구의 침략에 의해 두번이나 소실 된 것.
본문은 일제강점기 얘기임.
어느 토착왜구는 본문과 상관 없이 임진왜란때 백성들이 파괴한 것만 얘기하는 군요.
일제가 우리를 현대와 시켰다.
-> 팩트는 수탈하기 쉬운 인프라를 만든 것.
어짜피 조선은 백성들을 수탈했다.
-> 팩트는 왜구가 우리 백성들을 구원하러 온게 아니라, 수탈하러 온 것임.
시대에따라 백성(시민)의 역사는 굴곡이 있고 역사성이 있는 것이죠.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있는게 우리 민족이고요.
타국을 침범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수탈한 왜놈들이 역사를 왜곡하며 정당성을 부여하는 참담함에 왜놈들은 절대 용서하면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한번도 제대로 된 용서를 구한적도 없는 놈들이...
다음 총선에 토착왜구 박멸이 시급합니다.
지도에서 빠져있네요..
수탈이라고 하기엔 궁궐이 엄청나고 호화롭다기보다는, 업무용+상인+일하는사람 숙소등등 건물들도 잔뜩 있었고..
그리고 다른나라 왕궁들에 비하면 그렇게 호화롭지도 않은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