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6141698081209
-이육사 시인이 처남(안병철)과 의절했다고 하는데.
“아버지 같은 사람은 100명 중 한 명 있을까. 꿇어 앉히고 (세로로) 잘라서 삐죽삐죽 한 대나무를 다리 사이에 넣어서 훑어 내면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그런 고문을 이겨내셨다. 어머니가 해준 솜바지 마다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이겨 내지 못한다.
외삼촌이 고문을 못 이기셨다(동지의 이름을 대서 여러 명이 잡혀 들어갔다). 아버지가 외삼촌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내가 중학교 2학년 시절 시화전(이육사 작품)에서, 외삼촌이 말씀하시더라. ‘그 이후로 육사를 못 봤다, 육사는 강인한 사람이고 나는 나약한 사람이라서’라는 회한의 말씀을 하셨다. 그것이 마음에 사무쳤는지 외삼촌은 이후에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시곤 했다.
어머니가 나중에 말씀하시길 그때 아버지가 외할아버지에게 두루마리 편지를 써서 ‘더러운 혈통을 물려받은 딸을 데려가라’고 하셔서 어머니도 한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독립운동으로 17차례 옥고.. "이육사 연행한 인물, 해방 후 고위직 올랐다"
https://news.v.daum.net/v/20190618044344925
17차례 옥고를 치룬 이육사 시인은 주로 신문사에서 일하며 대구청년동맹, 신간회 대구지회 등에 몸담아 독립의식을 높이는 활동을 했다. 대구거리에 격문을 붙이고 일주일 동안 솔밭에 숨어 지낸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친적 이상흔의 증언). 그는 1930년 ‘별건곤’ 잡지에 발표한 글에서 대구지역 사회단체가 상당히 움츠러들었다면서 “새로운 용자여, 어서 많이 나오라”고 주문한다.
요주의 인물이었던 그는 걸핏하면 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김희곤 교수는 “풀려날 때도 골병이 들어서 운신을 못할 정도로 고문을 당하고 나왔다”며 “일본은 정책 자체가 어떤 행위에 대한 응징도 있지만 향후 활동을 못하도록 못 박기 위해 고문을 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런데도 이육사는 몸만 추스르면 정신은 그대로 가지고 다시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이육사 시인은 1943년 중국으로 떠나면서 “베이징으로 가서 동지를 만나보고, 다시 충칭으로 가서 어느 요인을 모시고 옌안으로 간다. 나올 때는 무기를 가지고 나와야 하겠는데, 그것을 만주에 있는 어느 농장에 두고 연락하겠다”라고 동료 기자이자 동지였던 이선장에게 말했다. 당시 충칭의 임시정부와 옌안의 조선독립동맹 사이에 합작 노력이 있었다.
육사가 무기를 들여올 계획을 가졌다는 점에 대해서, 김 교수는 “1940년대가 되면 독립운동사가 전반적으로 전투, 전쟁 쪽으로 기운다”며 “그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육사는 무기도 잘 다뤘다.
이육사는 1943년 무기를 국내 들여 오려는 모종의 계획을 가지고 중국으로 갔다가 그 해 7월 모친과 맏형의 소상(사망 후 첫 번째 제사)에 맞춰 잠시 국내 들어왔다. 이 때 서울에서 검거돼 베이징으로 이송된 후 사망(1944년 1월 16일)했다.
육사의 먼 친척인 독립운동가 이병희(1917~2012ㆍ건국훈장 애족장) 지사는 베이징 감옥 건너편 방에서 육사가 콜록콜록 기침하는 소리를 밤낮없이 들었다.(‘이육사의 독립운동’, 김희곤) 이 지사가 풀려난 뒤 일주일쯤 지나 간수가 찾아와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고 했다. 시신을 화장했고, 육사의 동생 원창이 유골을 가져갔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가 집필하고 이육사문학관이 2017년 펴낸 ‘이육사의 독립운동’(이육사전집Ⅱ)의 221쪽에는 눈에 띄는 주석이 있다. 1943년 귀국했다가 체포된 뒤, 20여 일 지나 베이징으로 끌려 갔던 이육사. 주석은 ‘이때 육사를 붙잡아 갔던 사람 가운데 해방 이후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 있다는 제보가 있다’는 내용이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외삼촌분도 이육사 선생도 의절하며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한을 짊어지셨네요
이육사 연행한 인물 해방후 고위직에 올랐다는 한줄에...
자랑스러운 역사도 많지만 저런거보면 정말 열받습니다ㅠ
지금이라도 경상도의 정치수준을 높여서, 자유한국당을 국회에서 제거해야, 후손에게 그나마 면목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년전의 촛불은 단순히 정권/대통령교체의 의미가 아니라, 광복이후 한국의 비리 적폐를 청산하고, 상식과 정의의 대한민국으로 나아갈때 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대구 경북에서 과반이 나오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자한당 지지층이 있습니다.
오세훈 시장은 어느당 출신이었나요?
제주지사는요?
이런 건 지역감정 논란일 수 있어요.
국회의원 선거 때 자유한국당(전 한나라당)을 제대로 심판합시다.
하지만 현실은 직시해야 합니다. 경상도 TK, PK지역의 뭍지마 한나라당 지지자가 50%미만으로 줄면, 자유당 해체됩니다.
지금이라도 후세의 역사에 경상도의 친일파 사랑이 기록되지 않기만을 바랄뿐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그나마 가장 빠른 때죠.
친일의 역사는 어떤 형태로든 바로 잡고 가지 않으면 독립운동으로 희생하신 분들을 볼 낯이 없을 듯 합니다.
저런게 이승만 이하 노덕술 빨아재끼기 악덕 친일경찰들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