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다
북한정권수립에 앞장섰다
6.25때 남한 사람들을 죽였다
등등 이야기가 나오길래 검색을 해봤습니다.
일단 의열단 등의 일제시대 때의 독립운동에 대하여는
누구도 반론할 수 없는 분이셨고,
광복 후에는 미소군정을 반대하고, 우파(?)인 여운형 선생과 함께
좌우합작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셨죠.
남으로는 이승만, 북으로는 김일성과 접촉하여
미국과 소련에 의한 꼭두각시가 아닌 민족자주의 국가가 세워지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여운형 선생의 사망 및 노덕술 등의 친일파에 의한 신변위협으로
북한을 방문했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후 김일성의 북한정부수립 과정에서 그의 항일이력이나 명성에 따라
고위직에 추대받게 되었던거죠.
6.25에 대해서도, 약산 선생은 전쟁을 반대하셨습니다.
김일성에게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은 장기화 되고 많은 동포가 죽을 것이라는걸 알리며 반대하셨지만
전쟁을 막지는 못했던거죠.
전쟁중에도 전선에 나서서 전투를 한게 아니라, 후방에서 군량미 생산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 김일성의 독재에 반대하여 숙청당하신걸로 알려져있죠.
덕분에 공부를 좀 한것 같아 뿌듯함과 동시에,
이렇게 까지 악을 쓰고 깎아내리려고 하는 언창 및 기레기들에게 화가 납니다.
문대통령은 김원봉과 여운형 처럼, 우리민족과 나라를 위해 좌우를 떠나 함께 힘을 모으자는 말을 했던건데
그걸 꼬투리 잡아서 공산당이니 뭐니 외치는 것들이 우리나라의 언론이라니 참담하기 그지 없네요.
결론은 역시 총선은 "한일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토착왜구들을 박살내는 것이 우리나라가 더 나은 나라가 되는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정권수립에 앞장섰다
6.25때 남한 사람들을 죽였다
이거 셋다 전부 틀린얘기죠.
약산은 우선 무정부주의자였고,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다 활용해 독립운동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약산은 북한정권 수립 초창기부터 입지가 매우 좁았어요. 그의 '출신성분'때문에..(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국민당군 장교로 북벌 참여했고, 장개석의 직계군으로 분류되었던 인물이니까요.) 언론에선 그를 북한에서 '연안파'로 분류하곤하는데, 그는 실제로 연안파하고 연관없었습니다. 8월 종파사건 이후에도 살아남았거든요. 실제 연안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약산하고 같이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들은 나중에 약산의 국민당 정부와의 연계하는 노선을두고 비난해 독자적으로 활동합니다.(대표적으로 최창익 같은인물이 약산의 노선을 굉장히 비난했죠) 그의 '출신성분' 및 최창익 같은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로부터 비난받은대목만봐도 그는 쉽게 공산주의자라고 정의할 수 없다라는게 제가 보는 시각입니다.
6.25때 약산은 한국전쟁에 최전선에서 무슨 지휘를했다거나 나섰다는 기록 거의 못봤습니다.(한국전쟁의 핵심 주도층에는 '7인 위원회' 명단이 반드시 들어가야하는데, 약산은 거기에 없어요) 굳이있는거라면 후방에서 보급,행정역할 한거? 그거밖에 못봤어요. 남파간첩 운운하는 인간들도 봤는데, 그 논리대로라면 납북된 조소앙 선생도 똑같이 매도당합니다.(아카이브 신문 찾아보세요. 50년대때 조소앙 선생에 대해 이승만 정권이 어떻게 써갈겼는가를.. 무슨 '남파간첩의 괴수'수준급으로 다뤘습니다) 그런 조소앙 선생이 89년에 납북자로 인정되 정식복권되었는데..
약산의 숙청과정은 제가 알기로 제3당 사건(조소앙,엄항섭 등 납북 임정요인 중심으로한 중립화통일방안-1954년 제네바 회의때 베트남과 한국문제 대두될때 제기되었던 주장. 북에선 조소앙,남에선 조봉암이 이에 호응함- 주장 운동)과 천도교 청우당 김달현 사건,장평산 쿠테타 모의에 연루되어 숙청된걸로 알고있습니다.
독립운동 반일항쟁은 그들한테는 불편한것들이겠죠.
약산은 미국편 들지 않고,
북으로 갔다는 이유하나로,
모든 독립을 위한 공헌은 사라지고,
민족반역자 취급을 받는 중이죠.
근데 저도 저분이 누군지 잘 몰랐는데
덕분에 세세한 정보를 알아가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