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게시판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인 최성철이라는 분이 쓴 게시글들입니다.
게시글들이 꽤 많은데, 몇몇 글을 읽는 도중에 발췌를 해봅니다.
이 분은 신 또는 하느님이라는 게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삶의 비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냥 자연법칙 같은 것과 비슷한 거라는 말이겠죠. 그래서 '무신론적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또한 폭력적인 시스템으로서의 종교에 저항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자는 무신론자였지
자기가 신이라며 권위를 내세운 게 아니라 합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경전에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구절이 많이 있지만,
이건 김일성이 축지법을 썼다는 식으로, 당시 사람들의 바램과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라는 사람이 야훼를 들먹이는 워딩을 썼다 하더라도
그건 그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적인 사고를 반영된 것일 뿐이지,
진지하게 신에 대한 관념을 주장하는 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의 역사를 신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기록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걸 그대로 신들의 역사로 볼 필요가 없듯이,
혹은 영어권 사람이 'Oh my God'이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실제로 신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관용어구이듯 말이예요.)
저는 기독교는 좋은 건데 개독이 문제라거나 하는 생각보다는,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같은 야훼신화 계열의 종교들 자체가 민주주의의 반대쪽에 있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사상체계이니
민주주의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사상들에 반대해야 한다고 봅니다.
( 예수를 신으로 믿는 게 이만희이나 정명석을 신으로 믿는 것보다 수준 높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
근데 이쪽 종교들이 여기 링크한 글 정도만 이성을 찾아도 우리가 이 종교들 때문에 겪는 문제점들 중 많은 수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뭐, 하지만 이렇게 말랑말랑한 분파는 영업도 장사도 잘 안 되겠죠.
극단주의 분파가 잘나가는 현상이야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고,
이런 분파는 한의학이 현대화되면 결국 소멸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길을 걸을 수도 있겠지요.
원초적으로 역사적 예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배척하고, 무신론적 하느님을 선포했다. 물론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1세기에 살았던 예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반대했기 때문에 성전종교에 의해 무신론자로 정죄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됬다.
유신론적 하느님과 무신론적 하느님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 유신론적 하느님은 믿어야 하는 상대적인 존재라면, 무신론적 하느님은 관계론적인 삶의 비전이다. 즉 무신론적 하느님은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상호의존관계이며, 삶 속에서 느끼고 인식하는 궁극적인 진리이며 실제(Reality)이다. 고대 전통적인 종교가 맹신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은 인간과 이 세계와 분리되어 외부 즉 다른 세계(하늘 위)에 타자로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신이다. 유신론적 하느님의 특징은 부족적이며 자신의 부족만을 보호하며, 비단 자신의 부족 내에서도 복종하지 않으면 징벌이 따르고, 순종하면 축복을 내리는 이분법적인 심판자이다. 반면에 역사적 예수가 깨닫고 인식한 무신론적 하느님은 생존과 종교의 경계 넘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비전이며, 참된 인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예수는 부족적이고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과 그런 하느님을 인간보다 더 소중하게 숭상하는 제도적인 종교를 거부한 무신론자였다.
예수는 제자들과 종교체계가 죄인으로 정죄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것을 목격한 소위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에게 항의하고 비난하자,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재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하느님이란 말은 인간의 언어이고,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체험 밖의 실제(Reality)를 서술하지 못한다. 서술한다고 해도 그것은 형이상학적이고 상상에 불과하다. 하느님이란 말은 인간의 언어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즉 뇌의 작용에서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를 우리의 의식과 인식 속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21세기에 기독교 성서만으로 하느님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다른 종교들과 과학, 문화, 철학, 인류사를 통해 하느님을 더 깊고 넓게 탐구할 수 있다.
무신론자(atheist)라는 말은 사람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신론자는 부족적이고 제도적인 종교들이 맹신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 즉 유신론적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하느님이란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유신론을 부정하면서도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는 무신론자 종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인류사에서 인간이 가장 많이 사용해온 말들 중에 신 또는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인간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창작한 은유적인 표현이며 궁극적인 실제(Reality)를 뜻한다. 즉 장구한 우주 역사에서 인간이 하느님보다 먼저 출현했고, 하느님은 현대 인간이 출현한지 수십만 년이 지난 후, 약 6천 년 전, 인간뇌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으며 (...) 그 진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인간 생물종이 살아있는 한 인간과 생명의 의미, 하느님의 의미 그리고 세계의 의미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듯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할 것이다.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은 인간의 자의식의 부산물이다. 인류사에서 유신론이 인간 정신을 철저히 장악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적 욕구에 기인한다. (...) 오늘 유신론은 인류사회를 혼돈과 분단의 늪으로 빠트리고 있으며 인류의 밝은 미래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인간 조상들이 죽음과 한계성과 무의미을 인식하면서 불안과 공포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자의식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의식을 지탱할 수 있는 정신기제 이상의 무엇이 절실히 필요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은 자신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으로 유신론적 하느님의 개념을 창조했다.
유신론적 하느님을 맹신하는 교회기독교는 타락-죄-회개-구원의 공식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으며, 이것은 인간과 신의 관계를 보상관계로 전락시킨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간들이 만든 종교제도들은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에서 안전과 보호를 추구하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인간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신론으로 하느님을 개념화해서 자신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망상의 노예가 되었다. 1세기에 예수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등장했을 때에 성전종교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이분법적 통제와 착취가 극에 달했다. 따라서 민중들은 가난과 질병과 절망 속에서 마치 죽음의 골짜기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
http://www.hyanglin.org/home/board_hhXD46/8849
오늘날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개인적인 신의 계시는 그것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보편적으로 설득력이 없으며, 인류 전체에게 강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몰상식한 일이다. (...) 현대인들은 사적인 계시(Personal revelation)와 과학이 발견한 인류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공개적인 계시(Public revelation)를 분별하고, 다른 점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들이 숭배했던 신들은 단순히 인간처럼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분노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이분법적으로 행동했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 구약성서에서 유대인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증오했던 모든 사람들을 증오했다. 이처럼 고대의 신은 오늘도 부족적으로 편애하는 옹졸하고 변덕스러운 신이기 때문에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필요없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적어도 지난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인격적인 하느님은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인간처럼 보이며 인간처럼 행동했다. 따라서 오늘날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정의하는 것은 인류의 밝은 미래에 대단히 위험하다. 이 인격적인 하느님이 인류 사회를 탄압과 착취와 차별로 암흑과 같은 절망과 고통 속에 빠트렸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유신론적 종교들의 첫 번째 교리는 인간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믿는다. 즉 태양, 더위, 추위, 바람, 물, 폭풍 등을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나타난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비인격적인 힘들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과 관계를 맺고 통제될 수 있기를 바랬다. 인간이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달랠 수도 있고, 타협할 수도 있고, 아부할 수 있기 위해 인격적인 특성을 부여했다. (...)
이렇게 유신론적 종교 내부에는 인간이 자의식에서 인식한 두려움과 공포를 통제하기 위한 방어체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만든 종교 속에 그런 방어체제가 존속하는 것은 진리의 징후가 아니라 생존의 두려움과 공포의 징후이다. 따라서 종교 자체는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라, 인간 생존의 안전체계를 보장하는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수단이 되었으며, 유신론적 종교 내부에 강렬한 분노와 폭력이 존재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비합리적인 적대감과 증오는 공포와 히스테리의 한 증상이다. 분노와 폭력은 항상 유신론적 종교의 특징이며, 세속적인 세상에서 선포되는 사회정의와 자연환경보호와 여성평등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금지시키고, 교리를 어기고 권위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이단자들을 추방하고 처형한다.
하느님에 대한 유신론적 정의 즉 하느님은 인격적이며, 초자연적이며, 인간적이며, 가부장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정의는 원초적으로 신적인 계시를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은 저 하늘 높이 우주 밖에 존재하면서 가끔 지구에 내려와서 이런 저런 인류 역사에 개입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하느님에게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지 않으면 또는 나의 믿음이 그다지 크지 않으면 나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더욱이 교회는 열심히 나가면서도 하느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 의심하면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뿐이지, 사실상,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불안과 불신 속에서 안감 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결국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상식적으로 또한 이성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왜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도 누구를 (그것이 하느님이든 이웃이든) 못믿는듯한 불신 속에서 불안과 초조함 가운데에 살아가고 있는가?” “왜 기독교인들은 앵무새처럼 누가 말하는대로 또는 이미 만들어진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나? 이것이 지루하고 땨분하지도 않는가?” 또한 “왜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믿음과 비교하면서 경쟁하고 있나? 더 큰 상을 받으려는 이기적인 욕심때문인가? 이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나? 나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더 잘되도록 도우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 아닌가?”
종교(religion)[원래의 의미는 “관계”(relation)에서 유래됨]라는 말은 “나는 이렇게 하느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나의 하느님 체험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경험들이 모여서 서로 관계를 이루는 통합적인 삶의 방식이다. (... 각 자 다른 개체들의 경험들이 공동체적으로 살아갈 때에 자연적인 발생으로 종교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서로 다르게 체험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우리(혹은 나)의 체험과 동일하게 체험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는가?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과 힌두교인들과 무종교인들에게 개종하여 자신들의 체험을 따라야 한다고 억지부릴 수 있는가?
이 얘기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요.
무신론적 신을 주장하는 데서부터 이미 기독교인이라고는 할 수 없겠는데요..;
문자근본주의만 버린다면 말이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것 자체가 성경 자체를 부정하는거죠.
그냥 예수라는 개체가 혼자 떨어져 나오는건데 무슨 성경해석 타령인지...
성경의 주요 맥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이단이죠
공의회 등을 통해 정의 되어 있는 기준이 있고 그걸 부정하거나 조작하려고 하면 내쳐집니다.
예수가 무신론자라는 주장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삼위 일체 를 부정하는 내용이잖아요.
무신론자인 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어요.
그게 맘에 들지 않으면 그냥 안 믿으면 되는 거구요.
뭐하러 유신론자들 집단에서 굳이 무신론을 주장해요.
그게 딱 절이 맘에 들지 않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 상황이에요.
예수의 설법을 해석하는 게 로마의 특권일 수는 없구요.
기독교 안 믿으면 된다니까요.
왜 하고 많은 종교 중에 예수를 신이라고 믿는 종교에서 예수가 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합니까;
레밍일지도....
맹목적인 믿음을 주장하는 것이 대다수의 종교거든요.
종교라는 것 자체가 증명할 수 없는 이해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있다고 믿으며 그걸 진리로 여기는 행위죠.
기존의 이론을 부정하려면 뭔가 증거나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시대 살았던 사람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알죠?
성경엔 이미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걸 부정하려면 뭔가 또 다른 근거나 증거가 있어야하지 입으로 놀리는건 누가 못해요?
기독교에서는 지 ZOT 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놈들을 제일 문제시 하고 그런 놈들을 사기꾼이나 사이비라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본문에 제 의견을 밝혀뒀습니다.
갑오경장 이후 강제적로 신분철폐가 됐지만 일제시대 내내 백정과 한 지붕아래서 밥을 먹는것은 금기시됐고 그게 사라진게 6.25 동란시 백정들조차 군 병력으로 필요하니까 어쩔수 없이 차별이 없어진게 한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불교는 애초 현실의 신분제는 전생업때문이고 따라서 선행해서 내생에 좋은 신분으로 태어나길 빌면 되는 것이고 유교는 아얘 신분질서에 복무하는 것이 도를 실현하는 것으로 가르쳤으니 민주주의에 더 반동적인 것은 기독교보다는 불교나 유교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종교의 속성상 모든 종교가 보수적인 것은 맞지만 적어도 기독교가 민주주의 에 반하는 종교라는 것은 잘못되도 많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말씀하신 것들은 그 시대에서 나름의 역할을 한 겁니다.
근데 그걸 지금까지 불변의 진리라고 하면 말이 꼬이는 거죠.
예수의 설법이든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든 그 시대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겁니다. 아마 노예제나 신분제, 아동노동도 당시에는 적절한 수단이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걸 21세기의 민주주의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면 미신이나 꼰대, 폭력 정도밖에는 안 될 겁니다.
이분이 .. 은퇴목사이면서 동시에 지질학자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인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