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연수원 동기 노무현
내가 고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가을 사법연수원에서였다. 7기생 전원 58명이 교실 하나에 모여 앉아 2년을 보냈으니, 나도 그를 조금은 안다고 할 만하다. 동기생 중 유일한 고졸 학력이고, 늘 웃는 얼굴의 촌사람풍이었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거셌다.
맨 처음 기억나는 일은 연수원에서 소풍을 갔을 때였다. 연수생들이 나와서 각종 장사치 흉내를 내는데, 뱀장수, 속옷장수 다음에 그가 나와서 면도날장수 흉내를 냈다. “그럼 이 돈을 다 받느냐?”라며 물건값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사람들이 예상한 다음 대사는 “아니에요. 절반 뚝 잘라서 단돈 천 원 한 장!”이었다. 그런데 그가 한 말은 “네, 다 받습니다. 받고요”였다.
모두들 포복절도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자랑 사회를 봤다. ‘무너진 사랑탑’이라는 노래를 한 곡조 하더니만, 돌아가며 노래를 시키는데 그는 “심리미진의 위법이 없어야 한다”고 법률용어를 써 가며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연수원 수료 후 들은 그의 소식 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시위사건으로 구속될 뻔한 사건이었다. 당직판사가 영장 청구를 기각했더니, 당일에 재청구가 들어와 판사 세 명이 차례로 사건 처리를 회피했다는 것이었다. 몇 달 후 그는 다른 시위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어려운 길 가는구나. 가슴이 저려 왔다.
그 해 그가 서울로 올라와 동기생 예닐곱 명이 모였는데 그 자리에 내가 끼었다. 그가 생각하는 운동이란 뭔지 물어 보았다.
어느 시골 할머니가 급환이 생겨 할아버지가 소달구지에 싣고 가다 마침 자가용 승용차가 지나가기에 세웠다. 동승자는 없고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읍내 병원까지 데려다 달라고 간청했더니 승용차 운전자가 할머니를 힐끗 보곤 그대로 가 버렸다. 이야기 끝에 그가 한 말은 이랬다. 사람이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려는 소망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가 인권변호사 노릇을 하던 시절, 법정에서 하도 집요하게 변론을 하여 판사들이 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편 미안하고 한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자주 떨어지기에 딱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뿐이었다. 누가 그를 욕하면 듣기 싫었지만, 칭찬해도 그저 그런가 싶었다.
그러다가 그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하루는 동기생 변호사가 판사실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야, 노무현이 빨갱이 아니냐? 그 사람 대통령 돼도 괜찮을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빨갱이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도와줄 생각이나 하세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어느 법조계 인사가 내게 이렇게 평했다. “진주민란, 동학농민운동, 3·1운동, 4·19혁명, 6·10민주항쟁, 광주항쟁이 모두 쌓여서 이제야 그 원이 이루어진 거다.” 대통령 취임식의 초청장이 왔는데, 하필 딸 졸업식 날과 겹쳤다. “아빠는 딸이 좋아, 대통령이 좋아?”라는 물음에, 영광의 날 그를 한번 볼 기회를 놓쳤다.
대통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의 앞날이 험난할 것임을 알았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망이 그의 정치에서 과연 얼마나 구현될 것인가. 마음이 어두워졌다. 나와 가까운 이로 노무현 정부의 첫 내각에서 장관이 된 사람이 있어, 노 대통령이 어떻더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사람 참 선질(善質)이더구먼”이었다. 본래 보수적 성향인 사람을 장관으로 데려가기에 좀 의아했고, 그도 노 대통령을 썩 긍정적으로 평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의외였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몇 해 지나 동기생 부부들을 청와대에 초대했다. 이 다정한 남자는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가, 판사 재직 중 작고한 동기생의 부인 앞에 서더니 “아…”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만찬 자리에서 몇몇이 마이크를 쥐고 덕담을 하는데 과거 부산에서 공안검사를 했던 이가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하루는 노 변호사가 나를 찾아와서는, 운동권 학생 하나가 잡혀간 것 같으니 행방을 좀 알아봐 달라고 합디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찾다 찾다 못 찾아 마지막으로 내게 와서 우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 어머니가 아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라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학생이 어디 붙들려 있는지 알아내 노 변호사에게 일러주며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 사람, 참 따듯하구나.
그가 검찰에 소환되었다. 검찰청사 앞에 닿은 버스에서 내려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뉴스 화면에서 보는 순간 섬뜩했다. 더 깊어진 눈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맑은 눈빛에서 왠지 불길한 느낌이 닥쳐왔다. 괜찮으려나.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무슨 멍울이 지는 것 같은 서러움에 잠겨, 나는 울었다. 그러다가 몇날 며칠 그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난 모든 신문을 모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덧 10주기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이 글을 쓰는 것, 그리하여 이제껏 가슴에 담아두기만 했던 이 말을 전하는 것뿐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립다.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5261601001
정의로웠고 인정이 많았고
인간답게 사셨습니다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경선때 친구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을 끝까지 지지했던것처럼
친구분도 내인생 끝날때까지 응원하겠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어찌 법무법인 '바른' 에 속한 사람이 이런 글을 쓴다는 말입니까.
메시지만 보자구요
메시지(내용)가 좋아서 퍼왔습니다
판치는나라 때문에.... 안타깝네요.
이분이 바른을 이끌던 시절에는 소속 변호사들이 엠비를 도왔고, BBK 사건때 김경준 징역 10년 판결을 받아내고, 10.26 보궐선거 당시 박원순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디도스 공격을 한 가해자 변호도 했습니다. 전적이 화려한 법무법인 바른이죠.
물타기로 봅니다. 자기 회사 소속 변호사중에 노무현을 수사한 중수부장도 있는데 그 회사 대표까지 한 양반이 이제 와서 노무현이 그립다는 소리를 이렇게 뻔뻔하게 쓰는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정권에 붙어서 수익을 극대화 시킨 경험이 있어서 그게 어느 정권이든 또 붙고 싶은 심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소속 변호사면 말을 안하겠는데 ‘대표’까지 한데다 ‘위원장’까지 하신 분이라.
(그나저나 시사인 김은지기자 ㅋㅋ 낯익은 이름..)
그가 죽은 건 우리가 괴롭혀서가 아니라 본인이 유약해서였고
우리는 그를 위해 울어줬으니 그가 죽은건 우리 책임 아니다
곰곰히 되씹으면 적폐들 면피용 발언이라 욕나오는 말이긴 한데
저게 그 당시 노무현 욕하고 이명박 뽑은 국민들 공통의 감정이 아닐까 합니다
죽을 줄은 몰랐다 미안하다
거기서 끝냈는지 부채의식을 느끼게 되었는지 차이가 있겠죠
허나 취임식에 안 간 이유는 별로 와 닿지 않네요.
딸이 그렇게 물었다는게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무려 '바른'에 몸 담고 계신 분이
대통령 취임식과 딸 졸업식에서 고민하실 것 같지도 않고요.
그냥 본인이 안 간거라고 하는게 솔직한 이야기 일 것 같습니다.
만약 아직도 개누리당 정권이었다면.. 저런 글은 세상에 안 나오고 마음 어느 구석에만 있었겠죠.
저런 사람들이 죽은 고양이가 아니라, 산 고양이가 되어서.. 계속 선한 쪽으로 살아가게 하려면
결국 총선에서 개누리 잔당들을 확실하게 짓밟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조중동과 일베 박별도..
news.joins.com/article/3209511
들어오는 사건 마다할 수 없는 노릇이고, 법인 내 수많은 변호사 가운데 일부가 수임한 사건일 뿐이긴 하지만...그래도 거기서 시선이 멈추네요.
정말 소름이 돋습니다. 세탁기 정말 엄청나게 돌리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