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기회가 되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좀만 읽고 덮으려 했는데, 우연히 빈 시간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528쪽 분량의 책이지만, 의외로 빠르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와 이승만에 대한 평가처럼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일제 강점기 일본에 징병됐던 조선인(중 전범 재판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관점처럼 한국인이기에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짚어준 대목도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의 논조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품었던 기대보다는 좀 보수적인 편이어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조금 더 많았다고 해야겠네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실망했던 부분은 보수적이다 어떻다를 떠나 한국에서 36년이나 살았다고 하는 저자의 한국에 대한 이해가 놀라울 정도로 피상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조갑제의 글을 볼 때 분노하지만, 그의 한국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진 않죠. 그런데 마이클 브린은… 한국에서 36년을 살고, 외신기자로서 (일반 외국인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지식, 경험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겨우 이 정도?”라는 느낌입니다.
그런 피상적인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논쟁점들에 대해 자신만만하게 결론을 내려놓으니, 두 배로 우스울뿐더러, 한국에 처음 와본 사람들의 ‘좋아요~, 나빠요~’ 수준의 인상비평보다 더 질이 안 좋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마이클 브린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서른이었습니다. 그가 특별히 둔감하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고 가정하고, 역지사지를 하자면 이런 이야기도 되겠네요. 내가 어떤 외국에서 30년을 살았더라도 내가 그 나라에 대해 가진 이해는 이 정도로 피상적일 수밖에 없겠구나. 그 나라 사람이 보기에는 어쩔 수 없겠구나……. 가 되리라는 점 말입니다.
이왕 저격(?)성 글이 된 김에 한 가지 더 짚어봅니다.
책 전체의 논조, 어조를 볼 때 마이클 브린은 한국의 민주주의, 한국인의 민도(별로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에 대해 상당히 내려다보는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영국인 외신기자로서 말이죠. 네, 그가 첫 번째 책인 「한국인을 말한다」를 냈을 때가 1999년 이었습니다. 그 때라면 (아직은) ‘내려다보기’가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김대중이었지만 선출된 권력이라는 점을 빼면 여전히 권위주의적 지도자이긴 했죠.
하지만 2019년 지금 시점에서 고작 영국인(…) 외신기자일 뿐인 마이클 브린이 한국에 대해 그런 관점을 취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국의 민주주의 수준, 영국의 시민의식, 국가적 위기내지 논란을 맞은 영국인들이 보여준 지리멸렬한 대응들을 볼 때, 그 우열은 뒤집어졌거든요.
마이클 브린은 2016년 촛불시위와 여기에서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일련의 흐름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제기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네, 관점에 따라선 비판적일 순 있죠. 하지만 비슷한 급의 사건이 영국에서 일어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도 인정했듯이) 문제의 당사자는 각종 법적 논란, 절차적 논란의 옹위 아래 상당기간 현직을 고수했을 것이고, 그와 함께 영국의 거리에선 시위가 일어났을 겁니다.
시위와 함께 약탈, 방화, 파괴, 폭행 및 각종 범죄가 거리를 휩쓸었겠죠. 영국 정치인들은 민의에 (신속하게) 응답하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 시민들은 그 분노를 정치인과 제도 권력에 더 깊숙히 찔러 넣는 대신 주변의 상점을 털고, 유리창을 깨고, 민간 차량을 뒤집고, 불을 지르고 행패를 부리는 것으로 풀었을 겁니다.
물론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겠죠. 브렉시트 처럼.
……
마이클 브린은 영국인입니다. 그는 1982년에 영국 언론 ‘가디언(The Guardian)’지의 한국특파원으로서 한국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전두환이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입니다. 1982년 당시의 영국 기자가 보기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수준 낮고, 한국의 사회가 얼마나 야만스럽게 보였겠습니까.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이클 브린이 한국에 오기 바로 1년 전, 영국에선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단식투쟁’ (1981.3.1.~1981.10.3.) [link1], [link2]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1981년 3월 1일, 감옥에 갖힌 북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이 수감자의 지위를 정치범으로 변경해달라는 요구를 걸고 단식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8개월에 걸친 단색 투쟁 끝에 (단식 투쟁이 시작된 후 치러진 총선에서 영국 하원에 옥중 당선된, 그러나 정부에서 투표 결과까지 묵살했던) 투쟁 지도자 바비 샌즈를 포함해 10명이 차례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영국 정부의 뚜렷한 양보 없이 10월 3일 단식 투쟁이 종료되었을 때 영국 언론들은 일제히 영국 정부를 찬양하고 나왔습니다. 마이클 브린이 몸담고 있던 가디언지 또한 이렇게 말하며 그 대열에 있었습니다.
“The Government had overcome the hunger strikes by a show of resolute determination not to be bullied”
“정부는 꺾이지 않는 단호한 의지로 단식투쟁을 극복해냈다”
단식 투쟁 자체로 10명이 죽었을 뿐더러, 이 시기를 전후하여 북아일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격화로 죽은 사람의 숫자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죽은 사람의 숫자와 비교해도 그다지 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