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무감 때문인지 몰라도,
PC통신 시절부터 매년 5월 18일 즈음 1년에 한 번씩 이 글을 올려왔습니다.
초창기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천리안 게시판에 이 내용을 올리면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같은 일을 겪은 분과 공감해주시는 분들 반
거짓말 하지 마라, 거기가 무슨 전쟁터냐,
람보라도 누볐겠네라며 비아냥 거리는 사람 반
(이제라도)
시간이 흘러 이젠 비아냥 거리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분위기가 조금씩 조성되어가는 것에 큰 위안을 받습니다.
이에 5월 18일 즈음 올리던 글을 이렇게 또 올려 봅니다.
1980년 5월 18일 즈음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18일 몇일 전으로 추정합니다)
저는 광주 동구 소태동(지원동)쪽 용화정사 라는 절 가까이에 살았습니다.
근래에 가보니 그 절 주변이 다 도로가 놓였지만, 518 당시만 해도 거기 산이 있었지요.
아버지는 타지에서 일하던 중이셨고,
집에는 주부인 어머니와 여고생인 이모님과 그리고 어린 꼬꼬마 저, 이렇게 셋이 있었습니다.
고교 졸업반인가 졸업한 후였던가 그 즈음의 외삼촌이 계셨는데 고향 친구 배웅한다고 공용터미널에 배웅나간 상태였습니다.
(이 부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광주시장이 스피커로 집 밖에 나오지 말라고 방송했고, 동내 사람들 사이에선 전쟁난다고 몹시 불안이 고조되었다고 하시더군요.
(여기서부터는 저도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께서는 무슨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필수품을 사놔야한다시며 저를 데리고 동네 슈퍼에 갔습니다.
돌돌이 화장지 여러개, 통조림 캔 여러개, 삼양라면 두어박스, 양초, 성냥, 쌀 등등을 바리바리 사서 저도 낑낑 거리며 들고 집에 와서 어머니를 도와 다락방에 사온 물품들을 올려넣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녁 4~5시 즈음이었던것 같습니다.
집이 2층짜리 옛날 양옥집이었는데, (지금도 그 동네에는 그 때 그 집들이 그대로 많이 있더군요. )
방에만 있기 답답하다고 어머니는 스테인리스 쟁반에 과일들을 좀 깎아서 1층과 계단과 2층 계단 중턱 공간에 의자를 3개 놓고 여고생인 이모님과 마주보고 앉아 가운데 의자에 과일 쟁반을 놓고 과일을 드시며 그렇게 "집 안에서"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저는 마당에서 놀고 있었죠.
그 때,
어머니와 이모님 사이 가운데로 총알이 날아갔습니다.
무슨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집 밖에 나와있던 것도 아니고,
가정 주부와 여고생이 집 안 계단 중간에서 과일 먹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총알이 밖에서 날아온 겁니다.
(전 이 부분 때문에 제 면전에서 폭도 운운하는 자들이 있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주먹 날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님은 엄마야...라고 외치시며 신던 슬리퍼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황급히 계단을 내려와 마당의 저를 낚아채듯 껴안고 방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문고리를 잠그고(사실 이거 성인 남성..군인...이 발로 한번 차며 부서질 그런 문입니다)
방 구석에 저를 놓고 가구에서 겨울 이불을 꺼내 절 덮히고,
그 위를 이모님이 몸으로 감쌌고,
그 이모님을 또 다른 겨울 이불을 꺼내 덮히시고,
어머니 당신도 다른 두꺼운 이불을 꺼내 이모님 위를 몸으로 감쌌습니다................이 장면이 여러분들은 상상이 가시나요?
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너무 무서웠습니다.
왜냐면 밖으로부터의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거든요.
저쪽 도청에 가까운 쪽 동네 입구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하며 저희 집 근처쪽으로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가
그 반대쪽으로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3, 4분쯤 뒤에 이번에는 "타탕! 타다닷 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한 무리가 앞서 간 무리를 쫓는듯이 들려왔습니다.
그러기를 두어 차례..
밤새도록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총소리를 아주 늦게까지 계속 들렸습니다.
이른 새벽녁까지 그렇게 방 구속 이속에서 숨어 덜덜 떨고 있다가 어린 저는 스륵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이었고,
친구 배웅 나갔던 외삼촌은 얼굴색이 사색이 되어 언제 들어왔는지 집에 와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외삼촌은 공용터미널(오래전에 이건 없어졌고, 이젠 유숙헤어 라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알려진 엄청 큰 터미널이 있죠)에 고향 친구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왠 군인이 곤봉 휘두르며 이리 오라며 잡으려고 하길레 냅다 뛰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 외참손은 최민수 스타일로 엄청난 운동신경의 소유자로 쓰레빠에 츄리닝 바지 차림이었으나 바람처럼 내달려,
조선대학교 뒷산으로 해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겨우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삼촌의 운동신경을 알기에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잡혔을거라 생각합니다.. 그 때 외삼촌은 최민수 전성기 때 모습이었음)
몇 일이 지나서,
어머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대문을 살짝 열고 빼꼼히 동내 거리를 내다봤습니다.
지나다니는 사람 한명 없는 동내....
조심스레 나와서 동내 앞에 나와 봤더니
동네 거리 바닥 여기저기 핏자국들... 그리고 탄피...
좀 있으니까 언제 날 봤는지 친구들이 하나 둘씩 나오더군요.
그 녀석들과 탄피를 찾아 주어서 보던 기억이 납니다.
아! 하나 더,
당시 구멍가게는 긴 직사각 형태의 나무 틀에 양철판을 덧댄것을 가게 샷다로 썼었는데,
그 양철문 여기저리에 총알 자국들이 있어서 친구들과 그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한 기억이 납니다.
몇 달이 흘러,
아버지가 부산에서 일을 하셔서 아버지 보러 부산에 갔다가,
부산의 지인분들께 그 이야길 어머니와 제가 해드렸는데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으시더군요.
그런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어디있냐고....
부산에서 아버지 뵙고, 일 다 본 뒤 광주로 돌아올 때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납니다.
이제 어디가서 518 광주 이야기 절대 하지 마라. 알겠니?
누가 물어봐도 저는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렇게만 말하고 얼른 도망가야 한다..........
여기까지가 제가 격은 저의 518 입니다.
다행히 제 가족과 친척 중에 해를 입은 분은 없으나,
저러한 일을 겪어서인지 영화 꽃잎 이후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를 선뜻 보질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아직껏 화려한 외출, 택시운전사....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본다하더라도, 논스톱으로 엔딩까지 볼 자신이 없습니다.
어리둥절하고, 무서워서 덥다는 생각도 못했네요.
저는 용화정사와 남국민학교(초등학교) 중간 정도 위치에 당시 살았었습니다.
나중에 대학가서 비디오 보고 엄청난 정신적혼란을 겪었습니다.
대학을 서울에서 다녔다 보니 아무래도 전국 각지 학생들이 많이 모였는데 광주는 폭동분자들이라고 강력 주장하던 경상도 대학 동기를 망월동 묘지(518기념관) 데리고 가서 사진과 영상 자료를 보여주니 데꿀멍 하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자료를 이렇게 손쉽게 찾아볼 수 있게된지 10년 정도 밖에 되질 않았죠..
인터넷 발달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타향살이 하는 친구들에게 고향이 어디냐 굳이 묻지 않아도 말투나 대화를 통해 대개는 저절로 알게 되는데요, 졸업할 때가 다 되어서야 몇몇 친구들의 고향이 광주라는 걸 알고 공교롭게도 다 광주라는걸 인지하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518뿐 아니라 정치관 심지어 고향이 어디인지조차... 얼마나 조심하고 살아야 했을까 얼마나 마음 조리고 살아야 했을까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더군요.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마라,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마라
그 친구들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겁니다.
타지에 나와 전라도 타령 빨갱이 타령이라도 한 번 듣고 나면 어디까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을테구요. 어쩌다가라도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던 친구들의 이면엔 그런 과거가 있었을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오늘 아침 YTN에 전 새누리당 의원이라는 여자가 나와서 하는 말이,
국민들이 존경해야 할 유공자인 518 유공자 명단을 만천하에 공개하자. 자랑스러운 일 아니냐...라고 할 때..
전 이 부분이 가장 먼저 생각났습니다.
유공자 및 유족분들에겐 아직도 두려움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걸 만든 자들의 계보를 잇는 자들이 명단 공개......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럴 의무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심정적으로도 그래서는 안됩니다.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피해자를 짓밟더라도 성에 차지 않을 이들입니다.
자기들의 속이 허한건 사람이라면 가지지 못할 메꿔지지 않는 구멍이 저들 속에 있기 때문이라는걸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요구예요.
그게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걸 인정받기까지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당시 공용터미널은 대인동 버스터미널(지금 광주은행 본사, 롯데백화점) 아니었나요? 대인동 부지 팔고 광천동으로 옮겨서 유스퀘어 생긴 줄 알았는데...
어릴 때 대인동 버스터미널 갈 때마다 518 유가족 또는 관련 단체에서 518 사상자 사진을 크게 인쇄해서 출입로 주변에 전시해 두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세월이 흘러 언론이나 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상당히 완화(?)된 사진들만 올라 오더군요. 518에 대해 헛소리 하는 작자들, 툭하면 전쟁하자는 미치광이들에게 그런 사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걸로 광주에 연루된 모든 인간들은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518 이후 세대들에게 전달되거라 생각합니다. 영화와는 또 다른 생생한 증언이니까요.
저는 그당시 태어나진 않았고,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518 공원묘지가 생겼을때 제가 중학교 2학년이 었는데, 학교에서 답사숙제를 내줘서 방문했었어요.
거기 가서 본 영상들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었죠.
아직도 그날 청동판 가운데 누군가 넣어둔 백합(국화였던것 같기도 하네요) 한다발이 기억납니다.
광주 시민들을 폭도라니 북한군의 내란이었다느니 하는 말은 진짜 기가 막힙니다.
슬픈 역사에 대해 아직도 망언을 일삼는 자들은 그 누가 되었든지 강력하게 규제해야 합니다!
눈물나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고..
감정이 복잡하네요. 휴~ㅅㅂ
제 친구 아버지는 518 당시 군인들에게 맞아서 오랜 기간 편찮으시다 돌아가셨어요. ㅜㅜ
그 당시 용봉초 옆에 (지금도 있지만) 광주역으로 들어가는 철길이 있는데,
그 철길에서 광주역 쪽으론 군인들이 지키고 있고, 용봉초 너머 쪽으로 시민군이 대치하던 걸 직접 봤던 게 기억나네요.
518이 지나고 상무관 옆을 지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울음소리가 가득했던 기억도 납니다. ㅜㅜ
그 당시 저희집은 광주일고 건너 충장로에서 음식점을 했습니다.
저는 나이가 너무 어려 기억이 흐릿하지만 어머니가 방에 이불을 걸어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기지 못하게 하신것이 기억이 납니다.
도청과 가까워 총소리가 아주 많이 났고 근처 사시는 이모네 집 가는 골목길에는 총알 구멍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희 가게 주방장 아저씨가 가게 앞에서 군인들이 여자 끌고 가는걸 막으시다가 많이 맞아서 다리를 저시는데 지금은 유공자 인정이 되었더라구요..
그 주방 아저씨께 경의를 표합니다.
사실 처음엔 저도 못 믿었습니다.
전라도 빨갱이 타령은 어렸을때부터 들었고(아니 왜?..란 생각은 들었지만 어린 애가 어른한테 따져물을 일도 없었고) 제가 다녔던 대학이 최루탄 꽤나 터지던 학교여서(영화 1987 배경입니다) 그 대학 공과대학 학과장을 맡고 있던 엄마의 바로 아래 남동생이였던 큰외삼촌이 저에게 빨갱이짓 하지말고 공부만 하라고 신신당부 했거든요.
말로만 듣던 빨갱이가 학교에 많은건가?..정도의 생각이었죠..
하지만 91년 봄 캠퍼스는 아무리 빨갱이 타령을 듣고 자란 부산출신 촌놈도 아..이건 좀 문제가 있구나..라고 금방 느낄 수는 있는 정도로 하루가 멀다하고 분신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이 대자보를 가득 채울 정도였습니다.
20년이 훌쩍넘어 30년이 되어가는 데 가장 친한 친구는 광주출신이고 가장 친한 후배도 광주출신이네요 ㅋ
80년 광주 이야기를 그들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고 물어보지도 않겠지만 저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빚을 지고 살고 있다고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갸들이 술도 많이 사주기 하구요 ㅋㅋㅋ 학생땐 제가 좀 더 사는 편이었는데 둘다 저보다 지금은 훨씬 잘삼요 ㅋ)
기독병원 가까운 동네로 이사 갔었는데
병원에 사망자,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복도나 빈공간에 가득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시신 썩는 냄새가 동네까지 넘어올 정도였다고 아주머니들끼리 얘기하는 걸 들었구요.
전학 가게된 국민학교는 계엄군의 주둔지겸 진지였고
사직공원쪽(학교와 1km 남짓 거리가 될 듯)에 무장한 시위대가 있어서
자주 총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밤에 총알이 가정 집 위로 날아다녔다고 같은반 친구에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동네 아저씨들끼리 하는 말중에 기억에 남는것이
머리에 총격을 당한 무장 시위대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두개골이 없거나 반 이상 손실된 시신을
전남대병원 부근에서 많이 봤다는 겁니다.
광주는 제가 국민(초등)학교에 전학을 가서 대학을 다닐 때까지도
인근에 위치한(정확히는 어디인지 아직도 모릅니다.) 7공수부대가
광주로 외박이나 외출을 못했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의 공수부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굉장했었습니다.
찢어진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는
자한당 폭도들 생각하면 열불이 나네요
서울와서 사회생활하며 술마시다 얘기 꺼내니, 폭동이다라는 의견듣고
이건먼가? 라는 충격적 생각이 맴돌았었었죠...
88년 광주에 내려갔을 때, 톨게이트부터 많은 분들이 손 흔들어주시고, 시위가 끝나갈 무렵 포장마차에 들어가서 배고픔을 달래려 할 때, 저희 목소리가 외지인임을 아시고, 당신들과 공감하기 위해 내려와서 시위한다고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고마워 하시던 분들의 마음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지금의 망월동 묘지말고,,, 그 때의 망월동 묘지는 정말 슬픔이 가득하고, 그 때 모두가 함께 울려는지 비도 함께 억수로 내려 울어주던 기억이 제 어깨에 그대로 여전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어느 정도 컷을 때, 가족이 들린 그곳은 단장이 되어,,, 그 때의 느낌을 바로 가질 수 없었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 기도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가오는 총선에 꼭 자한당, 바미당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 때 떠나셨던 넋들이 바라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단초를 만들어야 겠습니다.
전 518 이후에 태어나 경험은 없지만 억울한 기억은 많아요.
대표적인게 대학가서 신입생 환영회 때 광주에서 왔다고 하니 대구에서 온 놈이 눈 크게 뜨고 한마디 하더라구요
"빨갱이 새끼네"
작은아버지 주월동에 있었는디 한창 대학생이라 잡혀갈까봐 경찰차 보내서 잡아다가 무등산 자락 암자에 몇일 가둬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군대시절 특전교육단에서 근무할때 5공수 지금은 특임단에서 근무했던 원사님께 질문한적이 있습니다. ㅎㅎ 대답은 니옆에 있는 전우가 총맞고 있는데 넌 어떻게 할래? 였습니다. 다시 되묻고 싶네요. 니가족이 총맞고 있는데 넌 어떻게 할래?
잘 살고있는 누구를 볼때면 토할것 같고 엿같은 현실이 개탄스럽네요.
미얀마 영상 사진보니 똑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