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
집권 이후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진 박정희 정권은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졌고, 정치 자금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무의미한 건설 사업을 벌여 공사비를 착복 하는 것이었다.
공사판을 벌이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군사정권은 마침 당시 미군들이 휴가때가 되면 휴양지를 찾아 대부분 일본으로 여행하는 것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엔 이렇다할 윤락시설 이 없었기 때문에 휴가를 맞이한 주한 미군들은 한국에 남아 달러를 소비하는 대신 일본 등 해외로 나가 달러를 소비하였다.
미군은 미군 나름대로 비용이 많이 들었고, 한국 정부도 정부 나름대로 미군의 달러가 자국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해외에서 소비되는것에 못마땅해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 는 외화벌이의 명분 을 내세워 윤락시설을 구상한다.
윤락시설의 이름은 얼마 전, 한국군 운전병의 실수로 죽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 로 정했다.
군사 정부의 워커힐 공사 계획이 발표되자, 62년 봄 , 일본의 주간지 들은 앞 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국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 고 보도했다.
미국 언론 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 카지노, 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 고 보도했으며,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커힐은 원래 목적인 미군 장병 유치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며, 그 대신 박정희가 기생 파티를 위해 자주 이용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부터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었던 워커힐은 1961년 9월 부터 착공에 들어가 11개월만인 62년 12월 26일 완공이 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워커힐의 공사 과정과 공사에 투입된 비용에 있었다.
1961년 9월, 군사정권은 워커힐을 짓기 위해 성동구 광장동 부지 18만 평 을 수용했다.
이때 워커힐 부지는 원래 '대한전선그룹'으로 유명한 설경동 회장의 땅 이었다.
그는 당시만 해도 10대 재벌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을 앞세워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은 국가 명의로 설경동의 부지를 헐값 으로 사들였다.
워커힐 건설사업에는 중앙정보부의 석정선(중앙정보부 제 2국장), 김용태(중앙정보부 경제고문) 등이 개입했다.
이들은 교통부가 워커힐 건설을 주관토록 조처했는데, 교통부 장관 박춘식 은 워커힐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부진해지자 워커힐 이사장인 임병주(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 1과장, 중령)에게 정부주식 출자금 5억 3천 600만 원을 건설자금 명목 으로 빌려주었다.
정부가 아직 공사에 드는 비용도 책정되지 않은 시점에 가불 형식으로 거액을 빌려 준 것은 야당 의원들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건설을 위해 투입된 비용 은 2억 8천만 원(220만 달러)에 불과 했으며, 이는 형무소 죄수들과 각 군의 공병들의 무상 노역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부족한 장비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서 지원 받아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워커힐 공사에 필요한 일본제 수입품에 대하여 관세를 물지 않았는데 , 그렇게 무대 장치로부터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일제품을 수입하면서 중앙정보부는 무관세 무검사로 도입하여 150만달러(2억여원)의 부당이득 을 취했다.
그런 까닭으로 애초 서울대 공대 교수나 외국 건축가들이 800만 달러에서 1000만 달러가 소요될 거라고 예상한 워커힐 건축을 불과 220만 달러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4,158대의 각종 장비와 연인원 24,078명을 무상 노역 시켰으며, 건설비 명목 으로 책정한 5억 3천 600만원 중 실제 공사에 투입된 2억 8천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2억 5천여만원(현재가 약 10조원)을 착복 했다.
참고로 1963년도 한 해 국가 예산이 768억원이었다.
매춘굴을 짓는데 한 해 국가 예산의 0.6%인 5억원의 거액을 투입한 것이니,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0조원 을 투입한 셈이다.
희대의 개XX
청와대에 비아그라... 주사제 등등..
그것도 일본인스러운 이름으로는 모자란다고...
오카모또 미노루로 다시 개명했다지요~
아직도 못 잊는 노인들을 보면......
반인반수 아니던가요?^^*
그래서 안정 안되게..
야합니다. 모토 자체가 야함을 대놓고 승부하더군요 북한도 곧 저렇게 돈 벌려고 하겠지만(관광이 제일 쉬운 산업인 만큼) 우리가 당시 현재 북한 이하였던 사실의 근거인 곳 같습니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 일베 그룹 싫어요(댓글 서명)
죽고나서 모공에서도 소수의견이지만 죽은사람에게 예의 차리라는 의견 있었는데
저렇게 재산 뺏긴 분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역사가 증명해주는군요.
그래도 좋다는 사람이 있으니..
청와대 ~ 워커힐까지 복잡한 도심을 신호 걸리지 않고 바로 통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울집 근처인데 ㄷㄷ
단순 곱하기 나누기가 아니라
대한 제지는 광장동 광나루역근처에 사옥건물 아직 있답니다..왠지 계열사이지 않을까싶네요.
개새X
기생관광을 애국이라 표현하더 위정자들에게 그게 애국이면 당신 딸부터 내놓으라 했다고 합니다.
아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의 콘텐츠인데 이 글과 더불어 읽어볼만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http://archives.kdemo.or.kr/contents/view/283
적지 않은 나이를 먹어보니, 그 시절 어려운 경제에 돈이 돌게 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시의 큰 손은 미군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큰손들이 한국에서 돈을 안쓰고 원정을 나가서 돈을 쓰니 그걸 보는 입장에서는 배가 엄청 아팠겠죠.
빈곤국/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는 수단/방법은 중요치 않습니다. 우선은 시장에 돈이 풀리게 해야죠.
돈을 풀리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원초적인 방법은 큰손들의 성을 자극하는 겁니다.
어쨋건 한국 경제 암흑기의 흑역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의 빈곤국/개발도상국도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지요.
저 역시 박통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깔 때 까더라도 현재의 잣대에 맞춰서 너무 치우친 시선으로만 보지말자는 뜻에서 몇 줄 남겨봅니다.
배고파서 굶어죽은데 뭐 그까짓게 대수냐 라는 논리인데 겪어 보지 않이 모르겠지만 이게 최선이었을까 싶습니다 매춘 전쟁 도박 학살 이게 최선이었을까요... 저는 우리 나라 국민의 특유의 부지런함과 영민함이 괜찮은 지도가 있었으면 이런 고단한 방법이 아니어도 충분히 이만큼 성장했을거 같네요
중간에 지도자,?개늠들이 착복한 금액만 잘 굴렸어도 ... 그게 얼만가요
한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생각이 아닌 행동이라고 하지만 결국 생각과 행동은 엮여있지요.
시궁창같은 에피소드만 나오네요
앞에 무희들이 상의 탈의하고 춤을...
유서깊은 전통이 남아있던 거군요.
총을맞고
죽은 인간에 대해
미화하는 현재풍토가 더 무섭습니다
저때야 박통이라지만
지금은 난리도아니겠지요
이도저도 아닌...
그때에는 딸자식이 귀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까.
박정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요?
당시 달러를 벌 목적이긴 했지만, 그게 장사가 안되어서 실패했으므로.그래서 이익금의 사용처를 알수 없으므로 박정희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군요.
하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어요. 월남전. 똑같은 질문을 할수 있고요. "리더는 왜 명분도 없는 남의 나라 전쟁에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바치도록 결정했는가?"월남전의 경우에는 데이터가 더 있습니다. 프레이저 보고서에 따르면 ㅡ 미국이 한국의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사용한 총금액은 약 10억 달러. 이 중 9억2500만 달러가 한국의 외화보유액으로 비축”며 “한국 정부는 미국이 한국군에 제공한 참전 병사들의 급여를 편취했다. 돈은 정부로 송금됐지만, 군인들에게 지급된 수준은 낮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이 돈이 다 어디로 갔을까요?
프레이저위원회에서 일했던 조사관과 당시 중앙정보부 해외 요원이었던 사람 등 관련 증언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빼돌린 군인들의 참전 수당 대부분이 스위스의 박정희 전 대통령 비밀계좌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의혹은 더 이상 의혹의 수준이 아닙니다. 박정희라는 리더는 사리사욕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었던거에요.독일 광부/간호사의 임금 착복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죠. 길어지니깐..다른 사례들로부터 추정하건데. 워커힐이 성공했다면. 그 이익금의 대부분은 박정희 스위스 계좌로 갔을지 모릅니다. 확실지 않지만.
그리고 리더들이 왜 저런 선택을 했고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보듬어 주는 생각으로 살펴 보는건 어떠냐고요?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누구를 보듬으라는 것인지. 나는 당최 알수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