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런 적 없습니다.(...)
세종 시기 이종무 장군 등이 군사를 끌고 가서 공격은 했습니다.
근데 그게 다예요.......
(태조 이성계 시절에도 공격은 했지만 실패했죠.)
사실 처음엔 이겼지만(근데 이때 대마도의 주력은 요동을 약탈하러 떠났습니다. 이 주력이 충청도를 약탈하기도.....) 결과적으로는 패배 후 포기했고, 이후 외교적으로 대마도주가 화의를 청한 식으로 마무리 된 겁니다.(...)
이것 때문에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삼배구고두를 했으니 한반도는 청나라 영토였다는 것과 다를 바 없죠.(...)
대마도에서요??
함경도도 대마도 왜구들에게 자주 털렸었죠.
요동 치러 갔다는 근거가 있나요??
요동이 만주 쪽인데
물자가 많은 남쪽 다 내버려두고 요동까지 원정을 갔다는 거 자체가 이해가 안되서요
당장 고려 말 왜구의 침략과 관련된 지도만 봐도 평안도 끝, 함경도 끝까지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요동 부분도 잘 보시면 색이 칠해져 있습니다. 왜구가 나타나 약탈을 했던 지역이라는 이야깁니다.
그 부분은 님이 상상한거로 봐도 되겠네요
세종대왕실록에 대마도 도주가 항복하고 신하가 되기로 맹세했다는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419년(세종 1) 5월 왜구는 50여척의 왜선을 이끌고 충청도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는 등 노략질을 하고 이어서 황해도 연평도를 재차 침입한 후에 요동반도로 진출하였다. 이른바 비인현왜구사건이었다. 대일강경책을 취해오던 상왕(上王) 태종은 이 사건으로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에 되었다. 왜구의 근거지를 토벌하여 우환의 뿌리를 뽑겠다는 목적 외에도 왜구의 주력부대가 요동을 향한 틈을 타 대마도를 정벌하면 승리 가능성이 높고 정벌전의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정벌전을 결행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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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국사 콘텐츠(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입니다.
그리고 그 실록 자료 이후를 보면 패전임이 명백합니다.(아마 승전이라고 거짓말했다가 처벌이 논의된 적도 있을걸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갔지만 말입니다.)
[[좌군 절제사 박실이 대마도에서 패군할 때 호위하던 한인(漢人) 송관동(宋官童) 등 11명이 우리 군사가 패하게 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으므로, 중국에 돌려보내서 우리 나라의 약점을 보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는 좌의정 박은의 상소입니다. 대마도에서 패전했다는 이야기고, 이후 외교적으로 마무리 한 거죠.
외교적 마무리라도 대마도주가 화의를 청했으니 우리 땅이면, 한반도는 인조 이래로 계속 중국땅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역사교과서 문제 이후로 신뢰 안합니다
뭐 그래도 안믿으시겠다니, 귀찮지만 실록 내용을 첨부해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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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월 11일에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 이사검이 만호 이덕생과 함께 병선 5척으로써 적을 해주의 연평곶이[延平串]에서 엿보고 있을 때, 적선 38척이 짙은 안개 속으로 갑자기 와서, 우리의 배를 에워싸고 협박하여 양식을 구하며, 사검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선을 목적하고 온 것이 아니라, 본래 중국을 향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마침 양식이 떨어졌으므로 여기에 왔노라. 만일 우리에게 양식을 주면 우리는 곧 물러가겠으며, 전일에 도두음곶이에서 싸움한 것은 우리가 먼저 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대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들을 하수(下手)하기에 부득이 응하였을 뿐이라.’ 하니, 사검이 이에 사람을 보내어, 쌀 5섬과 술 10병을 주었더니, 적은 아무런 고맙다는 말도 없이 도리어, 보낸 사람을 붙잡고 양식을 더 토색질하거늘, 사검이 진무(鎭撫) 2인과 선군(船軍) 1인을 보내어 쌀 40섬을 주었으나, 적은 이속(吏屬)과 진무는 보내면서, 또 선군(船軍)을 잡아두고 사검과 서로 대치하고 있거늘, 성달생이 경기(京畿) 병선이 역풍(逆風)으로 인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말하고, 이에 역마를 빨리 달려 황해도의 병선을 타고 가려 했으나, 가서 본즉, 그 배는 매우 적은 데다가 이미 사검 등이 타고 있어서, 달생은 할 수 없었다."
하므로, 상왕과 임금이 심히 근심하여, 곧 대호군(大護軍) 김효성(金孝誠)은 경기·황해도 조전 병마사에, 전 예빈 소윤(禮賓少尹) 장우량(張友良)을 황해도 경차관(敬差官)으로 각각 명하고, 인하여 효성은 별군 약장(別軍藥匠) 20인과 우량은 30인을 거느리고 즉일로 떠나가게 하고, 임금은 수레를 몰아 환궁하여서, 또 이지실을 황해도 조전 병마 도절제사에, 김만수를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로 삼으니, 그때에 만수가 죄로 인하여, 평안도 정주에 와 있었으므로, 지인(知印)을 보내어 유시(諭示)하였다. 박은·이원 및 조말생·이명덕을 대궐로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섬멸한 뒤에 물러서서 적의 반격을 맞을 계책을 밀의하고, 밤늦게야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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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兩上)이 유정현·박은·이원·허조(許稠)들을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것이 좋을까 어떨까."
를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허술한 틈을 타는 것은 불가하고, 마땅히 적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 유독 조말생만이,
"허술한 틈을 타서 쳐야 합니다."
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금일의 의논이 전일에 계책한 것과 다르니,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처자식을 잡아 오고, 우리 군사는 거제도에 물러 있다가 적이 돌아옴을 기다려서 요격하여, 그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와 배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구류(拘留)하고, 만일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베어버리고,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만은 구류하여 경동(驚動)하는 일이 없게 하라. 또 우리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은 불가하니, 후일의 환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하고, 곧 장천군(長川君)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명하여,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이숙묘·황상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과 하번 갑사(下番甲士), 별패(別牌), 시위패(侍衛牌) 및 수성군 영속(守城軍營屬)과 재인(才人)과 화척(禾尺)006) ·한량 인민(閑良人民)·향리(鄕吏)·일수 양반(日守兩班) 중에서 배 타는 데 능숙한 군정(軍丁)들을 거느려, 왜구의 돌아오는 길목을 맞이하고, 6월 초8일에 각도의 병선들을 함께 견내량(見乃梁)에 모여서 기다리기로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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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세종 1년 5월 13일 기사입니다. 충청도에서 '중국(요동)'을 공격하러 가던 대마도 왜구들을 만났다는 이야기죠.(5월 11일에 왜구들과 마주침)
두번째는 세종 1년 5월 14일 기사입니다. 이 내용을 들은 양상(태종, 세종)이 이 틈을 타서 대마도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깁니다.
왜 자꾸 이상한 긴글 퍼오세요
1. 세종 1년 5월 11일, 충청도에서 중국(요동)을 치러 가는 왜구들에게 쌀 40섬을 주어 보냈다.
2. 세종 1년 5월 13일, 이 내용이 한양으로 전해졌다.
3. 세종 1년 5월 14일, 태종과 세종이 이 틈을 타 대마도 정벌을 지시했다.
저 긴 글 읽기만 해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저기가 젤 많이 약탈된 지역이에요
님은 저기 놔두고 왜구가 요동까지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는거구요
이글 어디에 요동이 있나요
조선 세종 1년이면 1419년입니다. 1419년 6월엔 망해과 전투가 있었고, 그 전투가 바로 요동에서 일어난 전투입니다.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하던 것과 시기가 겹쳐요.
사료는 복합적으로 읽어야 하고, 당시 왜선들의 집결 장소가 요동의 망해과였음을 생각하면 저 중국이 요동인 건 당연한 거죠.
무엇보다 왜구들이 요동에 갔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던 분이, 망해과 전투라는 역사적 사료를 제시받은 후에도 입장을 유지하시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지배했던 적은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그 태종의 주장도 '우리가 그 땅 예전에 포기했다' 라는 내용이라 우리 땅이라는 주장도 아니죠.(...)
굳이 따지자면 유럽의 '데쥬레' 개념을 주장한 정도라고 봐야 할 겁니다.
영토로 수정하겠습니다.
양국 어느 정부도 실효지배를 못했던...
그 땅의 사람들을 싹 잡아 죽여야 정벌인가요? 아님, 상대방 우두머리 목을 잘라야 정벌인가요?
중앙집권제였던 조선이 직접 관료를 파견하지 않고 대마도 도주에게 행정을 일임했고
막부 역시 조선조정과 커넥션이 있는 대마도주를 실권자로 인정합니다.
거기다 말그대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였던 조선이 대마도 보다 더 멀었던 제주도도 직접통치를 했는데 대마도는 공물받고 간접통치했다는건 말이 공물받았다는거지(우리가 중국에 공물보낸 것 처럼) 사실상 남의 땅이었다는거죠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