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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그리스 비극: 군부독재 그리고 민족주의의 허망함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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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4 20:45:40 122.♡.206.43
Santacroce

이번 글은 그리스 현대사에 관한 7번째 글로 1949년 그리스 내전 후에서 군부독재 그리고 터키와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변부 국가의 피할 수 없었던 운명(?): 가장 어두웠던 10년의 상처

 

명분에서 그리스 공산당(KKE)에 크게 밀렸던 영국과 미국의 그리스 정부 지원은 어떻게 보면 다른 발칸 국가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블록의 사회주의 국가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를 억지로 자본주의 진영에 잔류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칠 총리가 2차대전 중 그리스 반독/반파시즘 전선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렸던 그리스 공산당을 배제시키고 독일에 협력했던 부역자들을 대부분 풀어주면서까지 그리고 공산당이 주도한 아테네 평화행진에 대한 일방적 학살의 부담을 지면서까지 전쟁 중 카이로에서 존재감마저 약했던 왕당파 망명정부를 밀어준 것은 정말 여러모로 볼 때, 대내외적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실제로 KKE의 무장조직인 ELAS가 수만명의 빨치산 대원들을 확보하고 있었고 농촌 곳곳에 준정부기구인 민족위원회를 설치하며 입법/행정/사법 기구를 대체하고 있었기에 내전초기 그리스 공산당의 역량과 그리스 민중들의 빨치산 전사들에 대한 지지는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빨치산이 점령한 해방구의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정부가 선거에서 여성 참정권을 보장한 것이 1956년의 일이니 10년 이상 앞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세 여성 빨치산 전사들: 가운데 여성 대원은 1944년 12월 영국과의 교전에서 사망합니다.

 

그리스 내외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반공을 기치로 처칠이 끝까지 그리스를 포기하지 않고 미국과 함께 냉전 최초의 대리전이었던 그리스 내전을 지원한 결과 공산당은 1949년 발칸 북부의 사회주의 형제국들로 뿔뿔이 흩어지며 퇴각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는 발칸 반도에서 유일한 자본주의 국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내전 이후 그리스 반공정부의 사상탄압과 공산주의 동조자 색출은 또 다른 갈등과 피를 불렀습니다.

1949년 그리스 정규군과 보안대는 25만명에 이르렀으며 국가적으로 사상통제가 강화되면서 공직에 진출하거나 하다못해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도 보안당국의 신분조회를 받아야 했습니다. 

분명 폭압적 통치였지만 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뤄지는 등 군부독재의 일방적 탄압에 비해서는 자유로운 면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도 발칸 북부에서 자행된 계급의 적들에 대한 피의 응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물론 직접적 피해자와 가족들은 이런 도식화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전후 그리스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또는 유고연방의 운명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냉전의 역사에서 주변부 국가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제3의 경로는 아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중도적 민족지도자의 좌우합작 자치 정부의 수립같은 것은 당시 첨예한 냉전의 현실을 감안할 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인권,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 명분마저 개의치 않고 압도적 생산력을 지렛대로 삼았던 서방 지도자들의 조바심이나 코민테른의 일방적 명령을 따르며 사회주의 혁명이 눈 앞에 있다고 믿었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민중을 이끌 자금도 조직도 그리고 이데올로기도 갖추기 어려울 것 같은 제3의 길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스 내전은 1949년에 종식되었지만 1941년 이탈리아 침공부터 8년간 전쟁이 계속되면서 그리스 전 국토는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내전 중 인구의 10%인 70만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고 합니다.

1940년대는 그리스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10년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마샬플랜 집행을 위해 그리스에 온 미국인 Palul A. Porter가 1947년 9월 20일에 쓴 그리스 현황 보고서에서 포터는 그리스에는 희망이 없으며 모두 실의에 차있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포터가 보기에 기업가들은 투자를 하지 않았으며, 상점주인들은 상품들을 사모으지 않았고, 농부는 집을 수리하지 않았으며, 끊어진 다리를 보수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리스 인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들도 하지 못하고 궁핍과 공포 속에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고 그리스 내전의 비극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이었지만 마샬플랜으로 미국에서 보내온 엄청난 원조금은 그리스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마샬플랜과 그리스의 기적 그러나 근본적 한계

 

내전 이후 그리스는 세금 수입에 근거하여 정부재정을 운영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도 변변치 않았던 수출품도 생산기반 파괴로 더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그리스 화폐 드라크마에 대한 신뢰도 무너져 영국 파운드화를 유통과 결제수단으로 써야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1945~1950까지 마샬플랜에 근거하여 20억 달러의 원조금이 지원되면서 그리스는 차츰 전쟁과 내전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억달러의 원조금은 그리스가 1821년에서 1930년까지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1948~1950 기간 동안 그리스 GDP의 10~15%가 마샬플랜으로 지원된 원조금이었으며 1948~1952 기간 동안 그리스 정부의 재정지출 결손의 90.6%를 마샬플랜 지원금만으로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마샬플랜으로 들어온 돈들은 그리스의 심각한 관료제와 미국 담당자의 그리스 특수성에 대한 무지로 인한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우선 그리스의 파괴된 사회간접 인프라 재건에 사용되었으며 1951년에는 전쟁 전 생산규모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전력생산시설이 확대 복구되면서 1955년의 전력생산규모는 1939년의 5.7배에 이르렀습니다.  

 

마샬플랜 이후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말까지 그리스는 경제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경제적 성과를 보입니다. 

1953~1973년까지 20년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4.4%로 유럽 국가 중에서는 매우 높았으며 특히 1961~1973년 사이에는 7.4%의 고도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 기간 중 군사독재를 겪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정치체제가 안정되었고 달러에 연동(페깅)된 드라크마 환율로 인해 통화에 대한 신뢰도 높아졌습니다.

무엇보다 1957년에서 1972 까지 연평균 인플레이션이 4% 이하에 머문 거시환경도 그리스 경제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정부재정도 거의 균형에 가까왔습니다. 

 

해운강국의 입지도 이 때 자리잡았습니다. 전쟁 중 미국이 건조한 리버티 급 화물선들을 전쟁 말기 구매한 것이 적중하였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건조된 수퍼탱커들 상당수가 그리스 국적이었습니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유럽인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개선되면서 그리스 관광업이 성장하였습니다. 초기 고대 유적 중심이었던 관광패턴도 점점 해변과 섬 중심으로 옮겨갔습니다.

 

* 미국의 리버티 급 화물선 모습

SS John W. Brown is one of only two surviving operational Liberty ships.

"SS John W Brown" by Project Liberty Ship. Licensed under Attribution via Wikimedia Commons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S_John_W_Brown.jpg#/media/File:SS_John_W_Brown.jpg 

 

그리스 내부의 경제성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 인들의 해외이민이었습니다. 1951~1980 동안 인구의 12%가 이민을 떠났는데 미국의 쿼타로 미국 이민이 제한되자 1960년대 중반까지는 호주 이민이 큰 붐을 이루면서 1970년대 멜버른에는 20만명 가까운 그리스인들이 모여살았고 멜버른은 가장 큰 해외 그리스인 공동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해외로 떠난 그리스인들이 고향에 송금하는 외화는 그리스 경제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인들의 소득도 크게 증가했는데 1955~1963 동안 1인당 소득이 2배 증가한 반면 누적 물가 상승은 17%에 머물렀습니다. 아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1972년에는 그리스의 1인당 GDP가 유럽 선진국의 94%가 될 정도였습니다. 비록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성장이 주춤해지지만 1979년 2차 오일쇼크까지 그리스 경제는 나름 견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그리스는 1961년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 EEC의 준회원 자격을 얻으면서 고대하던 유럽사회의 일원으로 한 걸음 다가섭니다.

 

* 전후 서유럽 선진국의 1인당 GDP 대비 그리스 1인당 GDP 비중 추이

http://thesisantithesis.blogspot.kr/2010/09/greeces-convergence-with-europe.html

 

하지만 그리스 경제발전의 내용을 보면 근본적 한계도 명확했습니다. 

우선 재건사업과 급속한 도시화로 인한 도시 인프라 구축 위주의 발전이다 보니 건축업이 성장을 주도했습니다. 

1951~1971 동안 도시인구는 38%에서 53%로 증가했는데 1961~1980 사이에 일어난 투자 중 65% 이상이 건설토목에 투자되었으며 상당수는 도심 주택 건설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리스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시멘트 회사 Volos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스의 경제성장은 마샬플랜과 함께 유럽의 호황 덕분이었지만 그리스는 이 시기 음식업, 담배, 섬유, 음료 등 전통적인 분야에 집중된 자영농, 자영업, 소기업의 기반이 더욱 다져졌을 뿐 경제의 질적 도약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1958년 10인 이상 고용한 기업의 비중은 전체에서 1.6%에 불과하였습니다. 반 이상이 1인 상점이었습니다. 1969년 센서스에서 5인 이하를 고용한 기업은 전체 산업기업의 41%를 차지하였으며, 20인 미만 기업은 전체의 약 2/3에 달했습니다. 

비농업 분야에서 자영업 비중은 40%로 OECD에서 가장 높을뿐만 아니라 상당수 개도국보다 높은 비중이었습니다. 

1981년에는 10인 미만 산업체에 41%가 고용되어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오일쇼크로 물가가 급등하고 중국이 제조업의 수퍼파워로 부상하기 이전의 골든타임이었지만 그리스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 고도화를 이루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을 흘려 보내야 했습니다. 

아래 주요 경제지표 추이 표에서 나타나듯이 도시로 인구가 급격히 몰렸지만 대형 제조업이 성장하기 보다 소기업과 자영업이 더 번성하면서 GDP에서 산업부문(제조업과 건설업 등)의 비중은 1970년 30.4%(고용은 1980년 28.9%)를 정점으로 하락하였으며 제조업의 성장시기가 지나가면서 1990년부터 서비스업이 GDP의 60% 이상 고용의 48% 이상을 차지하며 그리스 경제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물론 제조업 성장만이 국가의 번영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소기업과 자영업의 번성은 대규모 부의 독식을 막았을지는 모르지만 과세기반 확충과 성장동력 확보에 치명적 단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1960년대 이후 주요 경제지표 추이

 

 

 

쿠데타와 군부독재 그리고 17 November 학살

 

 

성장을 구가하던 경제와 달리 그리스 정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파열음을 냈습니다. 

1950년대는 왕당파의 반공정권이 그리스를 통치했지만 1960년대 들어서는 극적 반전이 발생합니다.

1963년 왕당파의 내부분열 틈을 타서 그레고리 파판드레우(3대가 모두 총리를 맡았기에 그레고리 파판드레우를 편의상 1대 파판드레우로 칭함)가 이끄는 베니젤리스트 정당(공화파 정당)이 집권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1대 파판드레우 정권은 이내 심각한 어려움에 당면합니다. 군 개혁을 위해 주요 사령관을 해임할 것을 국방장관에 지시했지만 국방장관이 총리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해 버린 것입니다. 

1대 파판드레우는 직접 군개혁을 지휘하고자 국방장관 직을 겸임하려고 하였으나 국왕 콘스탄틴 2세가 반대하면서 총리 취임 2달만에 사퇴해야 했습니다. 

1대 파판드레우 총리는 매우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 이 시기 내전기간 동안 붙잡힌 빨치산과 좌익인사들을 석방하고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썼습니다. 

 

국왕은 기존 양대 거대정당 소속 의원들의 상당수를 부추겨 당을 떠나게 한 다음 새로운 우파 연립내각을 구성하도록 함으로써 정치에 직접 개입하였습니다. 

한편 1963년 불법화된 그리스 공산당의 위장정당 통합민주좌파가 살로니카에서 평화행진을 벌이다 극우파의 공격으로 부대표가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정국이 점점 요동을 쳤습니다. 

특히 1대 파판드레우의 아들인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2대 파판드레우)가 대중적 선동가로 등장하여 국왕과 군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군의 젊은 장교들은 1967년 5월 총선에서 2대 파판드레우가 주도하는 중앙연합이 승리할 것이 예상되자 숙청의 위협을 느꼈고, 결국 1967년 4월 21일 영관급(주로 중령과 대령급)이 주동이 된 쿠데타를 감행합니다.

자신들의 행동을 '혁명'이라고 칭한 쿠데타 장교들은 국왕의 승인을 얻어낸 후 의회를 해산하고 게엄령을 선포합니다. 

쿠데타 세력은 새로운 정권이 1935년 메타삭스 군사독재를 승계했으며 서구와 세속주의 세력에 맞서 고유의 가치인 Helleno-Christian 문명을 수호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 1967년 쿠데타 군의 아테네 주요시설 점거 모습

http://www.bbc.co.uk/programmes/p01xp523

 

* 쿠데타 주모자들의 모습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en/c/ce/Members_of_the_greek_military_junta_of_1967%E2%80%931974.jpg

 

1967년 쿠데타는 그리스 역사에서 1844, 1862, 1909, 1922, 1933, 1935년의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 여러 쿠데타의 연속적 사건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다른 쿠데타와 달리 아직까지도 그리스에서 큰 힘을 유지하고 있는 반미/반서방 정서의 불씨가 되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1967년 쿠데타를 미국이 지시했다는 음모론이 그리스 사회 전반에 퍼진 것입니다. 그리스 공산당과 다른 좌파세력은 반미 투쟁의 정당성 중 하나로 쿠데타 지원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 사주설을 입증하는 근거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미국과 서유럽이 군사정권에 대해 지원을 계속함으로써 쿠데타 사주설은 끊임없이 재생산 되며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과 서유럽도 군사정권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두고두고 그리스 시민들에 대해 부채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중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의 처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도 있으며 EU 지도자들이 그리스의 EU 정회원과 유로존 가입에 매우 관대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잇따른 정치적 혼란에 지쳤던 그리스인들은 쿠데타에 조직적 반발을 하기보다 수세적이지만 동조하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콘스탄틴 2세 국왕이 쿠데타 몇달 후 역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해외로 망명하였고, 1대 파판드레우 전 총리는 가택에 연금되어 1968년 11월 사망때까지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쿠데타 정권은 반대파에 대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민심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적 정책을 폈는데 농가 부채의 상당액을 탕감해 주기도 했습니다. 

정권의 당위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었음에도 그리스 경제의 성장이 지속되면서 군사정권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군사정권을 떠받쳐주던 고도 경제성장의 시기는 종식되었습니다. 또한 포퓰리즘 정책을 위해 필요했던 외국으로부터의 차관도입도 더 이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위기를 느낀 군부는 군주정을 아예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내세우며 안정을 취하려고 했지만 경제상황 악화와 함께 정치적 불안도 커져갔습니다. 

특히 미국과 유럽을 강타하던 청년들의 반전운동과 반기득권 투쟁(특히 프랑스의 68혁명)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반독재 투쟁에 나섰습니다.  

1973년 11월 아테네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수천명의 대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반독재 시위를 벌였습니다. 

 

* 1973년 11월 아테네 학생들 시위 모습

 

* 문제의 아테네 폴리테크닉 대학 시위 모습

students outside polytechnic

https://athenianvoice.wordpress.com/2012/11/17/the-greek-uprising-on-17-november-1973-against-the-junta-militar-2/

 

군부는 학생 시위에 대해 탱크까지 동원하여 강경하게 진압을 했는데 11월 17일 아테네 폴리테크닉 대학에 진입하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발포하여 군사정권 추산 11명(비공식 집계 50여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집니다. 

 

* 1973년 11월 17일 폴리테크닉 대학 진압 모습

http://www.therightplanet.com/2011/11/the-significance-of-november-17th/

 

* 참극의 현장에 세워진 추모 조형물: 뒤에 있는 건물벽 낙서의 그리스 공산당(KKE) 글씨가 선명합니다.

 

* 학살이 벌어진 11월 17일은 그리스의 전설적(?) 극좌 테러조직인 '17 November(17N)'단의 이름으로 부활합니다.(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Revolutionary Organization 17 November.jpg

 

군사독재에 대한 피의 저항이 이어졌지만 실제 독재를 종식시킨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황당하지만 군인들이 벌인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1974년 7월 군사정권은 키프러스 사태에 개입하는데 사태가 국제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며 결국 아르텐티나 군사정권의 포클랜드 전쟁처럼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스 군사독재는 1967년 4월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지 7년 만인 1974년 7월 24일 종식됩니다.

 

 

되살아난 민족주의의 망령: 왜 그리스와 터키는 계속 갈등을 빚을까?

 

 

이 시리즈의 5번째 글에서 설명했지만 그리스의 고토회복을 위한 '위대한 아이디어'를 쫓는 모험은 소아시아 원정이라는 매우 무모한 전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아타튀르크의 활약 속에 1922년 9월의 스미르나 대학살로 끝을 맺습니다. 

20세기초 소아시아와 발칸에서 벌어진 대규모 인종청소는 민족주의라는 명분아래 등장한 배타적 이데올로기들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리스 독립 이후 시기를 보면 그리스의 오랜 숙적은 오스만이었다기 보다는 불가리아였습니다. 물론 독립전쟁이나 발칸전쟁 등으로 그리스가 오스만과 전쟁을 벌이기는 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는 여러 적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강력한 적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불가리아는 2차 발칸전쟁에서 마케도니아 땅을 두고 전쟁을 벌였으며 국경선을 두고 계속 갈등을 빚었고 2차대전 중에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역을 점령하여 인종청소를 벌이기도 했기에 양국의 민족감정은 매우 안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소아시아 원정, 스미르나 학살, 인구 맞교환은 양국이 민족국가(nation-state)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물론 이런 학살극 덕분에 양국의 민족적 자각과 내부적 동질성이 강해졌다는 분석도 일리는 있습니다.

 

내부의 이질적 요소를 없애버려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베니젤로와 아타튀르트는 1920년대 후반 급격히 친해집니다. 심지어 아타튀르크에 노벨 평화상을 주려고 베니젤로가 애를 썼을 정도였습니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양국의 관계도 2차대전과 그리스 내전을 겪으면서 실질적으로 가까와졌습니다.

바로 공동의 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냉전으로 등장한 발칸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터키에도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와 터키는 북대서양과는 인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NATO에 1952년 가입합니다. 이제 두나라는 나토 정회원으로 동맹국이 되었으며 심지어 나토조약 5조에 의거해 상대국이 무력으로 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참전해야 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 1953년 그리스 북부 서트라키아에서 공동 작전을 벌이다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그리스군(왼쪽의 미군 스타일)과 터키군(오른쪽의 영국군 스타일)

 

냉전체제는 가끔 일반적 상식에 반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위 그리스군과 터키군의 해후모습도 그렇지만 1953년 그리스, 터키, 유고슬라비아 삼국이 발칸동맹(the Balkan Pact)을 맺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습니다. 

나토 동맹이었던 그리스와 터키는 당시 반공주의 아래 매우 사이가 좋았으며 공산화가 되었지만 티토가 스탈린과 반목하여 소비예트 블록에서 이탈한(1948년) 유고연방도 안보 불안을 덜기 위해 삼국동맹에 합의한 것입니다. 

물론 이 믿기지 않는 동맹은 2년후 그리스와 터키의 갈등과 유고와 소련의 해빙으로 인해 별 실효적 조치도 없이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가 다시 나빠진 데는 키프러스 섬 문제가 결정적이었습니다. 

키프러스 섬은 1878년 오스만 제국이 영국에 할양했는데 이 섬은 1869년 개통한 수에즈 운하와 연결되는 지중해 수송로의 요충지였기에 영국은 끝까지 섬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 키프러스(Cyprus) 섬과 수에즈 운하

Map showing Suez Canal

http://news.bbc.co.uk/2/hi/middle_east/5199392.stm 

 

키프러스 섬의 주민은 80%가 그리스계였고 20% 정도가 터키계였는데 다수인 그리스계 주민의 그리스 병합 요구가 점점 거세졌습니다. 급기야 1931년에는 그리스계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에서는 영국의 후원을 받던 상황이여서 공식적으로 키프러스에 대한 병합 요구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 접어들자 영국의 지배력은 크게 약회되었고 그리스도 이제는 영국보다 미국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면서 키프러스 병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도 영국의 식민지들에 대한 집착을 달가와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55년 4월 키프러스에는 그리스의 지원을 받는 전직 그리스 장교 출신의 그리바스가 영국에 맞서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코너에 몰린 영국은 20%의 터키계 주민 존재에 착안하여 그만 터키를 분쟁에 끌어들입니다. 

 

그동안 우호적이었던 그리스와 터키 관계는 갑자기 냉각되었습니다. 특히 이스탄불에서는 키프러스에 남겨진 터키계 동포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급격히 커졌고, 집단적 걱정은 1923년 인구 맞교환 때 차별적 세금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 잔류를 결정했던 그리스계 주민들에 대한 증오로 바뀌면서 순식간에 인종폭동이 발생했습니다. 

이스탄불 포그롬이라고 불리는 폭동으로 4천개의 상점, 100개의 호텔과 식당, 70개의 교회가 파괴되었으며 정확한 희생자의 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30명 전후의 그리스계 주민들이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이 폭동으로 그리스계 주민들 대부분이 집과 재산을 버려둔 채 그리스로 떠나면서 이스탄불의 그리스 공동체는 그 유구한 역사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956년 영국의 수에즈 개입 작전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키프러스는 다수 주민의 의사에 반하여 영국, 그리스, 터키의 합의로 1960년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그리스계 키프러스 지도자들은 터키계의 섬 분리를 막기위해 어쩔 수 없이 독립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키프러스 정부는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의회 의석과 경찰력을 각각 7대 3, 6대 4로 분할하고 일정 수준의 그리스군과 터키군이 주둔하는 매우 어정쩡한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1974년  키프러스 대통령이 섬에 주재하는 그리스 장교단의 철수를 요구하자 그리스 군사정권은 키프러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키프러스에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쫓아냅니다. 

새로 대통령이 된 Sampson은 강경 그리스 통합주의자였는데 대통령이 된지 1주일도 안되어 1960년 독립조건 위반을 명분으로 내세운 터키군의 침공에 맞서야 했습니다. 

터키군은 섬의 40%를 점령하며 그리스군과 전쟁으로 이어질 뻔 했지만 터키 개입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그리스군은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키프러스의 분단은 굳어졌습니다. 

당시 그리스 군사정부는 터키 공격을 명령하였으나 준비가 전혀 안되었던 군사령관이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그리스 합참의장이 내부 쿠데타를 감행해 군사정부 지휘부를 내쫓고 민정이양 절차를 밟게 됩니다.  

 

* 1974년 7월 터키군의 키프러스 침공

Partitiondechypreavanceemilitaireturque.PNG

"Partitiondechypreavanceemilitaireturque" by AteshCommons - Own work AY Deezy. Licensed under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rtitiondechypreavanceemilitaireturque.PNG#/media/File:Partitiondechypreavanceemilitaireturque.PNG

 

 

그리스와 터키는 키프러스 사태 이외에도 에게해에서 맞붙습니다.

1973년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에너지원 확보에 모든 국가들이 혈안이 됩니다. 그리스와 터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터키는 1973년 11월 1일 터키 인근 에게해 해역에 석유채굴권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유전지대 암반이 이어져 있는 지역을 모두 터키 채궐권 범위에 있다고 주장하자 그리스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자세히 보면 에게해를 둘러싼 그리스와 터키의 분쟁은 피해가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1차대전 이후 그리스의 공세로 에게해 2만개의 섬들이 그리스에 속하게 되면서 터키는 에게해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습니다.

터키는 흑해와 마르마라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두개의 전략적 해협과 해안선에도 불구하고 에게해가 그리스의 내해나 마찬가지가 되면서 에게해를 활용하지 못하게 되자 그 동안 분을 삭여야 했습니다. 

 

* 에게해의 그리스와 터키 섬들 

greece-map

 

1976년 여름에는 터키정부가 조사선 Simik 1호를 분쟁 해역에 보내면서 긴장이 다시 격해졌고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야당 Pasok을 이끌었던 2대 파판드레우는 그리스 정부에 터키 선박 격침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총리였던 신민주당(New Democracy)의 카라만리스는 유엔 안보리와 헤이그 사법재판소 회부를 선호했지만 양 기구는 분쟁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양측의 갈등을 낳은 유전발굴은 나중에 대단한 양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는데 그리스 해역에서 채굴된 원유량은 가장 피크였을 때 조차 그리스 전체 소비의 5%를 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와 터키의 분쟁은 단순히 경제적 부를 둘러싼 갈등을 벗어나 민족감정을 앞세운 답이 없는 악순환으로 빠져들었습니다. 

1986년 12월 그리스와 터키 순찰대가 Evros 강에서 충돌하여 터키군 2명, 그리스군 1명이 사망하자 양국간의 긴장이 다시 높아졌습니다.

1987년 2월에는 터키 유전탐사지역이 그리스 해역을 침범한다며 그리스와 터키가 다시 맞섰고 거의 전쟁 직전까지 갔습니다. 

당시 그리스 총리였던 2대 파판드레우는 아예 미국이 터키편을 든다며 그리스 내 미군기지와의 통신을 끊고 외무장관을 불가리아 소피아에 보내 지프코프 공산당 서기장과 사태에 대해 협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아테네에 있던 나토 동맹국 대사들이 바르샤바 조약국 대사들에 비해 뒤늦게 사태 브리핑을 들어야 했습니다. 

반미 성향이 매우 강했던 2대 파판드레우 총리는 이미 앞서서 나토가 터키와의 국경선 확정에 나서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토 훈련에 불참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 사태는 터키 총리가 그리스 해역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해소되었습니다. 

그후 그리스와 터키는 평화선언을 발표하고 양국 시민에게 비자를 면제하는 등 화해 분위기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4년 그리스가 EU와 터키 간 관세동맹 계획을 반대하고 얼마후 그리스 주재 터키 외교관이 테러조직 '17 November (17N)'에 피살되면서 관계가 다시 악화됩니다.

급기야 1995년 2월 터키의 F-16 4대가 그리스의 영공을 침법했다며 그리스 공군 미라지 F-1 두대가 요격에 나서 F-16 한대가 로도스 섬에 추락하는 불상사(조종사는 생존함)가 벌어지자 다시 양측의 감정이 들끓게 됩니다.  

1995년 12월 Imia라는 바위섬에 터키 배가 바위 위에 걸쳐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1996년 1월에는 양측이 두개의 바위섬을 두고서 깃발 꽂기 쟁탈전을 벌입니다. 당시 양쪽 전함이 출동하면서 전쟁직전의 상황까지 몰렸으나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양측 전함들을 철수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건도 그리스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그리스에 굴욕을 준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반미 감정이 전례없이 들끓게 됩니다. 이어서 리쳐드 홀부룩 국무차관보의 그리스 방문이 거절되기도 하였습니다.

 

* 1996년 깃발싸움: 터키 방송국이 보낸 헬기를 타고 터키 깃발을 가져온 터키 방송인들(이들은 그리스 깃발을 찢고 그 자리에 터키 깃발을 게양 합니다.)

Hürriyet photo

 

* 깃발 전쟁의 모습들

http://www.guncelmeydan.com/pano/kardak-krizi-ve-sonuclari-cem-gurdeniz-t36508.html

 

에게해에는 그리스와 터키간에 분쟁 중인 섬이 130개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1997년 양국은 현자 위원회(committee of wise men)을 공동으로 설치하여 에게해 분쟁을 처리하기로 합의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와 터키 갈등의 또 다른 막장극은 1999년에 벌어졌습니다. 

1970년대 이래 터키 정부를 집요하게 괴롭힌 쿠르드 노동당(PKK)은 30년 동안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또는 테러활동) 중에 무려 4만명의 터키 군인과 민간인 등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PKK와 그 지도자 오잘란은 터키뿐만 아니라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도 1급 테러조직과 1급 수배범으로 지정될 정도였습니다. 

공식적으로 그리스 정부는 터키의 쿠르드 사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문제는 PKK 지도자 오잘란이 터키 정부의 압력으로 은거지인 시리아를 떠나야 할 처지가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리스 정보국은 이 사태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오잘란이 다음 피신처를 가기 전에 아테네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데 오잘란은 전직 그리스 장교의 개인비행기를 타고 아테네에 잠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최종 목적지인 아프리카 옆의 휴양지로 유명한 세이셀을 가기 전에 오잘란은 케냐 나이로비의 그리스 대사관으로 임시거처를 정합니다.   

 

그러나 나이로비 주재 그리스 정보요원의 미숙한 대처로 케냐 정보당국이 오잘란의 나이로비 체류를 눈치채게 되었고 결국 세이셀로 떠나는 비행기가 준비되었다는 거짓 정보로 오잘란을 대사관 밖으로 불러낸 터키 비밀경찰요원들에 의해 오잘란은 이스탄불로 압송됩니다.  

 

* 오잘란이 당시 소지하였던 키프러스 여권(그리스 정보당국이 만들어준 것으로 추정됨)

"Cypruspassportofocalan".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 https://en.wikipedia.org/wiki/File:Cypruspassportofocalan.jpg#/media/File:Cypruspassportofocalan.jpg

 

 

터키 정부는 오잘란에 대한 수사를 통해 그리스 정부가 오잘란의 도피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내 PKK 요원들의 훈련기지를 지원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스 정부는 국제적으로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졌고 국민적 굴욕감 속에 3명의 장관이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선 분쟁과 갈들을 보면 양국 간 감정의 골이 매우 뿌리깊어 보이지만 1953년 양국 군대의 반가운 만남처럼 정말 타협할 수 없는 관계인지는 극히 의문스럽습니다. 

에게해 보다 더 복잡한 국경선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여럿 있지만 (예, 네덜란드와 벨기에) 항상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원개발의 명분도 절박해 보이지만 공동 개발이 과연 불가능할까 하면 다툼으로 개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에 비해 합리적 타협안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양국 정치인들이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국 국민의 감정을 더 자극하고 자국 정치의 실패를 감추려 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차피 다른 한쪽의 멸절이나 일방적 지배가 가능한 시대도 아닌 상황에서 공동의 가치를 위한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것은 시급해 보입니다.

인종적 또는 종교적 배타성(사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인종적 차이가 얼마나 클지도 의문이고 어쨌든 종교적 공존의 경험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이 아닌 민주주의적 가치를 최고로 하는 가치 공동체로 전환하려는 양국 시민사회의 의지가 커진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이 느끼는 과거 400년의 지배도 따지고 보면 현대 터키 공화국은 이를 부정하고 세워진 것이기에 풀 수 없는 난제는 아닐 것입니다.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고 민주적 질서에 근거한 정치지형이 마련된다면 목숨을 걸고 돌섬에 깃발을 꽂는 무모한 전쟁 놀이는 그만 둘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스는 그동안 국가 규모에 걸맞지 않게 과도한 군사비를 지출해 왔습니다. 

1970년대는 군사비가 그리스 정부지출의 20%에 달했으며 결과적으로 인프라 투자와 교육, 의료보험 등에 대한 투자는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또한 1996년 11월 깃발 꽂기 싸움 이후 그리스는 군 현대화 계획을 밝혔는데 168억 달러를 10년 동안 지출하여 전함, 잠수함, 전투기, 헬리콥터를 구매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군사비 지출 규모는 GDP의 4.6%로 나토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였습니다. 

금융위기 직전인 2006년에 그리스는 세계에서 4번째 무기 수입국이 되었습니다. 

 

분석에 따르면 그리스가 나토 회원국 평균 정도로 군사비를 절약했다면 그 금액이 1,500억 유로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합니다. 1,500억 유로는 1차 구제금융 규모 1,100억 유로를 400억 유로나 뛰어넘는 수치입니다. 

물론 군사비만 아꼈다고 해서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갈등에 헛된 돈을 퍼부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군사비 절약까지 아니어도 마찰만 줄였어도 자국 경제 발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주변부 국가들의 발달과정을 추적해 왔지만 그리스 현대사에서는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 수립과 비전제시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인접한 유럽이 이미 발달한 경제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 주도의 산업 발전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던 것(사실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국가주도적 경제발전의 모습이 일부 있지만...)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자유시장원리를 보다 중시한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푸에르토 리코나 브라질 마저 국가가 산업 발전 전략에 깊숙이 개입한 것을 보면 유럽 탓만 하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 2006년 테살로니키(살로니카)의 No day 군사 퍼레이드 장면 

 

  

* 나토 회원국의 방위비 부담 비중: 그리스는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GDP 대비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습니다.

http://i.imgur.com/J6XP2Rh.png

 

 

다음 글은 1974년 이후 민주화의 과정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기존 글의 백업과 원할한 자료 관리를 위해 빈약하지만 별도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블로그의 글은 원칙적으로 모공 및 팁게글과 동일하지만 일부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참조문헌 등은 블로그를 통해 관리할 예정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방문해주셔서 덧글 등의 자취를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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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시리즈 

그리스 비극 1: 그리스인은 유럽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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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2: 도적과 시인과 화가의 전쟁 그리고 삼국 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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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3: 신생국가의 근대화 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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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4: 발칸 전쟁과 국가분열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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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5: 대살육 속 영웅의 의미- 아타튀르크와 베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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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6: 반공과 반파시즘의 대결과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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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acroce 님의 게시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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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화가스구름
IP 58.♡.187.148
08-14 2015-08-14 20:50:28 / 수정일: 2017-04-30 16:06:03
·
1945-1950에 20억 달러라니...
금하고 태환되던 시절의 20억 달러, 지금의 한 2000억 달러랑 맞먹겠군요.

인구가 7백만도 안 되는 나라에 5년동안 2000억 달러를 퍼부었다니,
미국은 그리스한테도 미국느님 이었군요.
hiStoryshun
IP 220.♡.19.205
08-14 2015-08-14 22:04:54 / 수정일: 2017-04-30 16:06:03
·
Santacroce님이 의도하신 것인지 참조한 내용이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동아시아의 '어느 국가'의 실태가 연상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군요. 경제구조가 상당히 다른 것을 알지만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이번 글 또한 감사히 정독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Aslan
IP 221.♡.25.124
08-15 2015-08-15 01:28:08 / 수정일: 2017-04-30 16:06:03
·
냉전의 역사에서 주변부 국가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제3의 경로는 아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부분에 많은 공감을 갖습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아주 민족주의적이란건 사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이는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많이 큽니다만.. 하여튼 김구선생님이 추앙을 받아야하는건 마땅하지만 사실 광복 전후 상황을 생각했을 때 지나치게 이상적이였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좌우합작은 당시 세계 정세로 봤을 때 전혀 불가하고,
이미 북한이 김일성 공산주의 체제로 다져가고 있을 때 사실 이박사나 김구선생이나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은 단 하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자본주의 진영에 붙는거죠.

여기서 친일한 부류 처리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박사나 김구선생이나 다들 반일주의자였고 평생을 대한독립을 위해 사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미군정이 친일파에 대한 온건한 태도와 더불어, 친일파가 대부분 자본가라는 사실 때문에 북한과 달리 친일파 청산에 더 큰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합니다. 북한에서는 친일뿐만아니라 공산주의라는 이념차원에서도 지주(친일, 자본가)타도가 마땅한 행위죠)

이박사가 625발발하고 도망친건 뭐 선조보다 못한거라고 까여도 할 말이 없죠. 하지만 김구선생님이 대통령이 됐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여지가 있었나 싶습니다...
알콰리즈미
IP 119.♡.216.46
08-15 2015-08-15 11:44:10 / 수정일: 2017-04-30 16:06:03
·
연배 있는 분의 견해인 것 같네요.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나라의 독립 자체가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 한계가 많았죠.
김구 선생님이었으면 오히려 박헌영 등에게 휘둘려 더 큰 혼란이 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맘에 안들어도 이박사가 위험한 줄타기를 하면서 미국 원조 지독하게 받아내고 한미동맹 끌어낸 것이,
그 뒤 경제성장에 기여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봅니다.
liberty1945
IP 121.♡.110.36
08-15 2015-08-15 13:59:10 / 수정일: 2017-04-30 16:06:03
·
올려주신 답글에 대해, 개인적으로 강하게 동의합니다. 당시의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결국은 친미를 선택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게다가 체코의 경우처럼, 자칫하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부적으로 함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스트리아의 사례와 같이, 좌우합작을 모색할 가능성도 아주 배재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갈등에 대한 조정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반도에서의 좌우합작은 현실적으로 매우 가능성이 낮은 방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태석
IP 124.♡.83.153
08-15 2015-08-15 22:16:57 / 수정일: 2017-04-30 16:06:03
·
dopeass님
냉전시대에 미국을 선택했다고 이승만이 까이는 건가요? 기본적으로 민주 질서를 유린했다는 점, 과연 독립 운동을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점, 책임 질 자리에서 자기 목숨만 챙기려 했다는 점 등 까일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시대 상황이 이승만이 아니었더라도 그 이상 막장인 인간이 독재를 했을 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어느 면에서도 옳게 보아줄 면이 없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다는 주장은 그냥 기가 막히네요.

친일파가 자본가라서 숙청 못했다구요?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인정해 주는 주의일 뿐입니다. 일본이란 나라가 없어지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는데 일본 시절의 자본이나 소유 관계를 인정해 주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을 리는 없다고 봅니다.
삭제 되었습니다.
Aslan
IP 221.♡.25.124
08-16 2015-08-16 00:55:51 / 수정일: 2017-04-30 16:06:03
·
최태석님 //

이박사가 친미를 해서 까이는게 아니죠. 대부분 하기 세가지 이유로 큰 비난을 듣습니다. 독립운동에 관련해선 의견이 많습니다만, 이박사는 반일주의자란 것에 대해선 그 어떤 반박이 없을 겁니다.

1. 친일청산
2. 독재
3. 625 전후 대처

이 중에서 2,3번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3번의 경우엔 자신이 그렇게 미워했던 조선왕조의 선조와 똑같이 튀었죠. 독재의 경우엔 비난받아 마땅하나 세계적으로도 독립 후 독재정권을 겪은 국가들이 많다는 점에 전세계적 보편성은 있습니다.

말씀드리고자하는 바는 친일청산입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저는 김구선생님이든 누구든 됐던 완벽한 친일청산은 불가했을거라고 봅니다. 여기서 친일은 근 40여년 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모든 사람들입니다. 저는 완벽한 친일청산을 할 수 있었던 그룹은 말씀드렸던데로 공산주의세력밖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념의 관점에서든 국민적 감정의 관점에서든 친일세력이 주적임이 아주 뚜렷합니다.

반면에 미국주도의 자본주의는 말씀드린데로 이에 비하면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미군정은 status quo 즉 그 어떤 사회적 혼란도 원치 않았으며, 그들의 눈에는 40여년간 깊게 뿌리내린 친일세력을 도려내는 작업은 틀림없이 사회혼란을 야기할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특히 당시 technocrat 들은 두말없이 친일세력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제거함으로 발생하는 소요를 미군정은 감당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둘째로, 자본주의라는 이념자체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유재산소유를 허락하고 이를 통해 사회경제 발전을 꾀합니다.그렇기에 북한과 같은 과격한 무상몰수 무상분배 형태의 토지개혁 자체가 이념적으론 불가능합니다. 대부분 친일세력이였던 지주, 자본가들을 타도하는데 이러한 점도 걸림돌이었을거라 봅니다.

셋째로 국가 존립의 여부입니다. 오랫동안 차근차근 정부수립계획을 갖추었던 북한과 달리 남한은 혼돈 그자체였으며, 그 누구가 정부를 수립했던간에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북한에 비해 정부,사회체계가 약했을 것입니다. 사회혼란으로 인한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이 친일청산에 있어 장애물이 됐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매국행위는 결코 용납치 못할 행위이며 추후에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없어야겠지만) 그 어떤 어려움을 무릎쓰고 매국세력을 처단해야할 겁니다.

의도치 않게 친일청산을 하지못한 이박사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게 됐습니다. 저는 단순히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아닌 변호를 하게 됐습니다만, 당시 남한의 시대적 상황이 친일처단에 있어 북한에 비해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당시 위정자가 이승만이든 아니든, 소련을 등에 업은 더 강한 북한을 앞에 둔 상황에서 친일청산의 문제는 남한 공산화냐 아니면 국가존립이냐 였을거라 생각합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이 문제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거라 생각되네요.
최태석
IP 124.♡.83.153
08-16 2015-08-16 08:27:49 / 수정일: 2017-04-30 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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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peass님
친일 청산이 쉬웠을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웠겠죠.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하려면 뭔가 어려운 일을 해내거나 최소한 하려고 노력이라도 한 사람을 얘기하지 않던가요? 이승만은 어려운 일은 하지도 않았고 하려고 했던 거 같지도 않은데 온갖 못된짓을 한 자이니 그에 응당한 대접과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특성에 대해 얘기하시는데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범죄에 의한 사유재산 축적은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장물을 도둑놈이나 장물아비의 소유로 인정해 주는 국가가 있나 보세요. 미국에서 화이트칼라 범죄를 엄하게 처벌하는 것도 범죄에 의한 자본 축적을 인정해 주면 시장 경제가 무너질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일제 시대에 친일 행위로 축적된 자본을 장물로 보고 국가가 환수하거나 적절한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scarecrow
IP 86.♡.178.124
08-15 2015-08-15 20:05:08 / 수정일: 2017-04-30 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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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고고.. 댓글다는 동안 앉았다 일어섰다 몇 번 했더니만 글이 모두 증발해 버렸습니다. ㅜㅜ

Santacroce님의 글을 천천히 읽어 가면서 친분있는 두 형제가 생각나더군요.

Cyprus 출신 이민자의 아들들로 외국국적을 가졌을지라도 그리스인으로서 들려주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슬픈 삶 그리고 터어키인들을 향한 분노를 말하던 이 친구들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며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CLiOS
최태석
IP 124.♡.83.153
08-16 2015-08-16 08:39:12 / 수정일: 2017-04-30 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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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10% 이상이 이민을 갔다니 정말 엄청난 수치네요. 이 때 발생한 인력 유출이 제조업 발달을 어렵게 한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Santacroce
IP 122.♡.206.43
08-16 2015-08-16 21:58:45 / 수정일: 2017-04-30 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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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인가 두번째 글인가에도 쓰긴 했을 텐데 그리스 이민의 역사는 19세기 부터였습니다. 원채 제대로 된 산업이 없다 보니 해외로 나간 것인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되풀이가 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자국내 산업이 빈약한게 젊은이들을 외국으로 내몰지 않았나 합니다.
하얀강아지
IP 211.♡.146.75
08-16 2015-08-16 10:03:36 / 수정일: 2017-04-30 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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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Santacroce
IP 122.♡.206.43
08-16 2015-08-16 21:59:35 / 수정일: 2017-04-30 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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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을 준비하다 보니 일일이 댓글을 남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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