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에 관한 11번째 글은 퇴임시 지지율이 75%로 취임시 보다 더 인기가 많았던 룰라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결단과 성장과정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G20 회의에서 브라질의 룰라를 세상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대통령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같은 정치인으로 80%에 육박하는 지지율에 대해 칭찬과 부러움이 섞인 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룰라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린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브라질의 지독하게 가난한 북동부에서 상파울루로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자기는 알콜 중독자가 되었거나 일찍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브라질 북부의 여건은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인 흑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가뭄과 절대빈곤으로 아프리카에 비유될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기대수명도 상당히 낮았습니다.)
룰라의 가족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브라질의 가난한 북동부 주인 페르남부코의 소도시에서 살았습니다. 룰라의 어머니 도나 린두는 7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남부에 일자리를 찾는다며 집을 나갔기에 혼자 모든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아무리봐도 답이 없는 상황이 되자 1952년 도나 린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당나귀, 시계 등)을 시장에 내다팔아 여비를 마련하고 남편을 찾아 남부로 정처없는 길을 떠납니다.
세계에서 4번째로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7살의 막내를 포함한 7명의 아이들과 도나 린두는 이 트럭, 저 트럭의 짐칸을 옮겨 타면서 밤에는 트럭 밑에서 잠을 청하며 13일을 버텨야 했습니다.
룰라는 도나 린두가 데리고 내려온 7명의 아이들 중 7살짜리 막내아이였습니다.
갖은 고생을 하고 상파울루 인근의 남편을 찾긴 했으나 남편은 이미 딴 여자와 2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도나 린두는 남편과 그의 정부가 사는 집으로 비집고 들어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동거를 시작합니다. 룰라의 아버지는 이 두여인으로부터 무려 23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합니다.
룰라는 그의 형제 중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마치는 행운아였지만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선반공이 되기 위한 견습생이 되어 금속 노동자의 길을 걷습니다.
노조활동가로 단련되어 가던 룰라는 1978-1979년 군부독재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인플레가 그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시점에 자동차 산업단지 대파업을 이끌면서 일약 전국적 스타가 되었습니다.
* 대파업시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는 룰라: 이 장면은 아닌 것 같지만 연설 도중 스피커가 고장나 수많은 군중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하며 앞에서 뒤로 전달한 일화는 꽤 유명합니다.

급진 좌파에서 실용적 중도 좌파로
룰라와 그의 동지들은 이 파업의 여세를 몰아 1980년 노동자당(PT당)을 창당합니다.
노동자당의 핵심 세력은 크게 3부류인데 첫째는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은 가톨릭 풀뿌리 조직들로 당내 최대 계파를 이루었습니다. 이중에는 도시 빈민의 건물 점거운동이나 농촌의 무토지 운동을 주도하던 활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둘째는 1960~197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강경무장투쟁을 벌였던 게릴라 출신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쿠바등지로 망명생활을 하며 독재기간을 버텨오다가 사면령(1979) 이후 노동자당 창당에 참여했습니다.
셋째는 좌파지식인들과 학생들이었습니다.
노동자당은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다른 좌파정당이 사상투쟁이나 노선투쟁으로 분열되었던 것과 달리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내부 분파를 허용함으로써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노동자당은 1990년대말 열성당원이 23만명이나 되는 브라질에서 가장 성공한 좌파당으로 성장합니다.
노동자당의 성장은 1940년대 30만명의 당원으로 바르가스를 압박하던 공산당에 비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당은 내부에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주류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또한 쿠바에 망명을 했던 지휘부가 있었음에도 쿠바나, 또는 무장게릴라 시절 마오주의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중국이나, 또는 더 이전 시기에 세계공산당의 지휘부 노릇을 했던 코민테른을 조종한 소련의 직접적 영향을 받거나 이들 나라를 맹목적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친사회주의 성향의 좌파당으로서 사회주의 국가들(특히, 쿠바)에 대한 심정적 연대의식은 높았습니다.)
또한 노동자당은 설립 시점부터 대중운동과 풀뿌리조직에 기반하고 있다보니 이데올로기에 고착했던 공산당에 비해서는 외부의 동태적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으며 보다 실용주의적 입장에 설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노동자당이 지방자치제에 기반하여 성장한 것은 당 지도자들이 통치경험을 통해 현실 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고 참여민주주의의 원칙(즉, 민주집중제라는 허상에 빠지지 않고)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통치스타일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공산당처럼 완고한 이데올로기에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고 하여도 암울한 독재시절 좌파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되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전체를 악마시하는 경향이 컸던 것처럼 룰라도 초기에는 매우 급진적 주장을 펼쳤습니다.
첫번째 대선 도전으로 콜로르(나중에 부패혐의로 탄핵된 대통령)와 맞붙었던 1989년 선거에서 룰라는 은행의 국유화와 대외채무의 즉각적 지불중단을 주장했으며 노동자당은 중도파나 우파와 결코 연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두번째 대선 도전으로 카르도주(군부독재 시절 같은 좌파 그룹으로 둘은 친했다고 합니다.)와 맞섰던 1994년 선거에서는 헤알화 도입은 선거용 사기이고 에너지나 통신부분의 민영화는 국가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카르도주는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 계기를 유력 대권주자였던 룰라가 헤알화 계획을 중단시킬 것에 대한 두려움때문이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형이 공산당원이었음에도 한번도 진지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았던 룰라는 거듭된 대선도전 실패와 헤알화 계획의 대성공을 목도하면서 더욱 온건한 실용주의자로 변신했습니다.
세번째 도전으로 카르도주와 다시 맞붙은 1998년 선거에서는 이전과 다른 입장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헤알화 플랜으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한 것은 중요한 성과이며, 민영화된 회사들은 입찰과정에 문제가 있을 때에만 감사에 들어가겠다며 카르도주의 업적을 일부 인정했습니다. 또한 급진적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무토지운동(MST)에 대해서도 브라질 같이 대국에서는 농업개혁을 위해서 남의 땅에 침입할 필요는 없다며 거리를 두었습니다.
네번째 도전인 2002년 대선에서는 브라질의 대외채무를 존중할 것이며 민영화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고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쳐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룰라는 대선 캠페인 기획자로 정치 마케팅 전문가인 Mendonca를 영입하는데 그는 선거 슬로건으로 "평화와 사랑의 상징 룰라(Lula, Peace and Love)"(재즈 페스티벌 제목 같군요)를 내걸어 룰라에게 덧씌워진 급진적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노동자당은 제휴세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다른 정파(중도파나 심지어 우파까지도)와의 연대를 시사했는데, 결국 중도파의 표를 더 얻기 위해 런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우파인 자유당(PL) 대표이자 복음주의적 개신교도인 섬유재벌 호세 알렝카르를 선정했습니다.
선거 막판에는 "브라질 민중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개했는데, 여기서 룰라는 카르도주의 헤알화 계획을 유지하겠다고 다시 명시적으로 선언하였으며, 경제적 안정과 경상수지 및 인플레이션의 통제는 브라질의 소중한 유산으로 지켜나가겠다고 공표했습니다. 룰라는 이 공개편지를 노동자당 명의가 아닌 룰라 개인의 이름으로 발표함으로써 노동자당 보다 더 유연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기존의 입장과 달라진 주장에 대해 룰라는 "세계가 변했고 브라질이 변했다. 노동자당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라고 답했습니다.
심지어 대선 승리 이후에는 은행가들이 너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들이 망했을 때 세금으로 감당해야할 구제금융 규모를 생각하면 부자인 지금이 차라리 낫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룰라가 기존 입장을 뒤엎고 바뀔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실용적 가치관이 주효하긴 했으나 노동자당의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룰라의 오른팔이자 나중에 비서실장이 되었던 지르세우(Dirceu)는 1995년 당대표가 되고나서 완고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당지도부에서 대대적으로 몰아내며 룰라의 변신을 측면에서 도왔습니다.
그러나 룰라의 입장변화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기업가들과 외국투자가들 그리고 금융인들은 룰라가 2002년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패닉상황에 빠집니다. 헤알화는 1달러당 2.15헤알에서 3헤알로 40%가까이 폭락했고 중앙은행이 헤알화의 추가 하락을 막고자 금리를 인상시켰더니 이제는 막대한 규모의 공공부채에 대한 이자부담이 커지면서 디폴트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러자 브라질에 들어오는 자본유입이 갑자기 멈추어 버립니다.
임기 말의 카르도주는 IMF와 협상을 통해 긴급구제자금 300억 달러를 받기로 하는데 자금집행의 대부분이 선거 후 시점이다 보니 선거결과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카르도주 대통령은 모든 후보를 불러모아 IMF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재정긴축을 통해 재정잉여금 4.5% 마련을 포함한)에 동의를 하라고 압박합니다.
룰라를 포함한 거의 모든 후보들이 지지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였습니다.(군소 좌파후보 한명만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룰라의 길, 차베스의 길
룰라는 2002년 선거에서 1차투표에서 46.4%를 얻으며 과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결선투표에서는 61.3%로 카르도주의 후계자인 PSDB당의 세하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룰라의 당선은 1970년 선거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칠레의 아옌데 당선과 유사했지만 룰라의 정책은 비극적 최후를 맞은 아옌데의 좌파노선과는 매우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8년 집권으로 라틴 아메리카 좌파 집권의 물꼬를 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도 달랐습니다.
특히 차베스와 룰라는 비슷한 시기 모두 노동자와 빈민의 지지를 받고 집권했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차베스가 볼리바르 혁명과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서방 정치권과 금융권을 제국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점점 급진주의의 길을 걸었던 것에 비해 룰라는 급진주의에서 온건주의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였습니다.
아마도 룰라와 차베스가 다른 길을 걷게 된데는 두 지도자의 서로 다른 인생역정과 두 나라의 차별적 정치유산이 한 원인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한명은 독재정권 아래서 노조를 이끌며 저항했지만 세번의 대권도전 실패에서 보여주듯이 인내심을 잃지 않고 합법적 틀 내에서 권력에 오르려고 하였던 반면, 다른 한명은 군인으로 민선정부(비록 문제가 많은 정권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선거를 통해 집권한)를 쿠데타로 전복시키려 했던 야심가로 나중에 선거를 통해 집권하기는 하였지만 합법적 통치질서 안에 자신을 가두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두 지도자가 반대했던 전임 정권의 역할도 중요한 차이점이 되었습니다. 민선정부이긴 했으나 좌충우돌 속에 의미있는 성과를 내지 못한 차베스의 전임 정권에 비해 룰라의 전임 정권(카르도주 정권)은 인플레이션의 통제와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며 큰 인기를 얻었고 임기 말에도 국민적 지지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기에 룰라가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룰라가 계승한 카르도주의 정책은 비단 헤알화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빈곤구제의 대표적 정책이된 Bolsa Familia(가족기금)도 원래는 카르도주의 Bolsa Escola의 확대개편이었습니다.
룰라 집권 1기를 카르도주 집권 3기라고 부르는 사람들(긍정적이든 부정적 의미든)이 많았던 것은 이런 정책의 연속성 덕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정권 모두 빈곤구제에 열심이었으나 그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의 차이도 컸습니다. 차베스는 국영석유회사 PDVSA의 매출 중 일부를 직접 끌어다 빈곤구제정책의 재원으로 사용했으나 룰라는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함으로써 전체 경제의 균형을 유지하고 구성원 간 이해를 조정하는데 보다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즉, 룰라와 차베스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데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인적 신념의 차이와 함께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유산 그리고 경제정책의 시행 방법의 차이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룰라는 같은 좌파 지도자로서 차베스에 대해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2008년 차베스가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제한을 철폐하고 영구집권을 시도하는 국민투표 운동을 벌였을 때도 룰라는 차베스에 대해 지난 100년의 베네수엘라 역사에서 최고의 지도자라며 추켜세웠습니다.
하지만 차베스가 무리수를 둬가며 개헌을 통해 3선에 나선 것과 달리 룰라는 3선 개헌에 나서라는 지지자의 요청과 우호적 환경 속에서도 단호히 이를 거절하며 민주적 가치관의 차이를 재확인하였습니다.
현재 브라질과 베네수엘라는 모두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갈등이 다시 커지고 있지만 폭력적 도심시위 속에 44명의 사망자를 낸 베네수엘라와 100만명이 넘는 시위에도 사상자가 한명도 없는 브라질은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룰라 효과: Zero Hunger에서 Bolsa Familia까지
무엇보다 룰라의 집권 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브라질 국내외의 투자자를 안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룰라는 지르세우와 함께 자신의 양대 핵심참모인 팔로시(Palocci)를 재무장관에 임명합니다.
팔로시는 IMF 프로그램의 핵심사항인 재정잉여금 4.25% 확보를 위해 당초 예상보다 더 강도높은 긴축정책을 펼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대선에서 상대후보였던 PSDB 당의 세하를 지지한 미국계 은행장을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하였고 농업부 장관과 산업부 장관에 기업인을 임명하는 파격을 보이며 투자자들의 의구심을 낮추려고 노력했습니다.
팔로시의 주도로 연금개혁(카르도주도 시도했던)에도 손을 대 부담금의 납입기간을 더 늘렸고 모든 공무원들의 퇴직 최저 연령을 올렸으며 퇴직한 공무원이라도 소득이 최소액을 넘을 경우 사회보장납입금을 내도록 개혁했습니다. 다만 연금개혁은 신규가입자부터 적용하였기에 그 효과가 크지는 않았습니다.
팔로시는 조세법도 개정하여 조세항목을 축소하였고 도산법과 모기지법도 정비하여 기업의 경영활동과 개인의 주택마련을 독려하였습니다.
이런 신자유주의(?) 개혁 추진은 일부 지지자들과 좌파그룹의 이탈로 이어집니다. 좌파그룹인 사회민주당(PSOL)은 룰라가 함정에 빠졌다며 비난하였고 노동자당의 주요 세력이기도 한 무토지운동그룹(MST)은 결국 룰라정부와의 정책연대를 파기하고 상파울루 근교 목장을 무단으로 점거하며 룰라를 어려움에 빠뜨렸습니다.
또한 노동자당이 집권한 지자체에서는 재정긴축에 대한 반발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룰라는 집권 목적이 사회개혁임을 절대 잊지는 않았습니다. 2003년 취임 직후, 룰라는 7억 달러의 전투기 구입 계획을 취소하고 해당 예산을 기아추방에 사용하겠다는 발표를 했으며, 야심찬 사회복지정책인 가족기금(Bolsa Familia)(카르도주 정권의 Bolsa Escola에 기반함)을 2003년 10월부터 시행했습니다.
가족기금은 학자금 지원, 산모영양공급, 식량보조, 가스비 보조로 구성되어 최저한의 생계와 아이들에 대한 재투자가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보조금의 수령 조건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도록 함으로써 가난의 대물림을 체계적으로 방지하려고 하였습니다.
2006년 가족기금의 수혜자는 1,100만 가구나 되었는데 2013년에는 1,380만 가구로 확대되었습니다.
* 가족기금 카드
가족기금에 대한 비판자들은 이 정책은 정부예산으로 집권당의 지지표를 얻는 세계최대의 매수정책이라고 비난했지만 실제 들어가는 돈은 GDP의 0.4%(사회복지 담당 직원에게 누락된 빈곤층을 찾으면 인센티브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에 불과해 다른 복지정책에 비해 지나치게 과도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반대파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가족기금이 브라질 사회에 몰고 온 변화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브라질 사회는 전통적으로 남유럽 경제수준에 비슷한 남부지방과 아프리카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 북동부/북부 지방으로 구분되었으며 절대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룰라 집권기간 동안 경제적 안정과 가족기금 등의 사회복지 확대는 경제성장과 빈곤률(절대빈곤과 상대빈곤 모두) 하락을 동시에 거두었습니다.
룰라는 최저임금 인상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2003~2010년 사이에 50%가 인상되어 월 286달러가 되었습니다. 공공부문에서 1,400만개의 일자리가 공급되었고 2천만명이 빈곤층에서 탈출했습니다.
불평등을 보여주는 GINI계수도 2001년 0.594에서 2011년 0.527(여전히 높긴 하지만)로 많이 하락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실업률은 5.3% 정도로 낮아졌고 경제성장률도 2004년에는 5%로 올랐습니다. 헤알화의 환율은 1달러 당 2.15로 안정(사실 고평가이지만)을 찾았고 국채금리는 2002년 연 25%나 되던 것이 2%대로 급락하며 디폴트 가능성에서 거의 벗어났습니다.
* 브라질의 절대빈곤(1일 2달러 미만 소득인구) 추이와 1인당 소득 추이: 절대빈곤률은 6년동안 20%에서 10% 거의 절반이나 줄었으며 1인당 소득도 4배나 늘어났습니다.
Rapid Acceleration in Reduction of Lower Income
Class Post 2003 Has Led to a Significant Rise in GDP
per Capita…

Data as at April 17, 2012. Source: World Bank, IMF WEO.
* 소득계층별 비중추이: 빈곤층의 하락은 중산층을 크게 늘렸고 상류층도 완만하게 늘어났습니다.
EXHIBIT 22
The Middle Class in Brazil has Grown by 1200bp to More Than Half of the Total Population, But the Upper Class is Growing Too

Data as at August 8, 2011. Source: Secretariat of Strategic Affairs of the Presidency (SAE) released the Classe Média em Números , http://www.brasil.gov.br/
물론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도 비슷한 시기 빈곤율의 감소가 관측되고 있는데 라틴 아메리카 전반에 걸친 좌파정권의 집권과 이들 정권이 빈곤층에 보조금을 지급할수 있었던 원자재 시장의 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인구 2억으로 인구와 영토면에서 다른 비교국을 압도하는 브라질(사실 인종문제도 보다 심각한)이 비교국가에 비해서 빈곤율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빈곤율 비교

신이 준 선물 또는 로또를 맞은 국가
룰라 집권기의 브라질은 4배나 증가한 1인당 소득만큼이나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누렸습니다.
2005년 IMF의 차입금을 조기에 갚으면서 IMF 체제를 졸업합니다.
2006년 석유의 자급자족을 달성합니다.(그러나 얼마 후 다시 수입을 병행합니다.)
2007년 11월 8일 룰라와 브라질 국민을 감동시킨 뉴스가 전해집니다.
브라질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는 국영 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가 산토스 해역에서 50억~80억 배럴의 심해유전 '투피'를 발견한 것입니다. 투피의 매장량은 기존 브라질의 원유 매장량 128억 배럴의 약 50%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였습니다.
연이어 발견된 심해유전으로 브라질은 멕시코의 매장량을 넘어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베네수엘라 다음의 산유국이 되었으며 2020년에는 5대 산유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룰라는 이 발견을 두고 신이 내려준 선물이자 복권에 당첨된 것이라며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2008년 1월에는 이제 대외채무보다 채권이 많은 순채권국의 지위에 올랐으며 하반기에는 신용평가등급이 투자적격으로 올랐습니다.
브라질의 석유개발과 관련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2005년부터 2008년 여름까지 브라질의 국운(경제적 관점에서 보면)은 정말 하늘을 찌를 기세였습니다.
2009년에는 최대 무역파트너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건국이래 지속된 미국 영향력에서도 벗어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 브라질의 유전지대

* 브라질 원유 매장량 증가 추이

https://www.stratfor.com/sites/default/files/styles/stratfor_full/public/main/images/Brazil%20Crude%20Oil.jpg?itok=CrTg2Lp9
* 원유와 가스 매장량 순위
http://www.ft.com/intl/cms/s/0/9080ccd2-cdaa-11e4-8760-00144feab7de.html
그러나 아쉽게도 브라질의 국운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는 못했습니다. 브라질에서 새로 발견된 심해유전의 채굴은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해유전이나 멕시코만의 유전에 비해 기술적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우선 그 깊이가 남달랐는데 바다물 깊이가 2km나 되었고 해저바닥에서 다시 5km의 해저지반을 뚫어야 했습니다.
특히, 뜨겁고 지질학적 특성이 다루기 어려운 지하 소금층 두께가 2km를 넘어서고 있는 점은 또 다른 어려움을 던져 주었습니다.
브라질의 암염하층(pre salt) 유전은 막대한 개발비용으로 자칫 못먹는 감이 되거나 더 나아가 브라질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위험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 브라질 심해 유전과 멕시코만, 북해 유전의 비교
룰라의 사람들: 지르세우, 팔로시, 호세프, 마리나 시우바
룰라 시대를 정리하면서 룰라의 주요(?) 측근 4명의 인생역정을 간단히 소개할까 합니다.
룰라 집권의 최대 공신은 지르세우와 팔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집권 1기 기간에 비서실장과 재무장관을 맡아 룰자 정권의 아젠다를 설정하였으며 각 아젠다가 제대로 집행되도록 양지와 음지(?)에서 혼신의 힘을 발휘합니다.
먼저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지르세우를 소개하면 그는 1960년대 학생운동 지도자였습니다. 군부독재가 강화되자 지르세우는 마오주의자로 무장투쟁을 위해 공산당을 탈당한 마리겔라의 공산주의 게릴라 그룹에 참여했으나 얼마 후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대생 지우마 이야기'에서 소개했던 미국 대사 납치사건에서 미국 대사의 석방을 조건으로 풀려난 무장게릴라의 한명이 바로 지르세우였습니다. 그는 석방 이후 쿠바로 넘어가 망명생활을 하였으나 1974년 비밀리에 브라질에 돌아왔습니다.
지르세우는 군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성형수술을 받고 신분을 위장한채 파라나 주의 소도시에 정착합니다. 여기서 옷가게를 열고 지역 여성과 결혼까지하며 평온한 생활을 보냈으나 부인에게 끝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1979년 군부독재하의 정치적 폭력사건에 대해 군부측이나 반정부측 모두 사면령이 떨어지자 지르세우는 큰 주저함이 없이(제 개인적 느낌이긴 한데 다음을 보면 정말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상파울루로 돌아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형수술을 다시 받아 자신의 이전 얼굴을 되찾았으며 부인과 옷가게를 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파울루로 돌아온 지르세우는 PT 당 창건에 참여하여 창립멤버이자 룰라의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1995년 당의장에 오르고 나서는 룰라의 집권에 방해가 될 완고한 마르크스주의 원로들을 대거 몰아냈으며, 노동자당을 71년을 집권했던 멕시코의 제도혁명당(Institutionlal Revolutional Party)처럼 안정적 집권구도를 만들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지르세우에 대해 이코노미스트 브라질 지국장이었던 레이드는 국가위에 노동자당을 두려고 했던(즉, hidden agenda가 있는) 매우 차갑고 무자비한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측근은 팔로시입니다. 그는 원래 의사였으나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어 군부독재에 맞섰던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팔로시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성향을 크게 바꿔 실용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화 조류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노동자당에 다수 포진한 활동가 그룹으로는 전문적 대응이 어렵다고 보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책그룹을 만들어 룰라의 경제정책을 성장정책 복원과 빈곤/불평등/범죄 감소에 초점을 맞추도록 만들었습니다.
레이드는 팔로시에 대해 매우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데 그의 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유연한 사고를 높게 산 것 같습니다.
세번째 인물은 현 대통령인 지우마 호세프입니다. 그녀의 이력에 대해서는 지난 글 '여대생 지우마 이야기'에서 소개했습니다. 사실 호세프는 노동자당의 창립멤버도 아니고 선출직 경험이 거의 없는 정치무명에 가까왔습니다.
호세프는 반독재투쟁 이후 주로 에너지 분야의 행정가로 경력을 쌓았는데 룰라 정권 초기에는 페트로브라스의 이사회 의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호세프는 페트로브라스 이사회 의장 다음에는 에너지 장관을 맡았는데 다음 편 글에서 소개할 스캔들로 지르세우와 팔로시가 거의 동시에 실각하자 룰라의 지명을 받아 지르세우가 맡았던 비서실장이 되어 룰라의 핵심 측근으로 급부상합니다.
결국 3선에 나서지 않기로 한 룰라는 자신의 후계자로 호세프를 선정하는데 일천한 당 기반, 선출직 경험의 부재 등의 약점을 극복하고자 호세프는 PAC라는 경제개발 정책을 주도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PAC는 거의 2천억 달러가 소요되는 대 개발 정책이었는데 가로등 설치, 배수시설 확충 그리고 파벨라 현대화 등에 초점이 맞추어진 시민들 노출이 큰 전시성 사업이 많았습니다.
대표적 사업은 리우데자네이루의 고지대 파벨라에 케이블 카를 설치한 것입니다. 계단이 1,200개나 되는 파벨라에 아래 사진처럼 케이블 카가 놓여지다 보니 관광객들까지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파벨라 투어에 나설 정도가 되었습니다.
* 리우 파벨라에 놓인 케이블 카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e/Partindo_da_Esta%C3%A7%C3%A3o_da_Baiana_do_Telef%C3%A9rico_no_Complexo_do_Alem%C3%A3o_%282%29.JPG
마지막 인물은 룰라 1기와 2기 전반(2003-2008)에 걸쳐 환경부 장관으로 있었던 마리나 시우바입니다. 그녀는 브라질의 아마존 오지에서 고무 채집 농가의 딸로 태어났는데 정말 밑바닥에 가까운 어린 시절을 보낸 입지전적인 여성입니다. 극도의 빈곤과 인프라가 낙후된 오지의 삶 속에서 말라리아에 6번이나 감염되었고 중금속에 오염된 식수를 마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16살이 되어서야 처음 읽는 법을 배웠으며 44살이 되어서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는데 대학 학자금은 메이드 생활을 통해 충당했다고 합니다.
고통스런 삶 속에 그녀는 수녀가 되고자 하였으나 교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노조지도자가 되어 노동자당의 창립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아마존 지역의 삼림훼손을 막기위해 노력했고 실제 환경부 장관에 임명되어 벌채를 억제하는 조치를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룰라가 경제성장에 집착하며 아마존 보호에 등한히 하자 노동자당을 탈당하고 호세프에 맞서 대통령 선거에 나오기도 합니다. 비록 3위에 그쳤고 위에서 소개한 룰라 측근 3인에 비하면 측근이라고 불리기도 어렵지만 마리나 시우바의 평범하지 않은 이력은 룰라와 다른 3인의 인생역정에 결코 뒤지지 않아 보입니다.
룰라-호세프 정권에 다가오는 위기의 조짐
룰라 편을 마무리 하기에 앞서 2001년 골드만삭스의 보고서로 명명된 21세기를 주도할 BRICs의 첫 이니셜 국가인 브라질에 닥친 위기의 조짐에 대해 간단히 적어 봅니다.
아래 그림은 2002년과 2006년 대선의 결선투표에서 룰라와 상대후보의 득표율을 주별로 표시한 것입니다. 2002년 룰라는 최종적으로 61.3%를 득표했는데 모든 주에서 상대후보를 앞섰지만 최대 지지율을 보인 주가 70% 전반 정도로 지지표의 쏠림이 아주 극단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6년 2차 투표에서는 최종 득표율이 60.80%로 4년전에 비해 약간 감소했지만 지지도 분포는 큰 변화를 보입니다.
상대당인 카르도주의 PSDB당 후보 Alckmin의 득표율이 과반을 넘는 주가 부유한 남부를 중심으로 나타났으며 룰라의 지지가 80%를 넘는 쏠림표가 북부와 북동부 주에서 나타났습니다.
4년만에 룰라는 빈곤지역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지만 부유한 남부의 중산층의 외면을 받아야 했습니다.
룰라가 염원한 빈부 격차의 해소와 사회통합은 여러 긍정적 지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 2002년 대선 2차 투표 결과: 룰라(61.3%), 세하(38.7%)

http://www.electoralgeography.com/new/en/countries/b/brazil/brazil-presidential-election-2002.html
* 2006년 2차 투표 결과

http://www.electoralgeography.com/new/en/countries/b/brazil/brazil-presidential-election-2006.html
다음 글에서는 브라질의 정치구조적 한계와 최근 스캔들(Mensalo과 Operation Car Wash)에 대해 다룰예정입니다.
그리고 최종 편에서는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정리할 예정입니다. 이제 끝이 보이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참고로 본 시리즈 글은 Michael Reid, 'Brazil', Gordon Kerr, 'A Short History of Brazil', David Brion Davis, 'Inhumane Bondage', Joseph E. Stiglitz and Justin Lin Yifu, 'The Industrial Policy Revolution I', IDB, 'Rethinking Productive Development', Tim Weiner, 'Legacy of Ashes: The History of the CIA' 그리고 보리스 파우스트, '브라질의 역사', 이성형, '브라질: 역사, 정치, 문화', 리오던 로엣, '브라질: 남미의 새로운 지배자', 기와가타 미노루, '설탕의 세계사', '브라질: 변화하는 사회와 새로운 과제들'과 이코노미스트, FT, 뉴욕타임즈 등의 외신과 영문 위키피디아 등 인터넷 자료를 참조하여 주관적으로 작성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브라질 시리즈
1부, 영화 미션 속 원주민과 엉클 톰 후손들의 역사이야기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68585CLIEN
2부, 커피왕국의 노예해방 이야기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68748CLIEN
3부, 오귀스트 콩트에서 또 하나의 대장정까지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69067CLIEN
4부, 파시즘, 근대화, 민중주의 그리고 비극적 최후: 어느 독재자의 삶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69250CLIEN
5부, 모더니티와 체게바라 그리고 CIA: 불안한 민주주의 실험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69594CLIEN
6부, 여대생 지우마 이야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70049CLIEN
7부, 어떤 경제기적 이야기: 비행기, 세하두, 신의 도시 아이들까지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70237CLIEN
8부, 성공한 쿠데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독재에 대한 사면 문제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70605CLIEN
9부, 민주주의의 배신(?), 잃어버린 10년 그리고 진짜 계획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71029&page=3CLIEN
10부, 신자유주의 시대와 민영화 이야기: 유럽과 중남미의 차이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72273&page=2CLIEN
참조글, 남미를 뒤흔든 어떤 전쟁 이야기: 루쏘에서 니체의 여동생까지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66066CLIEN
성불하실겁니다.
from CV
#CLiOS
from CV
#CLiOS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가내평안 하시기를.... (그래야 좋은 글 계속 올려주실테니... ㅋㅋ)
from CLIEN+
클리앙에 재능기부해주셔서 머리와 마음이 풍성해지는 기분이에요.
from CV
from CV
책으로 엮어야겠는데요.
블로그 하나 만드시죠!!^ ^
몇몇 분들이 책 이야기 하시는 데, 솔직히 그럴 정도의 글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자료들을 보고 짜깁기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저도 몇권의 한글 서적을 참조하였지만 의외로 브라질 관련 책들은 몇권 있습니다. 다만 룰라/호세프 정권의 여러면을 심층적으로 고민한 책은 잘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일일이 대댓글 달아드리지 못한 점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CLiOS
from CV
from CV
정성드린 글 감사합니다.
from CL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