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면서>
안녕하세요.
최근 글을 쓰다보면 항상 주장이라는 것은 반대의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적인 정답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행운에 속지 마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봤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현상은 이 책을 쓰고 난 뒤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 나심 니콜라스 탈렙, “행운에 속지 마라”
☐ 생각이 다 정리된 다음에야 책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은데, 저자는 반대로 말합니다.
- 다 쓰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고요.
머릿속의 생각은 완성된 척을 합니다
☐ 머릿속에 있을 때 생각은 늘 그럴듯합니다.
- 앞뒤가 맞는 것 같고, 근거가 충분한 것 같고, 누가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런데 막상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 두 번째 문장에서 벌써 막힙니다.
☐ 왜 꺼내놓기 전에는 완벽해 보이는 걸까요.
☐ 첫째, 우리는 익숙함을 이해로 착각합니다.
- 여러 번 떠올려 본 생각은 머릿속에서 매끄럽게 굴러갑니다.
- 그 매끄러움을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신호로 읽어 버립니다.
- 사실은 그냥 익숙한 것뿐인데요.
☐ 둘째, 머릿속에는 검증이 아니라 확인만 일어납니다.
- 결론이 이미 있으니, 떠오르는 근거들이 그 결론을 향해 자동으로 줄을 섭니다.
- 반대편은 애초에 소환되지 않습니다.
☐ 셋째, 한 번에 볼 수 있는 양이 너무 적습니다.
- 사람의 작업기억이 동시에 붙들 수 있는 정보 덩어리는 네 개 안팎이라고 합니다.
- 생각 전체를 한눈에 펼쳐 놓고 대조하는 일이 애초에 불가능한 겁니다.
- A와 B를 볼 때는 C를 잊고, C를 볼 때는 A를 잊습니다.
- 모순은 그 사이에 숨습니다.
☐ 인지과학에는 ‘설명 깊이의 착각’이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 지퍼나 자전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잘 안다고 답하는데, 실제로 단계별로 설명해 보라고 시키면 스스로 작성한 이해도 점수가 뚝 떨어집니다.
☐ 우리가 안다고 느끼는 것의 상당 부분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지 설명 그 자체가 아닌 셈입니다.
문장은 얼버무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말은 대충 넘어갈 수 있습니다.
- 목소리 톤이나 표정, 듣는 사람의 호의가 빈틈을 알아서 메워줍니다.
☐ 글은 그게 안 됩니다. - 주어를 정해야 하고, 서술어를 붙여야 하고, 앞 문단과 뒤 문단을 이어야 합니다.
☐ 무엇보다 글은 밖에 남습니다. - 전에 쓴 문장이 그대로 있으니, 방금 쓴 문장과 나란히 놓고 볼 수 있습니다.
- 머릿속에서는 절대 안 되던 대조가 종이 위에서는 그냥 됩니다.
- 그래서 쓰다 보면, “어, 이 부분이 아까 한 말이랑 안 맞는데”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 논리가 맞아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니 논리를 맞추게 되는 겁니다. 순서가 반대입니다.
꼭 글이 아니어도 됩니다
☐ 상대방에게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정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 고민을 이야기하다가 혼자 답을 찾은 경험,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 프로그래머들 사이에는 ‘러버덕 디버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 문제가 안 풀릴 때 책상의 고무 오리 인형에게 코드를 한 줄씩 설명하다 보면 스스로 버그를 찾아낸다는 겁니다.
- 오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 설명하는 행위 자체가 일을 합니다.
- 그리고 그 말을 꺼내놓고 며칠 밤을 자고 나면 그제야 실마리가 잡히는 일도 많습니다.
☐ 이건 심리학에서 ‘부화 효과’라고 부르는 현상과 이어집니다.
- 문제를 붙들고 있다가 잠시 놓아두면 오히려 해법이 떠오르는 경우인데 특히 잠이 그 역할을 합니다.
☐ 2004년 “네이처”에 실린 실험이 있습니다.
- 참가자들에게 숨은 규칙이 있는 계산 과제를 시킨 뒤 한 집단은 하룻밤 자게 하고 다른 집단은 깨어 있게 했습니다.
- 다시 과제를 시켰을 때 숨은 규칙을 알아낸 비율은 잠을 잔 쪽이 약 59%, 깨어 있던 쪽이 약 23%였습니다.
- 잠이 통찰의 확률을 2배 넘게 올린 겁니다.
☐ 연구자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 잠은 기억을 그냥 저장하는 게 아니라 재구성한다는 것.
- 낮에 말이나 글로 꺼내놓은 조각들이 밤사이 다시 배열되는 셈입니다.
☐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꺼내놓지 않은 생각은 재료가 되지 못합니다.
- 말하든 쓰든 일단 머리밖으로 나와야 그 다음 작업이 시작됩니다.
결국 제일 먼저 반박당하는 사람은 저입니다
☐ 처음에는 남을 설득하려고 씁니다.
- 쓰다 보면 제일 먼저 설득해야 할 사람이 저라는 걸 알게 됩니다.
- 확신했던 주장에 예외가 너무 많다는 걸 발견하기도 하고, 근거라고 믿었던 게 사실은 오래된 인상에 불과했다는 걸 알기도 합니다.
☐ 아집도 마찬가지입니다.
- 아집은 반박받기 전까지 아집처럼 생기지 않았거든요.
- 글로 옮겨서 눈앞에 놓아야 비로소 그 모양이 보입니다.
☐ 그래서 다 쓰고 나면 처음 쓰려던 것과 조금 다른 글이 되어 있곤 합니다.
- 저는 이게 글쓰기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보람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 글을 쓰기 전의 저와 쓰고 난 뒤의 저는 조금 다른 사람입니다.
- 대단한 변화는 아닙니다.
- 확신 하나가 조건부 의견으로 바뀌거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전제 하나에 물음표가 붙는 정도입니다.
- 그런데 그 작은 것들이 쌓이면서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나가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엑셀로 숫자를 적는것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