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면서>
안녕하세요.
최근 책을 읽으면서 이것저것 정리해보면서 글을 써보고 있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항상 주장이라는 것은 반대의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적인 정답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서양 역사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호기심은 미덕이 아니라 ‘죄’였습니다.
“아담과 이브와 선악과 이야기, 이카루스와 태양 이야기,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 등 호기심을 소재로 한 옛이야기들이 전하려는 교훈은 주로 경고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호기심을 맹렬히 비난했다.”
- “큐리어스”, “이언 레슬리”
□ 지금도 누군가 질문을 던지면 공기가 달라집니다.
- 답하는 쪽은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 “그런 걸 뭐하러 묻나”는 핀잔이 돌아옵니다.
- 특히 질문이 윗사람을 향할 때, 그것은 은근히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읽힙니다.
-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어느새 대드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죠.
□ 그러니 호기심을 죄로 여기던 시대의 이야기는
- 우리에게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신은 꼬치꼬치 따져 묻는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마련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 이 문장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신이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다룹니다.
- 그리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농담처럼 위 대답을 한겁니다.
- 정작 그 자신은 그렇게 얼버무리지는 않겠다고 말하죠.
□ 신비를 캐묻는 자를 두고 “지옥에나 가라”고 쏘아붙이는 말이 ‘상투적인 농담으로 통했다'는 것입니다.
- 그만큼 호기심을 죄악시하는 정서가 사회 밑바닥까지 배어 있었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하필 호기심이 문제였을까
□ 당시 라틴어 ‘쿠리오시타스(curiositas)’는 ‘무절제하고 방종한 앎에 대한 탐욕’을 가리켰습니다.
- 반대로 ‘스투디오시타스(studiositas)’는 절제 있고 질서 잡힌 배움이라는 뜻입니다.
□ 서양 정신의 출발점에 이미 경고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 ‘에덴동산의 타락’입니다.
- 아담과 하와가 손을 뻗은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고
- 뱀의 유혹은 “너희가 신처럼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였습니다.
□ 여기서 호기심을 죄로 만든 이유가 나옵니다.
1) 교만입니다.
- 어떤 앎은 신의 영역에 속합니다.
- 인간이 그 선을 넘어 신만이 알아야 할 것을 캐려 드는 것은 자기 분수를 잊은 오만이었습니다.
-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던 인간이 받은 벌을 떠올리면 됩니다.
2) 산만함입니다.
- 호기심은 영혼의 시선을 창조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찮은 구경거리로 돌립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길에서 시체를 구경하려 몰려드는 군중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 딱히 알아야 할 이유도 없이 그저 보고 싶어 눈을 떼지 못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 정작 바라봐야 할 것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지요.
3) 금지된 것을 파헤치는 위험입니다.
- 점성술, 점술, 마법처럼 감춰진 지식을 부정한 방법으로 캐내려는 시도가 여기 속했습니다.
- 신이 일부러 감춰둔 자연의 비밀을 억지로 들춰내는 것 역시 불경이었습니다.
호기심의 지위가 살아난 때는?
□ 이 긴 죄의 역사가 뒤집힌 것은 르네상스와 과학 혁명을 거치면서입니다.
-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을 관찰하고 실험하며 캐묻는 태도야말로
- 인간을 진보시키는 힘이라고 선언했습니다.
- 감춰진 것을 들춰내는 일은 더이상 불경이 아니라 지식의 정당한 방법이 되었고
- 한때 지옥으로 보내야 할 자들의 표식이었던 “왜?”라는 물음이 문명을 앞으로 미는 동력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호기심을 죄로 몰던 옛 논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 “네가 감히 그걸 묻느냐” 라는 신의 영역을 넘본다는 그 교만의 혐의는
- 오늘날 윗사람에게 질문하는 아랫사람에게 그대로 씌워집니다.
- “쓰잘데기 없는 걸 궁금해한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에드먼드 펠프스는 산업혁명에 불을 지핀 풀뿌리 혁신 정신이 오늘날에는 국가와 기업 관료제의 무게에 눌려 질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 “큐리어스”, “이언 레슬리”
□ 중세의 신학자들은 질문을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습니다.
- 우리는 여전히 질문을 사람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봅니다.
- 대상이 신에서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
- 질문하는 자를 불편해하는 마음의 뿌리는 놀랍도록 닮아있습니다.
□ 호기심은 미덕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 하지만 누군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 우리의 첫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 그 오래된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셈입니다.
원래 뇌는 '생각'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이런 뇌로 엉뚱하게(?)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등의 능력이 생긴 데에서
우리 인류의 많은 고통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의미 중독, 불안, 죽음에 대한 자각 등등...
아마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온 수많은 종교, 철학, 사상들은
이 '생각'하는 고통을 어떻게 견디고 다스릴 수 있을지 고민한 시도들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서양의 신 숭배 : 생각하지 말라. 사고 기능은 오직 신을 숭배하는 데에만 사용해야 한다. 그 외의 것에 호기심을 갖거나 하는 것은 죄악이다.
- 동양의 자연, 공 사상 : 사고를 초월하라.
- 철학, 과학 : 더 치열하게 사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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