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대 문명의 초거대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뇌와 몸에는 여전히 수백만년간의 소규모 부족 사회에 최적화된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현대의 인류 사회라는 거대한 소프트웨어 또한 그런 오래 전의 레거시 코드로 운영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인간을 무리로 묶어온 '공감'의 본능,
더 큰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점점 중요해진 '보편적 논리',
그리고 이 두 성향의 충돌이 INTP 같은 성향, 사회적 관습, 영화 미드소마 같은 사례에서
드러나는 양상을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 제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 https://buly.kr/44z619E )
체계화(Systemizing) vs. 공감하기(Empathizing)
심리학자 사이먼 배런코언은 그의 책 '패턴 시커(The Pattern Seekers)'에서
인간의 인지 스타일을 '체계화'와 '공감하기'라는 두 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마다 체형이나 기질이 다르게 태어나듯,
이런 성향 역시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차이라고 말합니다.
배런코언의 그래프에 대략적으로 인물들을 배치해보자면...
- 공감하기(Empathizing)
타인의 감정이나 사회적 분위기, 집단의 조화를 우선시하는 성향입니다.
대다수 사람은 이 성향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논리적 모순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게 예의니까"라는 사회적 신호만으로도
뇌의 보상 체계가 만족을 얻습니다.
이 성향이 극단적인 경우 윌리엄스 증후군과 부합되는 면도 있는데,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전무하고 쉽게 친밀감을 느끼며,
타인의 감정에 쉽게 이입되어 타인이 고통받는 장면을 보면
자신도 강한 정서적 고통을 느낍니다.
반면에 추상적 규칙을 추출하는 능력, 수리 능력 등은 현저히 낮습니다.
- 체계화(Systemizing)
이 성향이 높은 사람은 사물의 작동 원리, 규칙, 체계를 파악하려는 성향이 강해서
어디에서든 그런 패턴을 찾아내려 합니다.
이들에게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 논리가 중요합니다.
그의 가설에 의하면 태내에서 노출된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을수록
정보를 처리할 때 전체적인 맥락보다
세부적인 구성 요소와 그들 사이의 규칙을 찾는 방식에 최적화됩니다.
한편 이들은 집단에 동조할 때 분비되는 옥시토신에 대한 민감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저자는, 자폐는 이 성향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이고
이 체계화 성향이 강한 패턴 시커(pattern seeker)들이
돌도끼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발명과 개량을 이끌어온 중요한 축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구분은 요즘 유행하는 MBTI의 유형 구분으로 보자면
F(feeling;감정형)와 T(thinking;사고형)과도 겹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공감하는 동물 : 집단의 오답에 동조하는 게 생존에 유리한 이유
이 두 성향 중, 인간을 포함한 무리 동물에게 있어 기본 모델은 공감형입니다.
내 눈에 포식자가 보이지 않더라도 무리 전체가 도망치기 시작하면 일단 같이 뛰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입니다.
여기서 '왜 뛰는가'라는 논리적 인과관계는 생존에 부차적인 문제이며,
이유를 생각하기 위해 도망을 미루는 개체들은 도태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동물들에게 있어 '다들 그렇게 함'은 곧 '환경에 대한 정답'입니다.

또한, 사회적 동물에게 무리로부터의 소외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설령 다수가 틀린 선택,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들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혼자만 맞는 말을 하다가 쫓겨나는 것'보다 생물학적 적응도가 높을 것입니다.
특히 인간은 '대규모로 협력하는 능력' 덕분에 다른 동물들보다 크게 발전한 종이고,
협력하지 않는 100명의 천재 원시인들보다는
잘 협력하는 100명의 평범한 원시인들의 집단이 살아남아 번식하기에 훨씬 유리합니다.
애쉬의 실험 - 내가 이상한가?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는 왼쪽 선과 같은 길이의 선을 오른쪽 그림에서 선택하도록 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피험자 외에 함께 참석한 7~8명은 틀린 답을 말하기로 미리 협의한 가짜 참가자들인데
이 때 실제 피험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정답률이 99%였던 사람들도
집단이 일제히 오답을 말하자 약 75%가 적어도 한 번 이상 집단의 오답에 동조했습니다.
후속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집단에서 배제될 때 신체적 통증과 일부 겹치는 뇌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류는 무엇이 사실인지, 옳은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공감하기'를 기반으로 무리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족 사회에서의 공감

무리생활을 하는 다른 여러 종과 마찬가지로,
인류는 오랜 기간동안 많아야 150명 정도의 작은 부족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런 작은 무리에서는 저 사람이 내 사촌인지, 어제 나에게 고기를 나눠줬는지 같은
개인적 기억이 의사결정의 핵심입니다.
굳이 논리적으로 검증하지 않아도 '우리'라는 유대감이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공감하기'라는 건 사실 '우리 편에게 공감하기', 혹은 '우리끼리의 공감'입니다.
'공감'은 중립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습니다.
흔히 사랑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은 '우리 편'에 대한 신뢰와 애착을 강화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집단에 대한 폄하와 불신을 높이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Mina Cikara 등의 뇌영상 연구에서는,
열성적인 스포츠 팬들은 자기 팀이 실패하거나 라이벌 팀이 이길 때
고통과 갈등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고
자기 팀이 이기거나 라이벌 팀이 질 때는 보상과 만족에 가까운 뇌 반응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공감'이란, 우리 부족/외부인, 우리 편/적을 나누는 행위,
그 사이에 벽을 더 높게 쌓는 행위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부족 사회에서는 '우리 편 = 나를 도와줄 존재 = 나의 생존 확률을 높임 = 선(善)'이 되고
잠재적 포식자인 외부인은 적이자 악(惡)이 됩니다.
부족간에 전쟁을 하며 살인을 할 때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나와 동일한 인간이 아니라
'사악한 존재' '악마의 자식' '짐승' 같은 것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영화 Civil war
더 나아가 심리학자 폴 블룸은 그의 책 '공감의 배신(Against Empathy)'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공감은 스포트라이트와 같이 내 눈 앞에 있는 한 사람의 고통에는 강렬하게 반응하게 만들지만
그 영역 밖에, 통계 속에 존재하는 수천 명의 비극이나 장기적인 결과에는 눈을 감게 한다.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지침이며, 극단주의나 인종차별, 공감하지 않는 대상을 향한 폭력을 유발하기도 한다.
우리는 공감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어떤 행동이 옳은지 판단하는 '이성'을 이용해야 한다.
또한 조슈아 그린은 'Moral Tribes'에서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생겨난 도덕은 부족 내부의 협력의 문제를 잘 해결해왔지만
부족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도록 설계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즉, 대규모 사회에서의 윤리는 부족적인 공감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주장들이라 하겠습니다.
대규모 사회에서의 보편적 논리
이런 인류의 삶에서 공감을 넘어 '보편적인 논리'라는 도구가 점점 중요해지게 되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건 인류의 삶이 작은 집단 기반에서 거대 집단 기반으로 변해감에 따른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며 사람들은 도시를 만들고 국가를 이루는 등,
더 큰 집단을 이루고 여러 작은 무리들이 서로 같은 공간에서 교류하며
서로 다른 부족들이 함께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큰 집단에서는 개인적 친밀감, 부족 내의 관습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충돌을 빚는 원인이 됩니다.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있는 보편적 규칙, 객관적인 법, 계약이,
즉 '우리끼리의 공감'보다는 '보편적인 논리'가 더 필요해지게 됩니다.
애초에 무리 동물에게는 생물학적 개체는 있을지언정, '주체적인 개인'이라는 개념은 희미합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동물은 '자유로운 단독자'라기보다는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됩니다.
개미나 벌 등과 유사하게,
인류 역시 부족 시절의 각 개인은 부족이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부족의 한계를 넘어 거대 사회를 건설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수만 명의 감정과 이해관계를 일일이 동기화하는 것은 시스템의 과부하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일 시스템의 과부화를 피하기 위해 인류는 '부족'이 아닌 '개인'이라는 논리적 단위를 기준으로 소통하는 쪽으로,
거대 사회가 더 크고 정교해질수록 더욱 개인주의와 보편적 논리를 중시하는 쪽으로 진화해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에니악같은 초기 컴퓨터 또한 몸집이 큰 단일 시스템이었고, 확장성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후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컴퓨팅 환경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개별 시스템들이
공통의 프로토콜 아래 네트워킹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다른 무리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공감 회로를 탑재한 뇌를 갖고 있지만
다른 동물들과 달리 초거대 사회를 이루며
더이상 공감 회로만으로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새로운 질서를 제시한 아키텍트들
예수, 소크라테스, 싯다르타, 공자 등은
이렇게 본격적으로 대형 도시와 국가가 형성되며
서로 다른 작은 부족들이 더 가깝게 얽혀지내게 되는 시절,
사람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질서가 요구되던 시점에
새로운 윤리기준과 사고방식을 제안한 인물들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이 즈음을 '축의 시대'라 칭했습니다.
이들은 "우리 부족의 생존이 선이다. 우리 부족이 믿는 게 진리이다"라는,
부족이 모든 것의 기준이었던 사고를 벗어나 보편적인 '개인'들을 기준으로 삼는 등,
더 넓은 사회에서의 새로운 질서를 제안했습니다.
싯다르타는 인간을 나누는 카스트 제도의 비합리성을 직시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고통받는다는 보편 법칙(四聖諦)을 발견하고
부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라"며
부족의 혈연, 신분 구조를 초월했습니다.
예수는 유대 부족의 선민의식, 부족신 야훼 숭배를 초월하며
"너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동족과 너를 돕는 이방인이 있다면 그 중 누가 너의 이웃이겠는가",
"이웃을 사랑하라. 사마리아인과 로마의 세리 같은 원수, 야훼가 저주했다는 병자들까지도."는 식의
주장을 하다 처형당했습니다.
야훼를 향한 이스라엘인의 기도와 이란을 침공한 미국인들의 기도.
부족본능은 부족신에게 자기 부족의 생존과 이방인(=적)의 타도를 요구합니다.
공자는 수십 개의 작은 국가들이 서로 싸우던 춘추전국이라는 상황에서
'인(仁)'을 혈연을 넘어 천하 모든 개인들에게 확대 적용하려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도시의 신화를 그들의 방식대로 믿는 것이 정당한지 논리적인 질문들을 끝없이 들이밀었는데
결국 '부족의 관습을 해치는 자'로서 독배를 마셨습니다.
각자 나름의 한계는 있었지만, 이들은 "왜 자기 부족만이 옳다는 것인가"를 물으며
도시와 국가라는 거대한 사회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개인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이성', '자비', '인(仁)',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언어, 공통의 네트워킹 프로토콜을 내세운
보편주의자의 면모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상업의 발달, 과학혁명 등의 변화에 따라
인류에게 있어 보편과 논리를 지향하는 경향은 점점 더 강화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수십, 수백만년 이상 우리의 뇌에 생물학적으로 자리잡아온 부족 본능은
여전히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공감을 중시하고("해결을 하려고 하지 말고 공감을 하라고!")
정치인들은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속시킵니다.
기업들은 브랜드라는 토템을 만들어 충성 고객을 만들고
SNS에서는 관심사를 따라 거대한 가상 부족들이 생겨납니다. (디지털 에코 챔버)
우리는 여전히 원시시대의 뇌와 몸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정치가로서, 마케터로서, 유튜버로서 성공하려면, 즉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보편과 논리를 말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부족 본능을 자극하는 쪽이 훨씬 쉬운 길입니다.
한 가지 역설을 덧붙이자면, 예수와 싯다르타의 경우 또한 그들이 보편을 지향했다는 점보다는
그들을 소재로 이용하여 만든 '종교집단'이라는 부족이 사람들에게 더 강한 매력을 발해온 게 아닐까 합니다.
보편을 추구한 인물들조차 부족 본능을 따르는 팬덤에 의해 아이돌(우상)로서 소비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타집단을 혐오할 핑계로 사용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보편적 논리란 '확대된 공감'이 아닐까
뇌라는 건 생물이 움직이고 반응할 수 있도록 진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장 원시적인 뇌는 그저 신경망이었습니다.
자극 -> 반응 이라는 단순한 스위치 같은 것이었죠.
먹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위험한 곳으로부터는 멀어지는 이 '운동'을
더 효과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뇌가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후, 예전의 경험을 저장하고 다음 행동에 활용하는 '기억'이라는 기능이 추가되고
이 기억을 조합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측하거나 상상하는 능력,
즉 '사고'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포유류에서는 감정과 사회적 유대를 관장하는 변연계가 발달합니다.
타인의 감정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공감 회로는 이 오래된 층위에 뿌리를 둡니다.
이건 무리 내에서의 생존을 위한 자동적인 동기화 작용입니다.
일반적인 영장류 중에서도,
작은 무리보다도 훨씬 큰 사회를 이루게 된 인류에 이르러서는
진화적으로 가장 늦게 발달한 전전두엽에 주로 기반하는,
추상적 원칙을 추론하고 보편 규칙을 구성하는 능력이 발달하게 됩니다.
이건 공감 기능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느린 과정입니다.
이 진화적 순서는 왜 공감 기능이 보편 지향의 논리보다
훨씬 더 강력한 기본값으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단서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회적 맥락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공감을 '인간미'로, 논리를 '비인간적'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이에 대해 배런코언 같은 경우는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이 아닌 신경다양성의 관점을 제안합니다.
공감 지향과 논리 지향은 그저 인간 뇌가 가진 자연스러운 변이 스펙트럼에서 나타나는 측면들일 뿐인데,
그럼에도 논리 지향이 '차갑다'는 평가를 받고
자폐인들이 사회에서 격리되다시피하게 되는 건
우리 사회의 기본 설정값이 부족 본능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는 뇌의 결함이 아니라 환경과 뇌의 불일치라고 주장합니다.
공감 능력은 무리동물로서의 인간과 뗄 수 없는 관계의 본능일 겁니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감정과 이성이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뇌의 감정 영역이 손상된 환자들은 논리적 추론 능력은 멀쩡했지만,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 같은 사소한 결정조차 내리지 못했습니다.
선택의 기준이 되는 '가치'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에서 오기 때문이고
또한 논리 체계 자체도 그 근본적인 가치 판단은 감정적 선호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족적 공감이 아예 없다면,
사람들간의 간단한 상호작용 하나하나도
논리적 검증, 법과 계약을 통해야 할 텐데 이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원시시대의 인류에게는 가능할 때 많은 당분을 섭취하고
가능한 한 많은 지방을 몸에 저장하는 본능을 발달시키는 게 유리했겠지만
음식이 풍부해진 현대문명이라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런 본능을 억제하고 '적절히' 섭취하는 편이 더 유리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족 본능, 공감 회로와 보편적인 논리 지향은
선과 악, 미개함과 고등함으로 나뉘어지는 게 아니라
현대문명이라는 환경에서 적절히 제어하며 사용해야 할 두 측면이라 하겠습니다.
인류의 오랜 본능인 공감 회로가 과거의 부족 사회를 넘어
현대의 거대사회라는 환경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도록 말이지요.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인류의 도덕적 진보를
'이성을 통해 공감의 대상을 가족에서 부족으로, 국가로,
그리고 전 인류와 생명체로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제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나와 타인을 가르는 좁은 경계 안쪽에 있는 것이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은 나(개체)를 지키기 위한, 타인과 경쟁하여 살아남기 위한 원초적, 생물학적인 동기입니다.
좀더 넓은 차원에서, 우리 편과 적을 가르는 경계 안쪽에 있는 것이 공감과 도덕입니다.
이것들은 우리 집단을 지키고 타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확장된 이기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나 vs.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된 공감과 도덕은
'우리 vs. 그들'의 문제, 즉 집단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작동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경계를 넘어 작동하려는 것이 보편적 논리, 이성, 법률, 규칙 등입니다.
이것은 인류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려는 시도이며,
그런 의미에서 확장된 공감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부족사회에서 만들어진 종교적, 사회적 관습들

용량이 작은 옛 컴퓨팅 환경에서는 온갖 눈물겨운 최적화와 압축 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1980년대 슈퍼마리오의 구름과 풀숲은 동일한 패턴을 사용하면서
색상만 바꿔 표시하는 식으로 용량을 줄인 유명한 예입니다.
부족 시대로부터 이후까지 만들어진 여러 종교적, 사회적 관습들 또한
당시의 열악한 정보 처리 환경(과학 기술의 부재, 짧은 수명 등)에서 발생한
최적화의 결과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이 경험적으로 얻은 결론인
"돼지를 사육해 먹는 건 우리 부족의 생존에 좋지 않다"라는 명제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방대한 정보가 필요하지만,
"신의 노여움을 산다"는 한 문장으로 손실 압축하면
용량을 거의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즉각적인 실행이 가능해집니다.
친절한 주석 따위는 없는 실행파일(*.exe)인 셈이죠.

슈퍼마리오의 구름과 풀숲이 패턴을 공유하듯,
고대 사회에서도 "위생 관리"와 "도덕성"은 같은 패턴(성결과 타락)을 공유했습니다.
물을 붓고 몸을 씻는 행위가 곧 영혼을 씻는 행위,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영혼의 타락으로 치환된 것은
인지적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한 최적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그들이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하고 번식하기에 적당한, 잘 작동하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맹수가 있든 없든 무리가 뛰면 따라서 뛰는 게 생존하기 유리하듯,
납득이 되든 안되든 적자생존해온 설명을 받아들이는 게 생존하기 유리합니다.
현대는 지식이나 교육수준 등,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면 신이 들어주신다"
"우는 아이에게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대"
"실내에서 모자를 쓰는 건 실례"라는 등의,
'이유도 원리도 모르겠고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작동하는 레거시 코드'들은
여전히 우리 시스템 곳곳에 깊숙이 박혀있습니다.
지식과 기술(meme)은 급속히 발전했지만
뇌와 몸(gene)의 진화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부족사회의 질서 하에 있는 부분이 많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신입 개발자가 "누가 만든 건지도 모르고 주석도 없고 그동안 환경도 많이 바뀌었는데
비효율적인 수십년 전 이 코드를 왜 쓰는 거죠?
자기 환경에서는 버벅거린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새로 만드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요"라고 할 때
선배가 "오늘 밤에 아무 탈 없이 돌아가는 코드가 좋은 코드야.
나도 그 코드가 왜 거기에 있는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돌아가고 있다면 닥치고 냅둬"라고 대답하듯,
체계화형 인간들은 "왜 실내에서 모자를 쓰면 안된다는 거야?"
"왜 성매매를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거야?"
"왜 홍동백서인 거야?" 라는 궁금증에 비슷한 답을 듣습니다.
계속 캐물어봤자 욕먹는 엔딩이 되기 십상입니다.
부족민들은 부족의 질서를 깨뜨리는 외부인의 공격에 대해 본능적인 방어 기제를 발동합니다.

물고기들이 왜 자신들이 무리를 따라 하나의 유기체처럼 헤엄치는지 모르듯이,
개미들이 왜 자신들이 베짱이처럼 놀지 않고 열심히 협력하며 집을 짓고 전쟁을 하는지 모르듯이,
인간들 역시 자신이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는 게 기본값입니다.
선배들도 모르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서 생존에도 성공하고 번식에도 성공해왔을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생성형 AI가 자기도 모르는 것에 대해 자동적으로 환각을 생성하는 것과 유사한 알고리즘으로,
혹은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 끼워맞추어 가짜 기억을 만들어 내듯이
가짜 설명, 즉 미신이나 징크스, 종교적인 교리, 신화 등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왜 몽골군이 물러간 거지?" - "신이 우리 일본을 지켜주었으니까"
"오늘 왜 이렇게 장사가 안 되지?" - "오늘 첫 손님이 재수없게 여자였잖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계화형이 찾아낸 설명 또한 가짜 설명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체계화형 인간들은 이런 오랜 본능을 거스르며 패턴을 찾는 것을 멈추지 못합니다.
보이는 시스템 너머의 보편적 논리를 찾는 것이 이들의 생물학적 보상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향의 뇌들이 인간 자신이 진화의 산물임을 발견하고
인류가 지금과 같이 살고 있는 이유를 탐구해온 것이겠지요.
"INTP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같아"
체계화 성향이 성격 유형으로 발현된 경우가 MBTI 유형으로 보자면 T와 공통되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게다가 외부의 질서보다 자기 내면에 집중하는 I 성향과 만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특히나 INTP 같은 성향이 '컴퓨터같다'는 식의 평가를 많이 받지요.
이들에게 있어 세상은 '공감하고 느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분석하고 해체하여 원리를 파악해야 할 거대한 기계'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관습, 예절, 분위기, 관계의 암묵적 규칙 앞에서
이들은 자꾸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다들 원래 이렇게 하니까"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만
이들에게는 오히려 설명이 시작되어야 할 지점입니다.
대다수 사람이 우리 부족의 평화를 위해 논리적 허점을 눈감아줄 때,
이들은 시스템의 결함을 보고 견디지 못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외부에서 아무리 "이게 정답이야"라고 말해도
자기 내부의 논리 회로에서 오류나 불합리가 발견되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혼인신고서에 기입될 몇백 바이트 정도의 정보를 위해
그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는 의식을 수행해야 한다니!" )
"사람은 마땅히 이래야 해" "그건 신의 뜻이야"라는 식의 표면적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그건 또 왜?" "이유가 뭐야?" "그 근거의 근거는 뭐야?" 를 묻고,
사물이든 사람들의 관계든 그것의 작동 원리, 규칙, 체계를 파악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부족 본능은 공감 성향을 도덕적 우월함으로 여겨 이들에게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왜 우리 부족의 편향된 감정에 동조해서 논리를 굽히지 않느냐"는 항의이며
이들에게는 폭력이자 억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왜 나쁜 사람이라는 거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공격을 했다고 하는 거지?"
"문제를 해결하려 한 건데 왜 차가운 사람이라는 거지?"
"근거를 묻는 게 왜 무례가 되지?" 같은 질문들이 쌓이면
차라리 입을 닫는 쪽을 선택하게 되기도 합니다.
( 싯다르타나 예수, 소크라테스 등도 부족으로부터 그런 비난을 받았습니다만
예수는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며 그 뇌들의 본능적인 작동방식을 이해했고
싯다르타는 무지로 인해 고통받는 그 뇌들을 위해 팔정도를 제시했습니다. )
한편으로는 이런 INTP 중에도 매 순간 상당한 인지적 비용을 치르며
사회적 인터페이스를 잘 구동하여 사회화가 잘 되어보이는 유형이 있기도 합니다.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처리해야 할 데이터'로서의 공감을 잘 처리하는 거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드웨어 차원에서 빠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별도의 소프트웨어를 작성해서 느리게 계산하며 적응하고 있는 셈입니다.
미드소마 : 부족주의자들의 천국, INTP의 지옥
영화 미드소마는 대규모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해 사는 현대인들의 뇌가
부족 본능을 만날 때의 공포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호르가 공동체는
공감과 부족 본능이 보편과 논리를 완전히 압도하는 곳입니다.
영화 미드소마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건
공동체 일원들이 누군가의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느끼며 똑같은 소리로 울부짖는 공감,
즉 미러링 행위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논리적 질문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의 유기체로서, 오직 '지금 우리 모두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가'만이 중요합니다.
한순간에 모든 가족을 잃고 슬픔에 빠져있던 여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대규모 사회에서는 독립된 개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그 고통에 압도되고 위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부족을 만나서 '개인'이라는 정체성을 벗고
부족이라는 유기체의 온전한 일부로 회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아를 소멸시킨 대가로 완전한 공감을 얻고, 함께 외부인을 처단합니다.
하필 다른 외부인들은 부족들의 관습을
공감이 아니라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게 자연스러운 인류학 전공자들입니다.
'우리 부족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 인간적이지 않은 = 인간이 아닌'
이 외부인들은 마침내 부족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이 영화는 밝은 대낮, 그림처럼 화사한 풍경으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공동체'가 어떻게 외부인들에게는 지옥이 되는지를 묘사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INTP 같은 유형이
회식이나 명절 등 일상의 친밀하고 따스한 모임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극단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체계화형 인간이 평안을 얻는 길
체계화형들에게는 수학, 과학, 컴퓨터, 기계, 데이터 분석 등
논리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분야가 잘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배런코언은 자폐인들 또한 사회에서 마냥 격리시킬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런 직업 분야에서 고용하여 적절한 기회를 주는 게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며
SAP, HP, 이스라엘 9900부대 등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실제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특히 관습과 종교가 이해할 수 없는 복종을 요구하며 도덕적 심판을 내릴 때
과학은 현상을 객관화하여 설명해 줍니다.
선이나 악이 아닌 실제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사회를 바라볼 때,
납득 가능한 형태의 설명을 발견할 때
체계화형은 비로소 평안을 얻기도 합니다.
이 글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인간계의 패턴을
과학(특히 뇌과학과 진화론)을 이용하여 파악하려는 시도 중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재미있으셨다니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분석하고 해체하여 원리를 파악해야 할 거대한 기계'에 가깝습니다.
지나가던 INTP 뜨끔하고 댓글답니다..ㅎㅎ
저도 뜨끔...
지나가던 istp...
그거라도 잘하는 t는 성공한 t입니다 ㅠㅠ
흥미로운 글입니다
intp가 쓴게 아닌것 같아서요...
감사합니다-
평안을 얻으시길 :-)
억... 어떤 점이 좋으세요?
그리고 지난번 글에서 말씀해주신 '불교는 왜 진실인가' 책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보람있네요.
관점이 맘에 들어요 :-)
사고형(T)이라는 점에서 본문에서 말한 체계형과 유사할 거고,
보편적인 패턴을 찾아 공감 성향의 사람들과 충돌이 있을 때 그걸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쪽이 아닐까요.
찾아보니 혁명가 스타일이라고도 하는 것 같고, 노무현도 그런 유형이라고 하기도 하는군요...
열심히 살고 계신 분이시군요 :-)
다만 비과학적인 MBTI의 사례를 들고 논증하시는 부분은 조금 아쉽습니다. 과학적 성격분류로 알려진 소위 BIG5 모델(친화성, 신경성, 외향성, 개방성, 성실성)으로 설명하자면 개방성 수치가 높은 사람이 체계화 비율이 많을 확률이 높고 공감하기는 친화성 또는 외향성과 관련이 많습니다. 그래서 개방성이 높으면 mbti에서 소위 I 로 시작하는 결과가 나오고 친화성 혹은 외향성이 높으면 소위 E로 시작하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뭔가 맞는 분류법이라는 착각이 들게도 하지요. 하지만 타율이 너무 낮아요. 디테일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잘 맞지않습니다. 빅 파이브는 mbti에 비해 타율이 훨씬 높습니다. 훨씬 높은 확률로 맞추죠. 빅파이브로 인간의 성격유형을 '체계화' 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저또한 '공감하기' 위해 태어난 사회적 동물의 하나인지라 mbti이야기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맞장구를 쳐주곤 합니다. 그 대화 주제가 소위 아이스 브레이킹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요. 글에 언급하신 것처럼 '사실(fact)' 보다 더 중요한게 있잖아요^_^.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신경과학자 중에 한명이 안토니오 다마지오인데 그의 책 구절중 ' 자신의 느낌을 볼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들' 이란 내용이 있습니다(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아마 느낌 시리즈 중의 한 권일 겁니다). 나중에 그 책까지 도달하시게 되면 자신을 이해하는 또 새로운 관점이 열릴거라고 생각합니다. '체계화' 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이해' 하고 싶어하는 법이니까요.
올려주시는 글 항상 응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MBTI는 기본적으로 흥미위주;;;일 텐데(사실 융도 별로 안 좋아하긴 하는데)
잘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정도의 효용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Big 5 는 얼핏 듣고 그냥 넘겼던 건데 간단히 보니 이렇게 되는 건가 싶네요.
시간이 되면 Big5를 기반으로 글을 수정해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마지오는 데카르트의 오류만 알고 있었는데 책이 많군요;;
말씀해주신 느낌 시리즈도 한 번 찾아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 방목
- 무관심
- 간헐적 관심
여자들 입장에서 남자 intp은 잘 사육하면, 충견일 수 있지요...
그런 닉으로 말씀하시니 신뢰감이 상승합니다
간혹 읽고싶은 마음에 스크랩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연관된 글들을 제 블로그에 모아두고 있으니 같이 읽으시면 이해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
아, 링크는 글 맨 위에 넣어둔 것처럼 https://buly.kr/44z619E 입니다-
찾으려 여기저기 본다고 보았는데 왜 안보였는지.. ㅠㅜ 감사합니다, 포근한 주말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