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글입니다. 불평등을 주제로 한 글 모음집인
거대한 불평등 -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은이), 이순희 (옮긴이) 열린책들 2017-05-30 원제 : The Great Divide (2015년)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0442146
의 1부 첫 글로 수록되어 있지만 번역에 참조하지 않았습니다.
[2] 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2012년 저서의 리뷰입니다. 필자는 조지프 스티글리츠 못지 않게 저명하고 불평등과 빈곤을 주제로 <위대한 탈출> (2013년 출간),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2020년 출간) 같은 걸작을 남긴 앵거스 디턴입니다. 이 두 책 모두 국역되어 있습니다. 나 중에 이 두 책에 대한 리뷰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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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를 위해, 1%가 하는, 1%의 (조지프 E. 스티글리츠)
미국인들은 극소수의 엘리트의 수중에 막대한 부를 집중시키는 억압적 체제들에 맞서는 저항들을 목격해 왔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의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의 1%가 국민소득의 거의 4분의 1을 가져가고 있다. 이것은 부유한 이들조차도 후회하게 될 불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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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E. 스티글리츠: 세계은행 부총재를 역임했고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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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배너티페어 / 2011년 5월
http://www.vanityfair.com/society/features/2011/05/top-one-percent-201105?current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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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히 일어난 것을 사실은 일어나지 않은 체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미국인들의 상위 1%는 이제 매년 국민소득의 거의 4분의 1을 가져가고 있다. 소득이 아니라 부의 면에서는, 상위 1%가 40%를 좌우한다. 그들의 실질적 몫은 상당히 증대되었다. 25년 전, 각각의 수치들은 12%와 33%였다. 한 가지 반응은 이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재간과 추진력을 칭찬하고 차오르는 밀물이 모든 배들을 떠오르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반응은 오도된 것일지도 모른다. 상위 1%가 그들의 소득이 지난 10여년 동안 18% 증대되는 것을 보는 동안 중위에 속하는 이들은 실질적으로는 그들의 소득이 감소하는 것을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장만을 가진 이들에게 하락은 절벽처럼 가팔랐다 - 지난 25년 동안만 해도 12%가 감소했다. 지난 수십 년 - 그리고 그 이상의 해 - 동안 성장의 과실은 모두 꼭대기에 있는 이들에게로 갔다. 소득평등 면에서 볼 때, 미국은 조지 W. 부시가 비방하곤 했던, 낡은, 경직된 유럽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처져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들 중에는 이란과 과두지배 아래 있는 러시아가 있다. 브라질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오래 전부터 심하게 불평등한 나라들 다수가 최근 다소간 성공적으로 빈자들의 곤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왔고 소득격차를 감소시켜온 동안 미국은 불평등이 증대하는 것을 허용해 왔다.
경제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19세기 중반 그토록 격심해 보였던 막대한 불평등들 - 우리가 오늘날 미국에서 보고 있는 것의 창백한 그림자일 뿐인 불평등들 - 을 정당화하는 것을 시도했었다. 그들이 찾아낸 정당화는 “한계생산성 이론”이라 불렸다. 간단히 말하면, 이 이론은 더 높은 소득을 더 높은 생산성 및 사회에의 더 큰 기여에 연계시켰다. 그것은 부자들이 언제나 신봉해 온 이론이다. 그것의 타당성의 증거는, 그렇지만, 박약한 것으로 남아 있다. 지난 3년의 경기침체를 초래하는데 일조했던 최고경영자들 - 우리 사회에 대한, 그리고 그들 자신의 회사들에 대한 그들의 기여가 막대하게 부정적이었던 이들 - 은 계속해서 거액의 보너스들을 받았다. 몇몇 경우, 회사들은 그러한 보상들을 “성과 보너스”라고 부르는 것이 쑥스러웠던지 명칭을 “유지 보너스”라고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유지되었던 유일한 것이 나쁜 성과였지만 말이다). 유전자 이해의 개척자들로부터 정보시대의 개척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긍정적 혁신들을 가져다주었던 이들은 우리의 전지구적 경제를 파산 직전까지 내몰았던 금융혁신들에 책임 있는 이들에 비하면 푼돈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소득 불평등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한다. 이 사람이 벌고 저 사람이 잃으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파이가 어떻게 나누어지느냐가 아니라 파이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 지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 주장은 근본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들이 매년 더 가난해지는 경제 - 미국 경제 같은 경제 - 는 장기간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첫째, 증대되는 불평등은 그 밖의 다른 것의 이면이다: 줄어드는 기회. 우리가 기회의 평등을 감소시킬 때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자산 중 일부 - 우리의 국민들 - 를 가능한 가장 생산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불평등에 이른 왜곡 중 다수 - 독점력과 이례적 이윤에 대한 세금우대에 연계되어 있는 것들 - 는 경제의 효율성을 잠식한다. 이 새로운 불평등은 더 나아가 효율성을 더욱더 잠식하면서 새로운 왜곡들을 야기한다. 한 가지 예만 든다면, 우리의 가장 재능 있는 청년 중 너무 많은 이들이 천문학적 보상을 기대하면서 더 생산적이고 건강한 경제에 이를 분야들보다는 금융에 몰리고 있다.
셋째,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적 경제는 “집단적 행위”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 그것은 정부가 기간시설, 교육, 그리고 기술에 투자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세계는 인터넷에, 공중보건에서의 진보에, 그리고 기타 등등에 이른, 정부의 후원을 받은 연구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은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은 오랫동안 기간시설에, 기본적 연구에, 그리고 모든 수준들에서의 교육에 과소투자를 행해 왔다 (우리의 고속도로들과 교량들, 우리의 철도들과 공항들을 보라). 이 영역들에서의 추가 예산삭감이 눈앞에 있다.
이것 중 어느 것도 놀랍지 않다 - 그것은 한 사회의 부 분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 으레 일어나는 일이다. 한 사회가 부의 면에서 더 분열될수록, 부유한 이들은 공통의 욕구들에 돈을 들이는 것을 더 꺼려하게 된다. 부자들은 공원이나 교육이나 의료나 안전을 위해 정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그들 자신을 위해 구입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보통 사람들로부터 더 멀어진다. 그들이 한때 가졌을 수도 있는 일체의 공감능력을 상실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또한 강한 정부 - 균형을 조정하기 위해, 그들의 부 일부를 가져가기 위해, 그리고 공동선을 위해 그 일부를 투자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할 수 있을 정부 - 를 우려한다. 상위 1%는 우리가 미국에서 가진 종류의 정부에 불평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정부를 좋아한다: 재분배를 하기에는 진퇴유곡에 처해있고 감세 이외의 것을 하기에는 너무 분열되어 있는 정부.
경제학자들은 미국에서 증대되고 있는 불평등을 어떻게 온전히 설명할지에 대해 확신하고 있지 못하다. 통상적인 수요와 공급의 다이나믹은 확실히 어느 정도 역할을 수행했다: 노동절약적 기술들은 많은 “좋은” 중간-계급, 블루칼라 일자리들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켰다. 미국의 값비싼 미숙련 노동자들을 해외의 값싼 미숙련 노동자들과 맞세우면서, 세계화는 범세계적인 시장을 창출했다. 사회적 변화들 또한 한 역할을 수행했다 - 예를 들어, 노동조합의 몰락. 그것들은 한 때 미국 노동자들의 3분의 1을 대변했지만 이제는 약 12%만을 대변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심한 불평등한 가장 큰 이유는 상위 1%가 그 정도의 불평등을 원한다는 것이다. 가장 명백한 예는 세금정책을 포함한다. 자본이득에 대한 세율 하락은 가장 부유한 미국인들에게 무임승차권에 가까운 것을 제공했다. 독점들과 과점들은 언제나 경제적 권력의 한 원천이었다 - 지난 세기 초의 존 D. 록펠러에서 세기 말의 빌 게이츠에 이르기까지. 반(反)트러스트법들의 느슨한 시행은, 특히 공화당 행정부들 동안, 상위 1%에게 일종의 신의 선물이었다. 오늘날의 불평등의 대부분은 금융산업 자신에 의해 채택되고 감수되었던 규칙들에서의 변화들에 의해 가능해진, 금융체계의 조작 - 현재까지 금융산업의 최상의 투자 중 하나 - 에 기인한다. 정부는 거의 0%의 이자율로 금융업체들에게 대출을 해주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는 호의적 조건들로 후한 긴급원조들을 제공했다. 조정당국자들은 투명성의 결여와 이해갈등들을 못 본채 해주었다.
이 나라에서 상위 1%에 의해 좌우되는 부의 막대한 양을 보면 우리의 증대되고 있는 불평등을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성취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 우리는 평등한 이들의 한 덩어리를 지지하며 길을 출발했지만 이제 우리는 세계적 수준의 불평등을 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이 성취에 의지하게 될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자신을 강화시키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부는 권력을 낳고, 그 권력은 더 많은 부를 낳는다. 1980년대의 저축 및 대부 스캔들 -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 규모가 거의 튀어 보이는 스캔들 - 동안 은행가 찰스 키팅 Charles Keating 은 한 의회 위원한테서 그가 몇 명의 선출직 공무원들에게 뿌린 150만 달러가 실제로 영향력을 구매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확실히 그렇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답했다. 최고법원은 그것의 최근 시티즌 유나이티드 판례에서 선거비 지출 제한을 제거함으로써 기업들이 정부를 구매할 권리를 인정했다. 개인과 정치는 오늘날 완벽히 일치해 있다. 실질적으로 모든 미국 상원의원들, 그리고 하원의원들 대부분이 당선 당시 상위 1%의 성원들이고 상위 1%로부터 받은 돈으로 사무실을 유지하며 그들이 상위 1%에 열심히 봉사하면 그들이 의원을 그만둘 때 상위 1%에 의해 보상을 받으리라는 것을 안다. 대체로, 무역 및 경제정책의 주요 집행 부문 정책결정자들 또한 상위 1%의 성원들이다. 제약회사들이 - 약품들의 최대 구매자인 정부가 가격흥정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입법을 통해 - 수조 달러의 선물을 받을 때 그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의회에 세금법안이 상정될 때마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관대한 세금감면들이 시행된다는 것에 입을 떡 벌려서도 안 된다. 상위 1%의 권력을 놓고 보면, 다른 방식으로는 체계가 작동할 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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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the pack’에서 'behind'는 ‘후원/지지’를 ‘pack'은 마라톤 경기 따위에서 선두 그룹도 아니고 맨 꼴찌 그룹도 아니고 그 외 대다수 선수들이 속해 있는 중간 무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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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불평등은 우리의 사회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왜곡한다. 그 하나는 잘 기록되어 있는 생활양식 효과이다 - 상위 1%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점차 [대출을 받아] 그들의 소득 이상의 삶을 산다. 통화침투설 경제학은 망상일지 모르지만 통화침투 행동주의는 생생한 현실이다. 불평등은 우리의 외교정책 [또한] 심하게 왜곡한다. 상위 1%는 거의 군복무를 하지 않는다 - 현실은 “전면 지원” 병제가 그들의 아들 딸들을 끌만큼 충분히 지불하지 않으며 애국주의는 딱 그만큼만 간다는 것이다. 더욱이, 가장 부유한 계급은 국가가 전쟁에 나설 때 더 높아진 세금들로부터 아무런 압박도 느끼지 않는다: 빌린 돈이 그 모두를 지불해 줄 것이다. 대외정책은 정의상 나라의 이익과 나라의 자원을 균형 맞추는 것에 관한 것이다. 상위 1%가 좌우하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을 때, 균형과 제한이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감행할 수 있는 모험에는 아무런 제한도 없다; 기업들과 계약자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이득만 취한다: 그들은 사업을 위해 나라들 사이의 경쟁을 조장한다. 그 경쟁은 기업들에 부과되는 세금들을 감소시키고 보건 및 환경보호를 약화시키며 단체교섭을 포함해 “핵심”적 노동권들로 간주되었던 것들을 잠식한다. 규칙들이 대신 노동자들을 위해 나라들 사이의 경쟁을 조장하도록 고안된다면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보라. 정부들은 경제적 안정, 보통 임금소득자들에 대한 낮은 세금, 훌륭한 교육, 그리고 깨끗한 환경 - 노동자들이 신경쓰는 것들 - 을 제공하는 경쟁을 벌일 것이다. 그러나 상위 1%는 그런 것들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그들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상위 1%에 의해 우리 사회에 부과되는 모든 비용 중 가장 큰 것은 이것이다: 페어 플레이, 기회의 평등, 그리고 공동체 감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리의 정체성 감각의 부식. 미국은 오랫동안 모든 이들이 평등한 성공기회를 갖는 공정한 사회라는 점에 자긍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통계는 그 반대를 시사한다: 빈곤한 시민은 물론이고 중간계급 시민조차도 유럽의 많은 나라들보다 상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들을 더 적게 갖고 있다. 그들은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중동에서 소요들을 발생시킨 것은 기회 없는 불공평한 체제에 대한 이러한 의식이다: 상승하는 식품가격들과 증대하는 지속적인 청년실업은 단순히 도화선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미국에서 청년실업은 약 20%에 달한다 (몇몇 지역들에서는, 그리고 몇몇 사회 및 인구집단들 사이에서는 그 두 배에 달한다). 풀 타임 일자리를 원하는 미국인 여섯 명 중 한 명꼴로 풀 타임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 미국인 일곱 명 중 한 명꼴로 식권에 의존한다 (그리고 거의 동일한 숫자의 사람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린다). 이 모든 것을 놓고 보면, 뽐내져 왔던 것, 즉 상위 1%로부터 그 밖의 모든 이들에게로의 “부의 점진적 이전”이 차단되어 왔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소외의 야기라는 예측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지난 선거에서 20대의 투표율은 21%였는데, 이것은 실업률과 비근한 수치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그들이 사는 억압적 사회들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조건들에 항의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는 정부들이 무너졌다. 리비아, 예맨, 그리고 바레인에서도 저항이 발발했다. 그 지역 다른 곳의 통치족벌들은 그들의 호사스러운 펜트하우에서 주눅들어 있는 듯이 보인다 - 다음은 그들 차례일까? 그들이 근심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그 사회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이들이 - 인구의 1% 이하 - 부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사회들이다. 그 사회들에서 부는 권력의 주요 결정인자이다. 그 사회들에서 이런저런 종류의 관행화된 부패가 생활양식이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부유한 이들은 종종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거리에 가득한 그 민중적 열망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자신에게 던지게 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미국에서는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인가? 실질적으로, 우리 자신의 나라는 이 멀리 떨어져 있는, 요동치는 곳 중 하나와 닮은 곳이 되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언젠가 그가 미국사회의 독특한 특질의 주요 부분으로 보았던 것을 기술했다 - 그가 “적절하게 이해된 자기관심”이라 불렀던 어떤 것. 처음 두 단어들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모든 이들은 좁은 의미에서의 자기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바로 지금 내게 좋은 것을 원한다! “적절히 이해된” 자기관심은 다르다. 그것은 나 외의 모든 이들의 자기관심 - 달리 말하면, 공동복지 - 에 주목하는 것이 사실 내 자신의 궁극적 복지를 위한 하나의 선행조건임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토크빌은 이 관점에 고귀하거나 이상주의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시사하고 있지 않았다 - 사실, 그는 그 반대를 시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식 실용주의의 한 표지였다. 기민한 미국인들은 한 가지 기본적 사실을 이해했다: 다른 사람을 신경쓰는 것은 영혼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 그것은 비즈니스에도 좋다.
상위 1%는 최고의 주택, 최고의 교육, 최고의 의사들, 그리고 최고의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화폐가 구매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한 가지가 있다: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다른 99%의 삶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는 이해. 역사 내내, 이것은 상위 1%가 결국 배우게 되었던 어떤 것이다. 너무 늦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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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평등은 왜 나쁜가? (앵거스 디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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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거스 디턴 Angus Stewart Deaton 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미국 경제학자이며, 전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현재 남가주 대학교 (USC) 교수로 재직중이다. 2015년 복지·소비·빈곤과 건강에 대한 연구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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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ice of Inequality
Joseph E Stiglitz. Penguin, 2012.
Pp 448. £14·99.
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펭귄, 2012.
448쪽. 14.99 파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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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The Lancet / 2013년 2월 2일, 381호
http://www.thelancet.com/pdfs/journals/lancet/PIIS0140-6736(13)60154-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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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사람들이 매우 부유하게 되면, 우리 나머지는 그 점에 관해 무엇인가 불평할 것이 있을까? 소수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 의해 부유해졌다면, 우리는 확실히 정당한 대의를 가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논란할 만한 것이 있을까? 아마 질투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공중 정책을 위한 설득력 있는 토대가 아니다. 빈곤은 확실히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지만 부유한 이가 어떤 다른 누구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은 채 더 부유해진다면, 그들은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이것이 오랫동안 주류 경제학자들의 견해였다. 더 왼편에 있는 이들도 평등의 바람직함을 인정했지만 평등과 일을 잘 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할 필요 사이에 타협이 있어야 했다는 점을 인지했다. 게다가, 불평등은 세월이 흘러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무도 어떤 식으로든 그다지 불평등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자족은 사건들에 의해, 많은 부유한 나라들에서의 급속하게 상승하는 소득 불평등에 의해, 그리고 매우 부유한 이들의 놀라운 소득 수준들을 보여주는 데이터에 의해 깨졌다. 수십 년에 걸친 정체 후, 상위 1% - 주로 은행가들, 헤지펀드 매니저들, CEO들, 변호사들, 유명인사들, 그리고 소수의 의사달 - 가 가져가는 총소득몫은 100년 이래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더 안 좋은 것은, 이것이 이 나라들의 대다수의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정체되어 있거나 거의 상승하지 않은 때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런데도 정말로 불평할 것이 없을까?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생활수준의 정체는 결코 상층의 성공과 무관하지 않다; 실질적으로, 맨 꼭대기에 있는 이들은 빈자들과 중간계급들을 강탈하고 있다. <불평등의 대가>에서, 스티글리츠는 시장 민주주의는 극단적인 불평등과 양립할 수 없다고 논한다. 그는 권력의 극단적인 차이들이 시장 거래들의 자발적인 본성이 거짓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시장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금권정치가 점차로 민주주의를 대체해가고 있기 때문에 정치체제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이 경제에 초래하는 것과 “지대-추구”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잘 기능하는 시장경제에서, 사람들은 물건들을 제조하고, 혁신하고, 체계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전반적으로 확장하는 것에 의해 부유해진다. 대체로, 그들의 개인적 인센티브들은 사회에 유익한 결과를 초래한다. 지대-추구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부유해진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창출하지 않는다. 그들은 로비에 의해, 규칙들을 다시 쓰는 것에 의해, 또는 사업체들과 정부에 있는 그들의 연줄들을 구워삶고 그 연줄들로부터 특혜를 받는 것에 의해 그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분배가 이루어지도록 시도한다. 스티글리츠의 주요 표적인 은행가들은 파산법들을 변경시키는 로비를 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부적절한 대출을 하도록 꼬드김 당한 사람들은 채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산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렸을 때 그들의 보너스와 봉급은 대개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모기기 소유자들의 면책조항들은 은행가들의 로비에 의해 성공적으로 차단되었다. 성공적인 지대-추구는 그 자신을 강화한다. 로비스트들이 더 성공적일수록 그들의 고객들은 더 부유해지며, 따라서 더 많은 돈이 로비에 투입된다. 그리고 보상이 치솟으면 인재들이 새로운 기술들을 발명하거나 암 치료법을 발견하는 일에서 빠져 나간다.
스티글리츠는 악의 세력을 구속받지 않은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때를 제외하면) 규제에 반대하고 정부가 더 작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파”라고 특정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 특정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일차적인 문제인 것은 당파적 정치가 아니라 돈이다. 민주당원들은 특별한 이해관심들의 약간 덜 열성적인 후견인들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정도 문제이다. 큰돈을 가진 이들은 손실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며, 따라서 모든 당파들의 입법자들이 동료가 되게끔 손을 쓴다. 우리 중 다수를 비관적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문제가 우익 대 좌익이라면, 선거 정치에는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훨씬 더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은행업은 지대-추구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유일한 산업이 아니다. 미국 건강보험 산업 - 제약회사들, 장치 제조사들, 보험회사들, 의사들, 그리고 병원들 - 은 미국 GDP의 18%를 점유한다. 아마 국민 건강을 위해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 것은 이 지출의 절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비용을 통제하려는 어떤 시도도 압도적으로 실효적인 반대에 부딪친다. 그 산업은 영국의 국립보건기구 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linical Excellence (NICE) 와 유사한 어떤 것에도 맹렬히 반대한다. 미국 건강보험 산업은 치료 역치를 설정하는 국립 가이드라인들을 쓰도록 연구자들에게 자금 지원을 했다. 그 결과 과잉검사와 과잉치료가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
로비스트들은 제조사들에게 후하게 지급하고 대량구매 품목들의 할인을 추구하지 않는 지불 스케쥴을 짜도록 메디케어 Medicare 를 부추긴다. 다른 한편, 가장 부유한 미국인들은 공중보건을 포함한 공공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세계에서 생활한다. 그들의 부는 국민건강을 좌우하는 집단적 방책에 대한 어떤 필요로부터도 그들을 격리시킨다. 효과적이지 않으며 기괴할 정도로 확장된 보건 시스템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부유해지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실질적으로, 불평등이 일정 선을 넘으면, 매우 부유한 이들은 더는 그 밖의 사람들과 같은 사회에서 살지 않는다. 부유한 이들과 나머지 사이의 격차는 국민 일반 사이에서의 소득 불평등의 어떤 오염 효과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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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케어 - 미국 노인 의료보장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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