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레이는 상당히 급이 높은 좌파 식자입니다. <고양이 철학> 외에도 그의 책이 몇 권 더 번역되어 있는데, 모두 강추합니다. 특히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가 훌륭합니다.
**********
-
왜 자유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는가 (존 그레이와 로스 다우타트)
존 그레이와 로스 다우타트가 서방의 쇠퇴에 대해 토론한다
-
--
존 니콜라스 그레이 John Nicholas Gray 는 분석철학과 사상사에 관심을 가진 영국의 정치철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의 유럽 사상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8년에 퇴임했다. 그레이는 The Guardian,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 The New Statesman 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며 The New Statesman 의 선임 북 리뷰어이다. 그는 무신론자이다. 그의 가장 최근 책은
고양이 철학: 고양이와 삶의 의미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1057321
이다.
로스 다우타트 Ross Douthat는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이자 "The Decadent Society: How We Becamtims of Our Own Success" (Simon & Schuster) 및 "The Deep Places: A Memoir of Illness and Discovery" (Convergent)의 저자이다.
---
-
* 출처: 뉴 스테이츠먼 / 2022년 1월 28일
https://www.newstatesman.com/ideas/2022/01/the-light-that-failed-why-liberalism-is-in-crisis?utm_source=pocket_mylist
-
-
1960년대의 전 뉴 스테이츠먼 편집자 존 프리맨 John Freeman의 유명한 텔레비전 인터뷰에 경의를 표하는 "Face to Face"라는 새 시리즈에서 오늘날의 가장 유명한 사상가들, 작가들 및 정치인들 세계를 개변하는 힘들에 대해 토론합니다. 우리는 뉴욕 타임스의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로스 다우타트와 우리 자신의 존 그레이 사이의 서면 교환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퇴폐와 타락, 가능한 종교 부흥, 문화 전쟁 및 "대각성"의 영향에 대해 논의합니다.
존 그레이
당신과 대화하는 것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우리 각자가 우리가 쓴 것과 정반대로 믿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방 사회들이 퇴폐적이라고 주장할 때, 당신은 이것이 그들이 어떤 바이마르와 같은 파국이 아니라 침체와 반복에 직면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1990년대에 제가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에 대해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했을 때, 저는 역사가 평소와 같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그럴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저는 격변적 대단원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둘 다 종말의 예언자로 읽혀온 반종말론적 작가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자유주의 사회들이 심각한 난점들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를 수 있는 부분은 이러한 문제가 얼마나 해결 가능한가입니다. 퇴폐라는 개념은 좀 더 이전의 더 건강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자유주의 사회가 오늘날보다 더 관대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영국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극적인 변화가 있었고, 1970년대 초반에 제가 첫 번째 대학교 직책을 맡았을 때 존재했던 지적 다원주의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많은 시간을 보낸 미국은 상황이 더 나빠 보입니다. 캠퍼스 종파 전쟁은 거의 모든 곳에 퍼진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더 순수한 형태의 자유주의 사상과 실천으로 되돌아가서 되돌릴 수 있는 쇠퇴로 보지 않습니다. 일부 주석가들이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복귀를 요구할 때, 그들은 그것이 유대교와 기독교 유일신교의 도덕적 토대와 서구의 글로벌 파워의 역사적 우발성에 근거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오늘날 유럽은 도덕적 문화 면에서 기독교 이후 post-Christian입니다. 예를 들어, 폴란드를 제외하고 낙태와 조력 죽음은 깊게 분열되는 쟁점들이 아닙니다. 미국인들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 극도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고전적 자유주의의 어떤 회복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뒷받침했던 가치 합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저는 미국이나 다른 민주 국가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들로 변모하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미국은 어떤 현실적인 시나리오에서도 빅토르 오르반 Viktor Orbán의 헝가리의 더 큰 버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극우는 현재의 10년 동안 프랑스와 독일에서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진 세계의 어떤 민주 국가도 파워의 글로벌 균형에 현저한 전환이 있지 않는 한 독재 국가가 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불행히도, 그러한 전환은 진행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대만에서 번성하는 민주주의나 우크라이나에서 나타난 한층 더 포위된 민주주의가 지금부터 몇 년 후에 자리를 잡고 있다면 놀랄 것입니다. 현재 추세로부터 외삽하는 것은 항상 위험합니다. 그렇더라도 현재 진행 중인 서방의 파워의 급격한 위축을 어떻게 저지할 수 있을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자유주의를 위한 논변은 번영과 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열린 사회만이 기술 혁신과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은 신조로 견지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반증할 수 있는 명제였습니다. 중국이 그것을 반증했습니다.
중국의 경제적 난점들은 그곳에서 매일의 헤드라인들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높은 수준의 부채, 고령화 인구 및 막대한 환경 악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극초음속 미사일뿐만 아니라 양자 컴퓨팅과 같은 전쟁에서 중추적인 영역에서 기술적으로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몇 년만 더 있어도 서방 (이런 것 entity이 여전히 있다면) 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우위는 압도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 한,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사태가 더욱 악화된 형태로 계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방은 대결에서 물러날 것이고 중국 그리고 덜한 정도로 러시아는 그들의 파워와 영향력을 확장할 것입니다. 자유주의 문명에 남아 있는 것은 침식될 것입니다.
서방은 종말에 근접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쇠퇴하고 있습니다. 쇠퇴는 역사에서 통상적이고 모든 문명들에 발생하는 과정입니다: 자신들의 문명이 이 보편적 진리에서 면제된다고 상상하면서 종말론적 사고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입니다.
로스 다우타트
이 교류를 계속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그리고 저보다 더 자주 보기 흉한 비관론으로 비난을 받아온 희귀한 작가와 대화를 나누게 되어 특히 기쁩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현대 서방에 대한 우리의 진단 중 어느 것도 정확히 파국적이지 않습니다. 성공적인 문명이 퇴폐로 빠져드는 것에 대한 저의 초상화와 서방 자유주의의 시간 제한적이고 우발적인 글로벌 파워의 불가피한 약화에 대한 당신의 설명은 둘 다 상대적인 안정성과 편안함의 세월과 양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정치의 맥락에서, 저의 느린 쇠퇴주의적 비전은 많은 친구들에게 - 트럼프주의에서 부상하는 파시즘을 식별하는 좌파 식자들과 새로운 진보주의가 소프트-전체주의적 미래를 약속한다고 확신하는 우파 식자들 양자 모두에게 - 치명적으로 순진해 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비관주의적일 뿐 반드시 파국주의적이지는 않은채 남아 있음으로써, 저는 상대적으로 낙관주의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의 서신이 중단된 부분부터 시작하면서, 아마도 우리는 서방 문명 내부의 어떤 것이 그것의 쇠퇴의 과정 - 민족주의적 파워의 다양한 형태들 앞에서의 자유주의의 글로벌한 후퇴 - 을 저지할 수 있는지에 관해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몇 달 전에 이 잡지에 비록 서방 자유주의 내부에서는 논쟁들이 점점 더 무익해지고 제한적되었지만 - "동료들의 압력과 신분상 제재에 의해 통제되는 진보적 교리문답의 암송" - 미국과 유럽 넘어의 세계에서는 서방 역사의 보다 역동적인 (그리고, 때로는, 파괴적인) 국면에서 나온 관념들이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논하는 매혹적인 에세이를 썼습니다. 즉, 나렌드라 모디의 인도에는 19세기 유럽 민족주의가 존속하는 한편, 중국은 젊은 지식인들이 서구 고전을 읽고 알렉시스 드 토크빌과 토마스 홉스와 칼 슈미트를 놓고 논쟁을 벌이면서도 공식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정체성을 배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서방의 글로벌 파워의 어떤 후계자도 서방의 진정한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 단순히 유럽-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반란자가 아니라 서방 사상의 부분적인 상속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슈미트와 마르크스, 그리고 자유주의적 경건에 대한 과거의 다른 서구 비평가들을 받아들인 것은 중국인들만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미국에서 가장 흥미로운 젊은 작가들과 사상가들은 지난 5~10년 동안 비슷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진정한 "하이퍼-자유주의적" - 저는 여기서 그 구절을 당신과 다르게 사용합니다 - 시기라고 생각하는 것 동안 휴면 상태였던 학파들을 되살려 왔습니다. 그 시기로 저는 세계화가 살아있는 신조였고 모든 정치적 및 경제적 질문들이 제3의 길 중도파에 의해 정착된 것으로 상정되었던 1990년대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제 젊은 우파는 포퓰리스트 지망자들, 민족주의자들, 통합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좌파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을 다시 한 번 얻었습니다. 당신이 대학교 캠퍼스에서 올바르게 식별하는 지적 다원주의의 쇠퇴조차도 일종의 개신교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반영합니다 - 그 부흥 운동은 기독교 교리는 버리지만 청교도적인 것은, 정화 정신은 유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자유주의적 기관들의 분위기가 최근 과거보다 확실히 더 불편하고 답답하지만, 1999년경의 신자유주의의 범위를 벗어나려는, 10~20년 전의 공개적 논쟁 때보다 더 진정한 지적 소란과 더 많은 시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우리가 이 모든 소란이 단순히 시스템에 의해 재흡수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좌파 급진주의가 기업 인사 관리 부서의 규칙들로 바뀌고 우파의 포스트-자유주의가 평범한 폭스 뉴스류의 당파주의로 길들여질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퇴폐는 그렇게 쉽게 전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은 급진주의를 부추기는 만큼이나 종종 길들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서방 세계의 꾸준한 노화를 막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최근의 이데올로기적 격동에서, 버니 샌더스와 제레미 코빈과 트럼프와 오르반의 사회주의-포퓰리즘 변증법에서 표면적으로 고갈된 것으로 보이는 서구에 여전히 활력 life이 (그리고 당연히, 그것과 더불어, 위험이) 있음을 시사할 수도 있는 무엇인가를 보는지 궁금합니다.
존 그레이
제가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낙관주의자가 되었다는 당신의 느낌은 맞습니다. 임박한 파국에 관해 히스테릭하게 고조된 것은 유럽 연합 잔류 지지자들 uber-Remainers입니다. 저는 과도한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브렉시트가 이 나라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을 초래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팬데믹으로 인해 가속화되어 그렇게 되어 왔습니다. 포스트-냉전 정통 - 글로벌 자유 시장과 국경을 넘는 노동의 대규모 이동 - 으로의 복귀를 제안하는 어떤 정당도 권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고갈된 서방에서 활력 요동 life stirring의 일부 징조들이 있다는 당신의 말 또한 옳습니다. 그것들 대부분은 자유주의자들이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의 부산물들입니다. 브렉시트, 트럼프, 포스트 공산주의 유럽에서의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민주주의의 부상과 같은 지난 5년의 격변은 주류 토론에서 제외되었던 문제를 재정치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민이 핵심 문제였을지 모르지만 정치적 맥락에서 종교의 부흥 또한 낙태 및 조력 죽음과 같은 쟁점들과 연결되기 때문에 중요했습니다. (저는 두 질문들 모두에 대해 "선택 찬성파"입니다.)
가치의 근본적 충돌들의 정치에 재진입하는 것은 몇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그 결과 담론은 종종 양극화됩니다. 선동가들은 더 넓은 범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반유대주의와 같은 오래된 독소가 다시 나타났지만 우파에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매우 흔한 캠퍼스 반유대주의는 진보 좌파의 바이러스입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관용의 쇠퇴가 있었는데, 관용은 홉스가 "풍요로운 삶 "이라고 부른 것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일텐데, 만성적인 내부 불화는 외부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유아론의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서구 사회들은 진행 중인 지정학적 투쟁에서 자신을 방어하기에는 너무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도 정치가 무의미하다고 더는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회의 조직화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들이 다시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정한 종류의 자본주의가 경제 발전의 마지막 단계라는 관념은 이제 광범위하게, 그리고 당연히, 비웃음을 살만한 것으로 거부됩니다. 경제적 불평등에서 계급의 우위가 재발견되고 있습니다. 비판적 인종 이론은 그것이 언제나 이었던 것으로 보이게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파생되어 나왔다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파워를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공허한 도그마들의 혼합물.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형성되는데 유대교와 기독교 유일신교가 수행한 중심적 역할이 다시 한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쇠약함이 아니라 건강의 징후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 지적 전통들과의 재연결이 서방의 쇠퇴를 역전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늦추기라도 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의심합니다. "woke" 이데올로기가 부풀려진 대학교들에 의해 과잉 생산된 엘리트 지망생들을 촉진하는 것에 의해 그러는 것처럼, 불신당했던 이론들은 경제적 이익들을 합리화 해주는 것들로 봉사할 때 생존하고 세대들에게 파워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자유주의적인 woke 신념들은 우리 제도에 너무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것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너무도 유용하여 그것들의 허위성의 어떤 입증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종교가 woke 열광의 균형추로 작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도 않습니다. 주요 기독교 회중들은 일부 하이퍼-자유주의적 판타지들을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국경 없는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전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는 또한 서방 바깥,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성장하고 있는 반면 유럽 거의 모두에서 후퇴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추세에서 예외일까요?
서방이 처해 있는 주요 디폴트 상태는 그것이 자신의 기반 원칙들이라는 것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조차도, 개신교적인 자연권 신화는 정치적으로 변혁적인 형태로 부활하지 않을 것이며, 대중적 호소력이 제한된 세속적 근본주의인 스티븐 핑커식 계몽주의 합리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세기에 걸친 역사주의와 상대주의 - 이것의 대부분은 계몽주의 시대에 배양되었습니다 - 는 의지의 행위에 의해 역전될 수 없습니다.
진짜 디폴트 상태는 서방의 축소된 입지에 대한 현실주의적 사고의 부족입니다. 이것은 우리 지도자들이 그들 자신들의 수사학적 선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서방 문화들이 이제 너무 파편화되고 내향적이어서 세계에서의 그것들의 자리에 대한 어떤 분명한 견해도 형성할 수 없는 것일까요?
로스 다우타트
기독교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제 감각은 일종의 종교적 부흥만이 지적인 에너지의 동요가 더 넓은 사회적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의 변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고령화 사회가 계속해서 만들어내지 못한 높은 출산율, 그리고 1960년대 주류 기독교 문화의 분쇄 이후 잃어버린 미적 창의성과 문화적 에너지의 관점에서 말입니다. 기독교가 종교적 쇄신의 유일한 가능한 원천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서방에서도 이교도와 이슬람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매혹적인 잠재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아직 진정한 종교적 흐름이 되지 않았습니다. 퇴폐적인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을 만큼 충분히 큰 규모의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19세기 유럽과 미국의 대각성운동에서 반복적으로 본 것과 같은 기독교 부흥이 유일하게 그럴듯한 단기 후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부흥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많이 보지 못합니다. 미국에서는 현재 어떤 종류의 부흥 운동가 정신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의 도덕적 열성, 그것의 유토피아적 확실성의 태도에서 이전의 대각성과 유사한 각성을 보이는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이상학적 틀, 문화-미학적 상상력, 지속적인 종교 운동을 구성하는 제도적 구조가 현저히 부족합니다. Wokeness는 그 그리스도교국의 회복력이나 부흥의 표시라기보다는 약화된 그리스도교국의 마지막 이단에 가깝습니다.
대서양의 양쪽에서, 저의 동료 보수 지식인들 사이에는 국가 권력을 현명하게 사용함으로써, 교회에 가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유럽인들 사이에서 -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 지속되는 종류의 "문화적 기독교"가 기독교 문화의 완전한 회복의 기초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역사가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문화적 기독교는 진실한 신자들이 비웃거나 거부해야 할 것은 아니지만 진짜 신앙의, 진짜 열정의 반그림자, 희미해지는 메아리입니다. 반그림자나 반향에서 시작하여 진짜로 되돌아가는 것을 해낼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에서 폴란드에 이르기까지 보수적 포퓰리즘이 형성된 곳에서 교회 출석은 무시할 만하거나 쇠퇴하고 있으며 노트르담에 대한 에릭 제무르 Éric Zemmour의 수사학적 애정은, 그가 불러일으키려는 전통적인 프랑스가 세속적이고 불임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면, 공허한 향수에 불과합니다.
한편, 일종의 역동성, 기독교적 사랑의 생생한 도상학으로 시작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유주의 종교의 치명적인 혼돈 상태로 단계적으로 하강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다양한 논쟁적인 교회 교리들을 파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 시도는 큰 목적은 없었지만 그 배후에 적어도 일종의 개혁 에너지가 있었던 가톨릭 내전을 유발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공동합의성을 주제로 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synod on synodality"를 개최하는 교회 관료들의 더 무서운 광경이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의 자기도취 navel-gazing가 두드러진 행사였는데, 프란치스코는 애초 그런것을 거부하라고 선출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교회는 그것의 중심부에서는 현재 활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상황은 주변부 -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기독교 나라들 - 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어떤 것보다 기독교 신앙을 위한 쇄신의 더 그럴듯한 원천으로 남겨둡니다.
그러나 그 글로벌 부흥이 한때 기독교적이었던 서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민자 주변부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엘리트들 사이에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방의 지도층이 상대적 쇠퇴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당신의 의문과 어떤 면에서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한 가지 대답은 인간은 버거운 현실을 견딜 수 없고 정치 지도자들은 대다수보다 덜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는 인도와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힘 might과 아프리카의 인구 통계학적 무게가 모두 세계를 재편할 태세를 갖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아직까지 그에 상응하는, 이를테면, (미국 세기의 정점을 정의했던) 할리우드와 코카콜라의 미국 문화 제국주의와 견줄만한 비서구 문화 제국주의나 영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네, 인도는 미래의 CEO를 수출하고 한국은 대중음악을 수출하고 일본은 애니메이션을 수출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방 도시들에서 일종의 세계 요리를 먹습니다. 그러나 글로벌하게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예술들과 관념들은 여전히 재활용된 서방의 것들이고, 글로벌한 유명인들과 스포츠 영웅들은 여전히 대부분 미국인이며, 실제로 미국 정치 문화가 유명인 문화와 융합함에 따라 이 패턴은 강화되기만 했습니다: 바로 지금 어느 누구도 도널드 트럼프만큼 유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문화 제국주의가 예전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woke 혁명과 같은 것은 근본적으로 편협하고 내향적이며 우리의 국무부나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다른 문화들로 옮겨질 때 거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우리의 재난스러운 아프가니스탄 모험에서 철저히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미국인들이 수행하는 데 익숙한 종류의 문화 수출 과정에 해당하는 중국이나 인도의 등가물이 없습니다. 그 대신, 서방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은 우리 자신을 대체할 태세를 갖춘 라이벌 세계 문화를 대표하기보다는 전성기의 소련보다 더욱 불투명하고 신비로운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마블 영화들을 얻었지만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서방 문화 제국주의의 부재가 파워의 글로벌 균형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퇴폐적인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고 우리를 그것의 태평양 끝에서 추방하고 우리 제국의 쇠퇴에 각인을 하는 순간에 딱 어울리게도 미국인들이 세계에서 우리의 진짜 지위에 관한 망상들을 유지하는 방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당신이 워싱턴이나 베를린 그리고 파리의 정책 결정의 관점에서 그 질문을 제기한 이후로, 우리 지도자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망상들을 버리고 "세계에서 그들의 자리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채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존 그레이
“Wokeness는 그리스도교국의 회복력이나 부흥의 표시라기보다는 약화된 그리스도교국의 마지막 이단에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히 동의합니다. 용서가 현저히 부족하지만 "woke"는 여러면에서 신 기독교 운동입니다. 이것이 그것이 서방 밖에서는 그다지 공명을 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기서는 당혹감과 가련해 하는 경멸이 뒤섞인 시선으로 응시됩니다. 저는 또한 서방 기독교의 많은 부분이 "자유주의 종교의 치명적인 혼돈에 빠졌다"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우리의 매우 다른 형이상학적 관점 (가톨릭 신자의 관점과 무신론자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흥미로운 수렴입니다.
당신은 서방의 문화 제국주의의 어떤 대안도 부재하는 현실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것은 현재 서방의 위치에 관한 (당신의 생각이 아닌) 많은 생각의 근본적인 오류를 조명하기 때문에 중심적인 중요성을 갖는 질문입니다. 서방의 파워는 지정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빠르게 위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글로벌 패권이 부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은 미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공간을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서방 자유주의가 기독교로부터 물려받은 보편주의적 가치 체계와 같은 어떤 것에 의해 추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소비에트 시대와 같이 글로벌 정치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강대국으로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이슬람은 보편주의적 신앙이지만 내부적으로 너무 분열되어 서구 문명의 잔재에 체계적인 도전을 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미국 패권의 후계자는 없을 것입니다.
할리우드, 실리콘 밸리 및 서방 대학교들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통해 중국은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증가시킬 것입니다. 인도는 부분적으로는 디아스포라의 성공을 통해 자국의 문화를 수출할 것입니다. 그 중 한 명인 리시 수낙 Rishi Sunak이 미래의 영국 총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푸틴의 권위주의의 냉담한 효과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화 수출국으로서는 평가가 절하되는 러시아는 "가까운 외국"과 유럽 대륙의 엘리트에 대한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문명 범위를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 중 어느 것도 당신이 한 때 서방의 지배적인 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라이벌 세계 문화"로 기술하는 것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인류가 서방의 그늘 아래서 살았던 3~4세기는 확실히 끝났습니다. 떠오르는 현실은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의 라인들을 따라 분산되고 파편화된 세계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 지도자들이 갑자기 환상을 버리고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현실적인 견해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깨달음이 조만간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일어난다면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가 어떻게든 회복될 수 있다는 생각의 종말을 의미할 것입니다. '국제사회'에 대한 서방의 담론은 공허한 몸짓이며 그 어느것보다 퇴폐적인 향수의 표현입니다.
정책 측면에서, 현실주의로의 전환은 여전히 서방의 자유주의적 가치들에 의해 어느 정도 활기를 띠고 있는 국가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들 및 문화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할것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것을 수반합니다. 그 임무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지난 30년 동안 어떤 경우에도 자신들이 무능함을 보여줬던 역할, 즉 세계를 서방의 자아상과 일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라이벌들과 적들에 의해 제기되는 증가하는 경제적 및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서방 사회들을 방어하는 것일 것입니다. 슬프게도, 미국과 나토가 대만과 우크라이나에 대해 발하는 위험할 정도로 갈피가 안 잡힌 메시지들을 볼때, 우리 지도자들이 서방의 중요한 이해관심들이나 그것의 파워의 한계에 대해 어떤 것이든 일관된 견해를 갖고 있다는 징후는 없습니다.
T. S. 엘리엇 T. S Eliot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월리스 스티븐스 Wallace Stevens가 모든 면에서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엘리엇이 "인간은 현실을 별로 견딜 수 없다"고 쓴 Four Quartets (1941)의 유명한 구절은 오늘날 다른 어떤 분야보다 정치에 적용됩니다. 명석한 현실주의는 기독교의 부흥같은 것, 서방에서는 불가능한 쇄신의 한 형태일 것입니다. 우리는 한눈 팔지않고 하던 대로 계속 합니다.
로스 다우타트
서방의 상황과 현실주의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진단에 대체로 동의하므로, 퇴폐라는 프레임을 조금 더 밀어붙이려고 노력하면서 우리의 일반적으로 비관주의적인 대화를 마치겠습니다. 실제로 당신은 사무엘 헌팅턴 Samuel Huntington이 한때 예언했고 브루노 마셰스 Bruno Maçães와 라지브 칸 Razib Khan과 같은 현대 분석가들이 최근에 생생하게 논제로 삼아 썼던 종류의, 다시 출현한 문명-국가들로 분할된 진정한 다극 세계를 상상합니다. 각 국가는 자신의 영역에서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겠지만 그 중 어느 국가도 100년 전에 유럽 제국들이 누렸고 그들의 후계자 미국이 일시적으로 열망했던 종류의 글로벌 지배를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음이 지금과 2040년 사이의 세계의 초상으로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 자신의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 쇠퇴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주 압력에 대처하고 있는 유럽, 서방을 희생시키며 더 큰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인도와 중국과 러시아.
그런데 이 다극 세계에 어떤 종류의 압력들이 쌓이는지 궁금합니다. 한편으로는 유럽의 경합하는 제국들의 세기 동안 유럽의 발전의 위대한 엔진이었던 갱신된 문명 경쟁의 압력이 있습니다. 다극적 조건 하에서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의 쇼비니즘적 충동 - 우리의 포스트-냉전 정체 시기 동안 우리가 놓쳐왔던 것 중 하나 - 의 부활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우주 "경쟁", 유전 공학 "경쟁", 핵융합 "경쟁", 그리고 그 외의 이런 저런 경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들 경쟁들은 우리를 행복한 곳들뿐만 아니라 어두운 곳들로 도 데려갈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우리는 더는 정체와 권태에 강렬하게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내부 선택" 효과라고 부를 수 있는 압력도 있습니다. 현재 부유한 세계는 제도적 경화와 인구통계학적 노화로 정의되지만 이러한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번성하는 종류의 제도들, 운동들 및 가족들은 정의상 그것들의 회복력과 창의성, 그것들의 반퇴폐 예방접종으로 인해 선택될 것입니다. 서구 세계 내에서, woke 시뮬라크럼만이 아니라, 진정한 종교적 또는 문화적 부흥을 상상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저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이러한 종류의 세대적 타임 스케일 상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상상합니다 - 21세기의 더 깊은 미래는 바로 지금 실제로 아이들을 낳고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에 의해 개조됩니다. 그들은 퇴폐에 반대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들이 어떤 보상을 받느냐는 결국 퇴폐를 보여주는 사람들에게 속한 미래에 극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내부 선택" 효과라고 부를 수 있는 압력도 있습니다. 현재 부유한 세계는 제도적 경화와 인구통계학적 노화로 정의되지만 이러한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번성하는 종류의 제도, 운동 및 가족은 정의상 회복력과 창의성, 퇴폐에 대한 예방접종으로 선택될 것입니다. 서방 세계 내에서 woke 시뮬라크럼만이 아니라 진정한 종교적 또는 문화적 부흥도 상상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저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다음 종류의 시간 스케일 상에서 형성될 것으로 상상합니다 - 즉 21세기의 더 깊은 미래는 바로 지금 실제로 아이들을 낳고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에 의해 개조됩니다. 그 사람들은 퇴폐에 반대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들이 어떤 보상을 받느냐는 결국 퇴폐를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속한 미래에 극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적 낙관주의의 태도는 우리 사이의 주요 차이점에 도달합니다. 선량한 무신론자인 당신의 작업에서 큰 주제 중 하나는 인류 역사에 대한 섭리적 마스터플랜을, 우리가 필사할 운명인 긴 진보의 원호를 상상하는 것의 어리석음입니다. 그 원호를 정확히 분별하려고 시도하는 것의 오만함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동의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유토피아를 실현하려고 시도하는 것의 오만함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플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계획이 유리창 저편에 있고 그 유리창이 아무리 흐리더라도 말입니다.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비범한 호모 사피엔스 종의 단순한 한 명의 관찰자로서, 저는 우리가 단순히 무의미함의 끝없는 순환인 죽은 가상주의 속으로 가라앉기 위해 그토록 높이 올라 왔고 그토록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아니요, 퇴폐는 깊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별들은 여전히 손짓하고, 신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엘리엇을 인용하며 끝냈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 지성의 낙관주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의지의 낙관주의는 반영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시도만을 할 뿐이다. 나머지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