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유명한 에세이를 하나 더 올립니다. 이 에세이의 확장판인 저작이 국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호평만 받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아래 아래 있는 지난번 포스팅에서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짤막하게 소개하면서 이 저작에 대한 비판적 리뷰의 링크를 포함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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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Graeber - Bullshit Jobs: A Theory (2018)
https://www.amazon.com/Bullshit-Jobs-Theory-David-Graeber/dp/150114331X
불쉿 잡 -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은이),김병화 (옮긴이) 민음사 2021-08-20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8473264
1. 요약
* 출처: 일본어 위키페디아
https://www.jpan.wiki/wiki/en/Bullshit_Jobs
Bullshit Jobs: A Theory 는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2018년 책으로 무의미한 직업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 사회적 위해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직무의 절반 이상은 무의미하며, 직무를 자존심과 연관짓는 노동윤리와 결합하면 심리적으로 파괴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레이버는 다섯 가지 무의미한 직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직무에서는, 노동자는 자신의 역할이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 무의미하지도 해롭지도 않은 척 한다. 프랑키 Frankie, 군 Goon, 덕트 테이퍼 Duct Taper, 박스 티커 Box Ticker, 태스크마스터 Taskmaster 이다. 그는 노동과 애호되는 수고의 관련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잠재적 해결책으로 노동조합과 기본 소득을 제안했다.
이 책은, 2013년에 출간된 인기 에세이의 확장판이며, 이후 12개 언어로 번역되면서, 그 기초가 되는 전제가 YouGov 의 여론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그레이버는 무의미한 직무에 종사 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수백 장의 추천서를 받아, 2018년 5월에 사이먼&슈스터에서 출판된 책에서 그의 논거를 개정했다.
정리
Bullshit Jobs 에서 미국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자동화 생산성의 이점은 1930년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 에 의해 예측된 바와 같이 주당 15시간의 노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신 “Bullshit Jobs 으로 이어지고 있다. 완전히 무의미, 불필요 또는 유해하기 때문에 고용조건의 일부로서 직원들은 그렇지 않은 척 할 의무가 있다고 느끼고 있어도 직원들조차 그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 이러한 직무는 좋은 보상과 충분한 자유시간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레이버는 직무의 무의미함이 그들의 인간성을 감소시키고 “심각한 심리적 폭력”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직무들, 그리고 그가 설명하듯이 다섯 가지 유형의 완전히 무의미한 직무들:
상사를 중요하다고 느끼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프랭키. 예를 들어, 접수원, 관리 어시스턴트, 도어 어텐던트 (문지기), 사이트의 이용 용이성을 무시하는 웹사이트 제작자.
로비스트, 고문 변호사, 텔레마케팅 담당자, 홍보 전문가, 커뮤니티 매니저 등 고용주를 대신하여 타인을 해치거나 속이기 위해 행동하는 악당.
영구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문제를 일시적으로 수정하는 덕트 테이퍼. 예를 들어, 불거져 오른 코드를 복구하는 프로그래머, 가방이 도착하지 않는 승객을 진정시키는 항공사의 데스크 스탭.
박스 티커. 예를 들어 설문조사 관리자, 내부 잡지 저널리스트, 기업 규정 준수 책임자, 품질 서비스 관리자 등, 도움이 되지 않을 때 뭔가 유용한 일이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중간 관리직이나 리더십 전문가 등,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을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관리하는, 여분의 직업을 만들어내는 태스크 마스터.
그레이버는 시장 경쟁이 그러한 비효율성을 근절한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직무는 주로 민간 부문에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에서는, 서비스 부문의 고용 증가는 경제적 요구에 힙입은 것이라기보다는 고용주가 중요하다고 느끼고 경쟁력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하를 필요로 하는 ‘경영봉건제’에 더 힙입은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사회에서는, 그는 자본주의 노동을 종교적 의무로 만든 청교도 자본주의의 노동 윤리를 인식하고 있다: 사회적 규범으로서 직무가 그들의 자기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 직무를 무의미하다고 여기면서도 생산성의 진보를 노동일수의 감소로 누리지 않았다. 그레이버는 이 순환을 ‘심각한 심리적 폭력’ 및 ‘우리 집단적 영혼 전체의 상처’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레이버는 미덕의 원천으로서의 노동은 최근의 생각이고 노동은 경멸당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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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Bullshit Jobs: A Theory'로부터의 인용문 하나
우리는 자신들이 별로 즐기지 않는 일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는 남녀들은 공동체들로부터 사랑, 배려, 또는 도움을 받을 가치가 없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우리 자신의 노예화를 묵인하기라도 한 것 같다. 절반의 시간을 – 대개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의 명령에 따라서 - 상당히 무의미하거나 심지어는 반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우리의 자각에 대한 주요한 정치적 반응은 저기 어디에 동일한 함정에 빠져 있지 않은 다른 이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사무치는 원한을 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증오, 원한, 그리고 의심이 사회를 유지되게 하는 접착제가 되었다. 이것은 재난스러운 사태이다. 나는 그것이 끝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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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먼저 나왔던 에세이
On the Phenomenon of Bullshit Jobs: A Work Rant (David Graeber)
Bullshit Jobs 현상에 관해: 한 부류의 일들에 대한 불평불만 (데이비드 그레이버)
* 출처: 스트라이크 매거진 / 2013년 8월
https://www.strike.coop/bullshit-j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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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세기말까지 기술이 충분히 진보해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은 주 15시간 노동을 달성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가 옳았다고 믿을 이유는 많다. 기술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전적으로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기술은, 어느 쪽인가 하면, 우리 모두를 더 많이 일하게 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동원되어 왔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실상 무의미한 일자리들을 만들어 내야 했다. 특히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은밀히는 할 필요가 정말 있다고는 믿지 않는 업무들을 하는데 노동에 할애된 삶 전부를 바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정신적 손상은 심각하다. 그것은 우리의 집단적 영혼을 가로지르는 상처 자국이다. 그런데도 실질적으로 아무도 그것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왜 케인스가 약속한 유토피아는 - 60년대에 열렬히 대망되었음에도 - 실현되지 않았나? 오늘의 표준 답변은 그가 소비주의의 대폭적인 증가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 적은 [노동] 시간과 더 많은 장난감과 쾌락 사이에서 선택해야 되자 우리는 집단적으로 후자를 선택했다. 이것은 멋진 교훈담을 제시하지만 한 순간의 성찰만으로도 그것이 전혀 진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확실히 20년대 이후, 우리는 끝없이 다양한 새로운 일자리들과 산업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해 왔지만, 초밥, 아이폰, 또는 고급 스니커즈의 생산 및 유통에 관련된 것은 거의 없다.
그럼, 이 새로운 일자리들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1910년부터 2000년까지의 미국에서의 고용을 비교한 최근의 보고서는 우리에게 명확한 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지적해두는데, 영국에서도 거의 똑같다). 지난 세기 동안 산업에서, 그리고 농업 부문에서 생산직에 고용된 노동자 수는 극적으로 감소했다. 동시에 ‘전문직, 관리직, 사무직,판매직, 서비스업 노동자’는 세 배가 되어 ‘총고용의 4분의 1에서 4분의 3으로 증가’했다. 바꿔 말하면, 상당수의 생산적 일자리들은 예상대로 자동화되어 사라졌다 (인도나 중국의 노동 하층민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산업 노동자를 세어도, 그러한 노동자는 이전만큼 세계 인구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 세계인들이 자신들의 기획, 쾌락, 비전, 아이디어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동시간이 대폭 절감되는 것이 아니라 금융 서비스나 텔레마케팅 같은 완전히 새로운 산업들의 창출, 또는 법인법, 학술 및 보건행정, 인적 자원 관리, 그리고 홍보와 같은 부문의 전례 없는 확대에 이르기까지 서비스 부문의 확대뿐 아니라 관리 부문의 확대도 목격해 왔다. 그리고 이 숫자들은 이 산업들에 관리, 기술 또는 보안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모든 사람들, 또는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모든 다른 산업들에서 노동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만 존재하는 보조적 산업들 전체 (개 목욕, 야간 피자 배달)를 반영하지조차 않은 것이다.
나는 이것들을 ‘bullshit jobs’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 모두를 계속 일하게 하기 위해서만 무의미한 일자리들을 계속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미스테리가 있다. 자본주의에서 이것은 일어나지 않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고용이 권리이자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던 소련과 같은 낡고 비효율적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시스템은 필요한 만큼의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소련의 백화점에서 고기 한점을 판매하는 데 세 명의 직원이 필요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시장경쟁이 수정하게 되어 있는 종류의 문제이다. 적어도,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고용할 필요가 전혀 없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라면 절대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그런 일이 벌어진다.
기업들이 냉혹한 다운사이징에 착수한다고 해도 일시해고와 노동강화는 언제나 실제로 물건을 만들고, 움직이고, 수리하고, 유지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연금술을 통해 월급쟁이 사무직원들의 수는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점점 더 많은 고용인들이, 실제로 소비에트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게, 서류상으로는 주 40시간 또는 50시간을 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케인스가 예측한 바와 같이 주 15시간만을 일한다. 그들의 시간의 나머지는 동기부여 세미나 개최와 참석, 페이스북 프로필 갱신 또는 TV 박스셋(용 프로그램) 다운로드에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답은 분명 경제학적이지 않다: 도덕적이고 정치적이다. 지배계급은 자유로운 시간을 손에 넣은 행복하고 생산적인 인구는 치명적으로 위험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60년대에 그런 생활 수준에 근접한 인구가 정말로 출현하기 시작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는지 생각해 보시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도덕적 가치라는, 그리고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모종의 치열한 노동 기율에 복종하고자 하지 않는 이는 누구든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감정은 그들에게 극히 유용하다.
언젠가 영국의 대학교 학과들에서 관리직의 책임이 한정없이 증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태를 성찰하고 있었을 때, 나는 지옥의 한 가지 가능한 비전을 생각해 냈다. 지옥은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고 딱히 능하지도 않은 업무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개인들의 모임이다. 그들이 우수한 캐비닛 제작자이기 때문에 고용되었다고, 그런데 그 다음 그들이 생선을 튀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기대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해보자. 그 업무는 실제로는 할 필요도 없다 – 적어도, 튀겨야 하는 생선의 수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은 모두 동료 중 몇몇이 캐비닛을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생선을 튀기는 책임을 공평하게 분담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분개하면서 강박적으로 하며 곧 쓸모없는 엉망으로 조리된 생선이 워크샵 곳곳에 잔뜩 쌓이고 그것이 누구나 실제로 하는 모든 일이 된다. 나는 이것이 사실 우리 자신의 경제의 도덕적 동학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자, 나는 어떤 그런 논의도 즉각 반대에 부딪힐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당신은 누구길래 어떤 일자리들은 정말로 “필요하다”고 말하는가? 아무튼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인류학 교수인데, 그것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실제로 많은 타블로이드지의 독자들은 나의 일자리의 존재를 쓸데없는 사회적 지출의 전형적 사례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한 수준에서, 이것은 명백히 진실이다. 사회적 가치의 객관적 척도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자신들이 세계에 유의미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주제넘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얼마 전에, 12살 이래 만나지 않았던 학교 친구와 연락을 취했다. 그 동안 그가 먼저 시인이 되고, 이어 인디 록 밴드의 리더가 된 것에 놀랐다. 라디오에서 그의 노래 몇 개를 들은 적이 있지만 가수가 내가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그는 분명 훌륭하고 혁신적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틀림없이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의 생활을 유쾌하게 하고 개선했다. 그렇지만 두 장의 음반이 실패한 뒤 그는 계약을 잃었고 빚과 갓 태어난 딸에게 시달리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많은 방향성 없는 사람들의 기본 선택인 로 스쿨’을 택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제 그는 뉴욕의 저명한 회사에서 일하는 기업 변호사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전혀 무의미하고 세계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며, 그 자신의 평가로는, 실제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임을 인정한 최초의 지인이었다.
재능 있는 시인-음악가에 대한 수요는 매우 한정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법인법 전문가에 대한 수요는 무한한 듯 보인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주는가부터 시작해서 이 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많은 의문들이 있다. (답변: 인구의 1%가 가처분 자산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경우, 우리가 ‘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이 유용하다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것은 이 일들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또한 보여준다. 사실, 나는 자신의 일이 bullshit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기업 변호사를 한 명이라도 만나본 적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위에서 설명한 거의 모든 새로운 산업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파티에 가면 당신이 흥미로운 것으로 고려될 만한 무엇인가 (예를 들어, 인류학) 를 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한편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기조차 전적으로 꺼려하는 전문직 봉급쟁이들 (한 또는 두?) 부류를 만날 수 있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정말 무의미하고 한심한지에 대해 수다를 떤다.
이것은 심각한 심리적 폭력이다. 내가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남몰래 느끼고 있을 때 어떻게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할 수 있을까? 왜 그것은 깊은 분노와 원한의 감각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일까? 거기다 그 지배자들이, 생선 튀김 노동자의 경우에서처럼, 그 분노가 실제로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되는 사람들에 쏠리게 할 방도를 찾아낸 것은 우리 사회의 독특한 재주이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일이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분명할수록, 그 일에 대해서 지불받을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하는 일반적인 규칙이 있는 것 같다. 객관적 척도를 찾기는 역시 어렵지만, 분별을 하는 쉬운 방도 중 하나는 이 부류 사람들 전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간호사, 쓰레기 수거업자 또는 정비사의 좋은 점을 말해 보시라. 그들이 사라질 경우 결과는 즉각적이고 파멸적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교사나 부두 노동자가 없는 세계는 곧 문제가 될 것이고, SF 작가와 스카 음악가가 없는 세계도 분명 덜 좋은 세계가 될 것이다. 모든 사모 펀드 CEO, 로비스트, PR 연구자, 보험계리사, 텔레마케터, 토지관리인 또는 법률 컨설턴트가 마찬가지로 사라질 경우 인류가 어떻게 고통받을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가 현저하게 더 나아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한 줌의 잘 알려진 예외들 (의사)를 제외하면, 이 규칙은 놀랄 만큼 잘 적용된다.
훨씬 더 고약하게도, 이 규칙이 당연하다는 감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우파 포퓰리즘의 비밀스러운 이점 중 하나이다. 우리는 타블로이드지가 계약 분쟁 중에 런던을 마비시켰다고 지하철 노동자들에게 분개했을 때 그것을 볼 수 있다: 지하철 노동자가 런던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일이 실제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바로 이것이 [우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공화당이 과도한 임금과 이익을 누리는 교사와 자동차 노동자라는 이미지를 꾸며내 그들에 대한 (의미심장하게도,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학교 관리자나 자동차 산업 매니저에 대한이 아니라) 원한을 부추키는 데 눈부신 성공을 거둔 미국에서는 한층 더 명백하다. 그들은 마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당신은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또는 자동차를 만든다! 당신은 진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에 더해 중산층 연금과 의료보험까지도 기대하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누군가 금융자본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완전히 적합한 노동체제를 설계했다면,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진짜 생산적인 노동자는 가차 없이 억압당하고 착취당한다. 나머지는 보편적으로 비방되는, 공포에 찌들어 있는 실업자층과 지배계급 – 특히 그것의 금융 부문의 체현자들 - 의 관점 및 감수성과 동일화되도록 설계된 위치들에서,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급료를 받는 한편 그와 동시에 하는 일이 명확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를 가진 이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원한을 조장하는 더 넓은 층 (관리자, 행정가 등) 으로 분단되어 있다. 분명히, 이 시스템은 결코 의식적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기술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하루에 서너 시간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 이유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다.
혹시나 참고하시라고 유튜브 링크 달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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