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Jason Brennan의 Against Democracy라는 책인데 'against'로 시작하는 여러 논문들과 비슷하게 어그로끄는 제목이죠
어떤 내용인지 간단히 보겠습니다
1. 문제 상황
일단 글의 자료나 문제의식은 미국민주주의입니다만, 우리나라의 현실도 드라마틱하게 다르진 않다고 봅니다(우리나라가 더 낫지 않나 싶기는 합니다..만)
- 브레넌은 미국 시민들이 정치에 대해 너무 무지하거나 지나치게 편견을 가졌다고 지적합니다. 가령, 정말로 기초 사회과학적 지식이 없거나 (가령, 대통령 임기, 국회의원 임기, 국회의원수 뭐 이런 기초적인 수준의 지식도 모른다는 거죠), 아니면 자신의 믿음이나 관점에 지나친 신뢰를 준다는거죠 (나는 XX정당을 지지하기에 나는 무조건 선이고, YY정당을 지지하는 너네는 무조건 악이야, 같은 식)
- 이런 현상에 따라 브레넌은 시민들을 대략 세 분류로 나눕니다.
1) 호빗
: 정치에 완전히 무관심. 정치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음.
2) 벌칸 (스타트랙의 벌칸이겠죠)
: 이성적이고 합리적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균형잡힌 판단을 내림.
3) 훌리건
: 호빗보다 정치적 관심도가 높고, 그들보다 정치에 대한 지식이 많지만, 상대적으로 명료한 당파성을 가짐으로써 벌칸과 달리 정치현상에 대해 균형잡힌 판단을 내리지 못함.
- 브레넌이 볼 때, 미국 시민들 대다수는 호빗 아니면 훌리건입니다. 문제는 다수의 시민들이 호빗일 경우, 흔히 말하는 엘리트주의로 정치가 빠져버릴 위험이 있는 반면, 다수가 훌리건일 경우 흔히 말하는 정치적 양극화(polarization)가 심해지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지겠죠.
- 이상적인 상황은 벌칸에 의한 지배이며, 시민 대다수가 벌칸인 경우겠죠. 하지만 현실은 사회의 소수만이 벌칸이라는거죠.
- 이런 문제 상황에 대해 숙의민주주의자들은 숙의(deliberation)가 대답이 될거라고 생각했죠. 간단히 말해, 시민들이 서로 모여서 토론하고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하면 그들은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게 될 것이고, 그들이 설령 호빗이나 훌리건이었어도 숙의과정을 통해 그들은 벌칸이 될거라고 기대했죠.
- 근데 현실자료를 보면, 숙의과정에 참여한 시민들 대다수는
호빗->훌리건
훌리건->더 강력한 훌리건
이렇게 돼버렸다는거죠. 즉, 숙의민주주의자들이 기대와 달리, 토론은 오히려 시민들을 더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들고, 이미 치우친 사람들은 더 강하게 치우치도록 만들었다는거죠.
- 브레넌은 여기서 우리는 어떤 수준의 정치적 결정을 원하느냐 묻죠. 가령, 우리가 병원에 가는 경우를 생각해보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의학에 대해서 잘 모른다면? 나의 건강이라는 이익이 침해될 가능성이 높겠죠. 우리는 그런 경우를 피하고싶어하고요.
- 정치의 경우는 더 큰 이익이 달려있겠죠. 근데 그런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을 무지하거나 편향된 사람들이 만드는 인풋에 의해 만드는 것을 원하느냐 묻죠.
-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흔히 말하는 garbage-in/garbage-out이죠. 만약 시민들이 무지하거나 편향된 사고만을 한다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민주적 인풋은 질이 낮은 인풋일 것이고, 그런 낮은 인풋에 따라 나오는 아웃풋 또한 저질일 가능성이 높겠죠.
- 만약 시민들 다수가 호빗이거나 훌리건이고, 숙의는 그들을 벌컨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2. 대답
- 브레넌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는 분야라면, 민주주의를 그대로 유지하자는거죠. 하지만 민주주의가 실패하는듯 보이는 분야에서도 굳이 민주주의에 집착해야할 필요가 있냐 묻죠.
- 병원의 경우로 보면, 동네 의사가 지금까지 문제를 잘 해결해왔으면 그냥 냅두지만, 만약 계속해서 그가 문제 해결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굳이 그 병원에 계속 갈 필요가 없다는거죠
- 만약 민주주의가 실패하는 지점들이 있다면, 그 지점에서 브레넌은 호빗, 훌리건, 벌칸이 혼재한 민주주의가 아닌, 벌칸에 의해 의사결정을 하는 epistocracy를 도입하는 건 어떠냐 제안하죠. epistocracy는 다른 말로 epistemological aristocracy라고도하는데요, 지적능력이 뛰어난 소수(소수래도 적어도 몇 천~몇 만명 수준은 되겠죠)에 의해 정치적 결정을 하게 만들자는 겁니다.
- 물론 누가 벌칸이냐의 문제가 근본적인 물음일텐데요, 브레넌은 벌칸을 구분해내기 위해 기초사회과학에 대한 시험을 치르거나 학력으로 기준을 두거나 하는 식의 여러 제도들을 제안합니다 (제안만 하지 도입하자고 결론 내진 않습니다...ㅋㅋ)
3. 문제점?
- epistocracy는 장단점이 명확한 제도죠. 일단, 전문가 또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적능력을 가진 자에 의해 내려진 판단이기 때문에 그 정치적 결정이 '옳을' 가능성이 매우 높겠죠. 가령, 코비드 사태 때 마스크를 써야하냐 말아야하냐를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경우와 공중보건 전문가에 의해 결정하는 경우를 비교해보면 명확하겠죠.
- 하지만 단점도 명확하죠. 플라톤 국가론의 이상국가의 모습이 일종의 epistemological aristocracy라고 볼 수 있는데요, 플라톤이 묘사하는 이상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선결조건이 바로 지배자가 아닌 사람들은 지배자에게 복종한다는 거죠. 근데 이게 가능할까 의문이죠.
- 게다가 설령 벌칸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운이 좋게도 옳은 결정들을 내린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언제 타락하고 부패해서 집단화가 될 지 모를 일이죠. 그 경우 그들은 옳은 결정을 내리기보단 자신의 집단이익에 부합하는 결정들을 내리겠죠.
4. Further reading?
- 이런 epistocracy의 장점을 가져오며 여전히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흔히 lottocracy라고 불리는 제도들이죠. 임의로 선발된 시민들에 의한 지배인데요, Fishkin, Guerrero, Landemore 등이 나름 구체적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은 주로 철학보단 정치학과에서 많이 나오는데요...그래서 전 잘 모릅니다.
암튼, 쉽게 써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인류가 원하는 이상주의라고 생각은 하는데..
현실적이지 않아서 참 아쉽습니다.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각 사람들의 에너지를 정치영역에 일정부분 써야하고
예측 또한 불가능해서 합리불합리, 와리가리하는게 힘든 점이지만
정치참여 기회가 균등하기에 좀 더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인기투표로 뽑혀 일안하는 국회를 보면 세금이 아깝습니다.
2. 민주주의 가치를 도구적으로 접근하는 위의 방법론이 늘 부딪히는 딜레마는 그럼 당신들이 주장하는 합리적, 균형적 인간을 “누가” 정의하고 선별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 지도자가 독재자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독재가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훌륭한 킹세종을 만났지만 그 이후 쏟아질 재난과 같은 독재자들은 어찌 대응할 것인가.
본진인 유럽에서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걸, 극우파퓰리즘이 득세하는 것만봐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빗 -> 훌리건 테크는 매우 보편적이라고 봐요. 얼치기 민주주의자들만 넘쳐나는 세상이겠죠.
흔히 여기서 얘기하는 깨어있는 시민의 단결된 힘이라는 게 뭔지 정의 내리기가 애매한 지점이 지적하신 부분이겠죠.
그래서 종교에 가까운 신념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그 고민 자체를 뭐라고 할 순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