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학기 첫 주가 시작되고, 멘탈이 간당간당한 박사 2년차 철학과 대학원생입니다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는 인생을 볼 때마다 니체와 제임스를 떠올립니다
니체는 개인의 주체성을 신의 절대성에 이르도록 끌고가야한다고 했죠
하지만 동시에 신이 아닌 개인은 절대성을 가질 수 없으므로, 나약한 인간은 수많은 합리적 계획이 실패하는 경험 속에서도 자신의 절대성에 가까운 주체성을 유지해가야할 나름 비극적인 상태에 놓일 운명에 빠져있죠
꿈은 (절대적인 신의 수준으로) 높은데, 현실은 (유한한 인간의 한계인) 시궁창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꿈을 추구하면서 살아라 뭐 이렇게 보편적인 말로 바꿔볼 수도 있지 않을까싶네용 (사실 니체는 많이 안 읽어봐서 모릅니다..ㅜㅜ)
윌리엄 제임스는 니체보다는 행복한 삶이었을지 몰라도 나름 고난의 삶을 산 인간이죠
니체, 제임스, 베버 전부 다 한번씩 멘붕해서 정신병 걸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네요
밑에서 언급하는 공리주의의 유명인 존 스튜어트 밀도 정신병이 걸렸다가 살아남은 사람이고요
차이점이라면, 니체는 정신병 걸려서 죽었고, 나머지는 어떻게든 극복해냈다는 차이가 있겠네요
여튼, 다른 19세기 철학자들이 그렇듯, 제임스의 문제의식은 기독교 세계관의 붕괴와 맞닿아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신의 존재는 단순히 기도의 대상 같은 게 아니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였죠
질서를 만들고,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reason)은 인간이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가졌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근데 기독교 세계관이 흔들리자, 단순히 세속적 삶을 살아야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그동안 '이성적'이라고 불렸던 모든 것의 근거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죠
아래에 짧게 일부만 정리해본 제임스의 윤리학은 이 문제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내진 않지만, 그의 빅픽쳐 속에선 이 윤리학 저술도 그런 문제의식의 영향 하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죠
특히 그의 자유의지론은 그런 문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무척 좋아하는 제임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해 짧게 얘기해보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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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19세기 고전 실용주의의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나름 흥미로운 인간이자 학자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심리학에 초점 맞춰져있는데요, 그의 유일한 윤리학 저술은 ‘도덕 철학자와 도덕적 삶(The Moral Philosopher and the Moral Life)’입니다. 여기서 제임스는 윤리학에 관한 세 가지 물음을 구분해야한다고 합니다. 심리학적 물음, 형이상학적 물음, 그리고 개별결정(casuistic)에 관한 물음입니다. 이 중 많이 다뤄지는 건 형이상학적 물음과 개별결정에 관한 제임스의 대답입니다. 형이상학적 물음은 ‘좋음’, ‘의무’ 같은 윤리적 개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겁니다. 개별결정에 관한 물음들은 간단히 말해, 구체적인 개인들은 어떻게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하는지에 관한 물음입니다. 이 두 가지 물음들을 섞어서 대략 중요한 명제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습니다.
P1) 요구(demand)는 가치(value)와 그 가치를 충족해줄 의무(obligation)을 만들어낸다.
P2) 요구는 다원적으로 존재한다.
P3) 요구의 다원성으로 인해 각 주체들은 보다 포괄적인 도덕적 요구를 충족하는 요구들의 집합을 만들어가야한다. 이렇게 더 나은 집합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류 도덕의 역사다.
# P1
도덕의 핵심에는 좋음(good)의 문제가 있죠.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어떤 것을 다른 사람들이 해야한다고 생각하거나 우리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거죠. 도덕적인 주장들의 기반에는 ‘그것이 좋다’ 또는 ‘그것은 나쁘다’ 같은 판단이 들어가있다는 겁니다. 제임스는 더 나아가, 요구가 좋음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렇게 어떤 행위가 누군가에 의해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행위를 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가령, 어떤 아이가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싶어할 때, ‘밥을 먹고싶다’는 요구는 ‘밥을 먹는다’는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누군가 내가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야한다’는 의무를 만들어낸다는거죠.
이와 가장 유사한 관점은 공리주의죠. 밀과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은 동물적인 차원에서 욕망(desire)을 갖고 있고, 그 욕망을 충족했을 때 행복(happiness/pleasure)을 느끼고 그 반대의 경우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행복은 좋은 것이고, 고통은 나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동물적인 수준에서 이미 좋고 나쁨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거죠. 여기서 밀은 이러한 행복이 가장 많고, 고통이 가장 적은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다고 합니다. 좋음의 양적인 많음을 통해 옳음을 결정한거죠. (물론 밀은 벤담과 달리 질적인 차이도 고려합니다) 더 나아가, 공리주의적으로 옳은 행위는 단순히 인간들에게 좋은 것을 넘어서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기 때문에, 그 옳은 것을 수행해야할 의무가 생기겠죠. 이런 점에서 제임스의 윤리학과 유사하죠.
이런 점에서 공리주의와 제임스의 윤리학의 공통점은 ‘좋음’에서부터 ‘옳음’을 이끌어낸다는 점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필요로 하면, 그것은 내게 좋은 것이라는 것. 게다가 단순히 좋은 것을 넘어서 옳은 것까지 되는거죠.
하지만 공리주의와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제임스는 ‘요구’가 핵심이라고 본 반면, 공리주의는 욕망의 ‘충족’을 핵심으로 봤죠. 제임스에게 어떤 것이 좋은지 여부는 그것이 정말로 누군가에 의해 요구되고 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반면, 공리주의의 경우는 단순히 인간들이 어떤 욕망을 가졌다는 것으로 무엇이 좋은지가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욕망이 ‘충족’됨으로써 욕망의 주체가 행복을 얻을 때 비로소 그 행위는 ‘좋은 것’이 되는 겁니다.
# P2
제임스 윤리학의 또다른 특징은 요구의 다원성입니다. 요구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갖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도덕적인 존재이므로, 사회적인 존재이므로, 정치적인 존재이므로 어떠어떠한 요구를 갖게 된다는 식의 주장을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런 식으로 ‘추상화된 인간’의 요구를 전제하지 않고, 구체적인 개인들의 실제 요구에 초점을 맞춥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 요구들도 다양하겠죠. 게다가 각 개인들의 요구의 근원(source)은 바로 그 개인들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요구의 종류가 많다’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요구를 만들어내는 근원 자체가 다양하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이걸 다원주의(pluralism)라고 부를 수 있겠죠.
이러한 다원주의는 공리주의와 제임스 윤리학의 두번째 차이를 보여줍니다. 공리주의의 경우, 추상화된 인간의 성질(욕망을 갖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통해 좋음과 옳음을 결정합니다. 공리주의에게 ‘좋음’의 기준은 욕망의 충족, 즉 행복이죠. 행복이라는 하나의 기준을 통해 무엇이 좋은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는 일원론(monism)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제임스의 다원주의는 가령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투쟁도 누군가 투쟁을 원하고 있다면 투쟁하는 행위는 좋은 것이 될 수 있다고 보죠. 극단적으로 보면, 행복을 주지 않고 고통만을 주는 행위들도 당사자가 원한다면 적어도 그에겐 좋은거죠. (고통을 겪으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의 경우엔 공리주의적으로 설명이 되겠지만, 행복을 느끼지 않으며 고통만을 겪으면서 무언가에 헌신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들은 단순히 욕망의 충족이라는 점에서 설명되긴 어렵다고 보겠죠. 저 개인적으로는 반신반의입니다)
# P3
그러면 인간들은 이 요구의 다원성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냐. 제임스의 대답은 공리주의와 매우 닮았습니다. 최대한 많은 요구들을 충족하며, 최소한의 요구들을 배제하는 요구들의 집합을 만들어가라는거죠. 서로 충돌하는 요구들이 존재하면, 더 많은 요구들을 포함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충돌하지 않는 요구들은 반드시 포함되는 그런 포괄적인 집합을 만들어가라는겁니다. 제임스가 볼 땐, 이러한 요구들의 집합을 점점 확장해나가는 것이 인류 도덕의 역사입니다. 가령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열등한 신분에 속한 자들의 요구는 당연하게 배제됐지만 이젠 도덕적 요구의 집합 속에 포함되는 식으로 그 집합은 계속 확장되어왔다는거죠.
따라서 보다 포괄적인(inclusive) 집합을 추구하는 구체적인 개인들은 더 포괄적인 집합을 위해 자신의 요구를 충족하기를 포기해야할 수도 있겠죠. 여기서 개인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도덕적 요구들의 집합에 비춰서 자신의 요구를 버릴지 계속 추구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요구를 실현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도덕적 요구의 집합이 더 포괄적으로 되는지 (더 많은 요구를 충족하는지) 아니면 덜 포괄적으로 되는지 (충돌되는 요구들이 많아서 결과적으로 더 적은 요구를 충족하게 되는지)를 봐서 결정하라는거죠. 만약 내 요구가 합당하다면, 그 집합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그 집합을 더 포괄적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내 요구가 다른 수많은 개인들의 요구들을 버려야지만 충족될 수 있다면, 내 요구는 포기해야겠죠.
# 문제들
남아있는 자명한 문제들이 있죠. 일단, ‘옳음’대신 ‘좋음’으로 도덕적 판단을 평가할 경우, 어떤 행위가 ‘옳기 때문에 옳다’는 판단을 배제하게 되겠죠. 가령, 굉장한 부자의 재산을 조금 훔치는 경우, 그 부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행위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도둑질은 도덕적으로 그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게 설령 도둑의 요구를 충족하고, 부자의 요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체 도덕적 요구의 집합을 확장한다고 하더라도요. 결국 이런 점에서 아주 기본적인 도덕적인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죠.
제 생각엔, 아마 제임스라면 이렇게 기본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도덕적 가치들은 인류 역사적으로 확립되어온 도덕적 요구의 집합 속에 기본적으로 포함돼있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살인, 도둑질, 강도 등등에 대해 ‘정말 그것이 좋은가?’ 같은 식의 물음을 ‘누군가 그것을 원하고 있는가?’라는 고려를 하지 않고도 우리는 즉각적인 판단들을 내리죠. 이건 단지 우리가 살아온 사회 속에서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는 도덕적 요구의 집합 속에 살인, 도둑질, 강도 등은 하면 안된다는 요구가 기본으로 포함돼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물론 여전히 물음은 남습니다. 가령, 이렇게 기본적으로 포함돼있는 요구들은 어느 정도로 다른 요구들과 충돌해도 유지돼야하는가 같은 거 말입니다. 하나의 요구와 살인하면 안된다는 요구가 충돌하면 후자가 이기지만, 전인류의 요구와 충돌하면 이 요구가 이길 수 있겠죠. 양적인 사고를 하는 제임스니까, 도대체 인류 역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수용돼온 가치들은 얼마만큼의 양적인 가치를 갖는지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와 유사한 물음은, 모든 요구가 동등한 가치를 가질 수 없지 않냐는 거겠죠. 어떤 도덕적인 요구는 구체적인 개인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가치와 의무를 만들어내지만, 어떤 요구들은 구체적인 개인의 요구더라도 그것을 충족할 의무를 만들어내지 않겠죠. 가령 나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요구가 있다면, 이것이 설령 그 개인에게는 좋은 것이더라도 그것을 충족할 의무가 다른 사람들에게 존재한다고 보긴 힘들겠죠.
"나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요구"는 두 가지로 분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나를 살려줘. 2) 너는 죽어줘. 그런데, 요구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이 첫 번째 요구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요구를 하는 사람보다 첫 번째 요구를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경우, 그리고 첫 번째 요구와 두 번째 요구가 충돌하는 경우, 첫 번째 요구는 옳고 두 번째 요구는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나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요구"는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합쳐진 형태이므로, 전체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여기서 다른 문제도 떠올랐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미 첫번째 의무를 저버리고 두 번째 요구를 취한 경우, 여전히 그 사람도 첫 번째 요구가 있겠지만 그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두 번째 요구가 커지겠네요. 여기서, "살인자를 죽여라"가 옳은지에 대한 판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결국 그 요구되는 대상이 자신에게 좋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 좋아한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어떤 것을 요구한다는 것의 전제조건이라고 본 거고, 원하거나 좋아하는 대상은 결국 그 주체가 봤을 땐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결국 요구한다는 것은 그것이 주체에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