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체로 작성된 부분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본 최초의 인구조사가 실시된 해는 교호(享保) 3년(1721)이다. 당시 조사된 일본 열도의 인구는
약 2,500만에서 2,700만으로 추산되었는데 교카(弘化) 3년(1846)에 이르기까지 일본 인구는 뚜렷한
증가세 없이 정체한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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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포르투갈 로마가톨릭교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
"일본 여자는 자녀를 더 이상 기를 수 없을 때 모두 아기 목을 다리로 짓눌러 죽인다."
이 끔찍한 내용은 중세 에도시대에 일본에서 활동한 포르투갈 출신의 로마가톨릭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가 저서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 직접 기록한 내용이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가구당 세자녀 이상 자라는 법이 결코 없었다. 아이가 세명 이상 태어나는 가구 에서는
(0)부모들이 몰래 아이를 목졸라 죽이거나 생매장해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에도시대 민중들이 기근 속에서도
50%가 넘는 조세부담을 지는 등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과도 연관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로 인한
(1)민란(一揆)이 숱하게 일어날 정도로 가구당 자녀를 세명 이상 낳아 키우는 것은 가족 전체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는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이 있기까지 무려 260여년에 걸쳐 민간에서 성행했던
자발적인 인구조절풍습으로서 일본어로 '솎아낸다'는 뜻의 마비키(間引き)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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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도시대(江戸時代)의 마비키 현상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한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1769-1850)
에도시대(江戸時代) 경제학자 이자 농정가인 (2)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1769-1850)는
(3)데와국(出羽国)과 (4)무쓰국(陸奥国)에서만 매년 1만 6-7천여명, (5)가즈사국(上総国) 에서는
3-4만명에 달하는 갓난 아이들이 매년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기록했다. 이 현상은 전국적
이었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 한하지 않았다.
예컨대, (6)규슈(九州)에서는 자녀가 5명인 집에서는 3명을 죽이고, 토사(土佐)에서는 일남이녀(一男二女)를
상한으로 규제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는 어느 특정 지역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당시 일본 전국에 걸쳐 유행처럼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일견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특히 동북지방에 걸쳐서 가장 심각하게 이루어졌던 풍습으로 보인다.
상기 언급된 숫자만 하더라도 그러하겠으나 일본 역사상 4대 대기근이라 일컫는 겐로쿠(元禄)・호레키(宝暦)・
덴메이(天明)・덴포(天保)의 대기근때마다 이상 저온현상으로 인한 냉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곳이
바로 동북지방이었기 때문이다.
(0) 아이 살해는 주로 어머니들이 맡았다.
(1) 농민 봉기
(2) 에도시대 중기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농정학자.
저서로는 종수원법(種樹園法), 경제요록(経済要録), 경제제요(経済提要), 농정본론(農政本論)등이 있다.
(3) 지금의 야마가타현(山形県)과 아키타현(秋田県) 일대
(4) 지금의 후쿠시마현(福島県), 미야기현(宮城県), 이와테현(岩手県), 아오모리현(青森県) 등 동북지방 북동부 일대
(5) 지금의 지바현(千葉県) 일대
(6) 다쓰카와 쇼지(立川昭二) - 병과 사람의 문화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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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마비키하는 여성을 그려넣은 소원성취용 그림액자(絵馬)
이 섬뜩한 사진은 당시 유행처럼 이뤄지던 마비키하는 여성을 그려넣은 그림액자(絵馬)로, 현재 오타시(太田市)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군마현 오타시(群馬県 太田市) 닛타노쇼 역사자료관(新田荘 歴史資料館)에
원형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마비키가 행해졌던 당시에도 영이런 끔찍한 풍습을 금하고자 하는 그런
움직임은 있었기에 마비키 하는 모습을 그려서 신사나 절에 봉납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인구의 증가, 즉
노동력 확보로 이어지는 것이고 세수를 확보해야 하는 영주나 번 측면에서는 큰 이득이었다. 그런데 인구를
늘려도 모자랄 판에 새로 태어나는 아이를 죽여가며 농민들 스스로 인구를 억제하고 있으니
농촌으로부터의 연공을 경제적 기반으로 살아가는 막부와 번에게는 심각한 사회문제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막부와 번은 이 심각한 사회현상을 막기 위해 여러 번 금지령을 내렸다. 겐로쿠 3년(1690)에는
아이를 버리지 말 것을 금지하는 '기아금지 포령'을 반포했다. 양자를 내다 버린 경우에는 하옥했으며,
목졸라 죽인 경우에는 조리돌림 한 후 갈갈이 찢어 죽였다. 덴포 3년1832년에는 에도막부가
마비키 금지령을 내렸지만 어디까지나 에도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제재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이 끔찍한 풍습을 역사에서 감추거나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풍습이 온전하게
그려진 민속화와 기록물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고, 이 사실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에도시대 중기에
활동한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에 의한 견문록에 의해서였다. 당시 일본은 서구 시각에서
신비로운 문화를 꽃피우는 동양의 해 뜨는 나라였지만 그와 동시에 유럽에 전해진 일본의 이런 잔인하기
그지없는 모습들은 당시 서구권에 적잖이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 당시 중세 유럽 사람들이
동양에 대해 미지의 세계로서 동경을 가지는 동시에 동양이 문화적으로 교화되지 못한 야만한 사람들의
세계라는 인식을 갖는데에 이런 것들이 일조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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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갓 태어난 아이를 마비키하는 아이 엄마를 그린 민속화.
요네다 교코(米田京子)는 자신의 저서 ”근대 모성관의 수용과 변형 - 교육하는 모친(近代的母性勧の受容と変形ー「教育する母親」”
에서 ”마비키는 인구조절수단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필요악이었다.(間引きは人口調節の手段がなかった当時では必要悪であった。)”
고 서술하여, 마비키 현상에 대해 뚜렷한 낙태와 피임수단이 없었던 당시 시대상 어쩔 수 없었던 필요악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기근에 의한 생활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키울 수 없는 어린 자녀를 부모 손으로 거두던 현상은 사실 일본 말고도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에서도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본의 마비키 풍습은 사회적으로 대기근이나 전쟁이 없었을
때에도 일종의 낙태의 한 방법으로서 상당기간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도 다른 현상이다.
두번째 사진을 보면 아이의 목을 다리로 짓누르는 아이 엄마 뒤로 이를 말리며 울부짖는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볼 수 있다.
두번째 사진과 세번째 사진 모두 아이 엄마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사실 마비키가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전국에서 유행처럼 숱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몇 번의 대기근이나 피임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아이 엄마들은 핏덩이같은 어린아이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데에 일말의 죄의식조차 없었다.
이는 일본사회에 뿌리깊게 내려있는 토속신앙인 신토(神道)와도 관련이 있는데 당시 일본 민중들은
(7)7세 이하의 어린아이는 신의 아이이기에 특별한 존재로서, 언제라도 다시 내세로 환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죽이는 이런 일에 그 어떤 죄책감을 젼혀 느끼지 않았다. 마비키가 영아살해라는 끔찍한 죄악이 아니라
오히려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아이를 하늘로 되돌려주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죽이는 방법 또한 다양했는데,
무릎으로 목을 짓눌러 죽이는 법 말고도 *산 채로 생매장하거나 물에 던져 익사시키는 방법들이 주로 이용되었다.
*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를 산 채로 생매장하는 부분에 주목한다. 흔히들 병든 노모를 내다버리거나 생매장하는 것이
고려시대에 있던 풍습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이를 증명하는 사료는 단 하나도 없다. 나는 고려장 문화가 우리의
풍습이 아니라 일본이 지우고 싶어했던 악습인 마비키를 우리 민족에게 덧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치유신을 기점으로 인구증가를 위시한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이러한 잔인한 풍습은 살인죄로 간주되어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마비키는 율령으로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마비키가 살인죄로 규정되면서
영아살해 풍습이 일본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춘 것 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 이후에도 지방 곳곳에서
몰래몰래 어린아이를 죽이는 풍습이 자행되었다. 명치유신 이후까지도 몇몇 지방에서는 남 몰래 마비키가 이뤄졌다고
보는데 그 근거로 (8)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 1875-1962)에 따르면 메이지(明治) 20년경 이바라키현 후카와(茨城県布川)에
가 보니 거의 대부분의 모든 가구가 일정하게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꼽는다.
이를 이아제(二兒制)라고 하는데 이는 마비키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기근 뒤 명치유신 뒤에도 지방 농촌에서
이루어진 일남일녀 이아제는 단순히 '균형이 맞고, 보기에 좋다.'는 이유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일본사회가 근현대로 진입하면서 이 악습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듯 했다. 다만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홋카이도를 비롯한 지방은 1930년대까지도 암암리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2004년에는 요코하마의 한 산부인과에서 낙태한 아이 사체를 의료폐기물이 아닌 '일반쓰레기'로 내보내어
사회적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견문록으로 말미암아 과거 유럽에 야만인의 나라와도 같이
여겨졌을 일본이 지금은 아시아의 유럽을 자처하고 있다니, 지하에 잠든 루이스 프로이스가 혀를 차며 웃을 일이다.
일본의 생명관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남다른 면면이 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과 난징대학살, 그리고
731부대 마루타 생체실험이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다. 일본이 진정한 아시아의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지난 과거들을 숨기고 감출 것이 아니라 다시한번 성찰하고 반성해보는 계기 또한 필요할 것이다.
- (2)편에서 계속됩니다.
(7)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 효고현(兵庫県) 출생 동경대학 졸업.
(8) 에도시대 후기의 낙태, 마비키에 관한 실상과 어린이관(생명관) : 도요시마 요시에(豊島 よし江), 료토쿠대학(2016)
/Vollago
낙태 vs 영아살해 vs 살인.
제가보기엔 영아살해는 낙태보다 살인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가까운게 아니라 같은거죠)
기근이 아닐때에도 흔하기 행해졌던 일이고
죄의식이 죄책감도 갖지 않을 수 있는 풍습이라고 설명되어있네요
본문 내용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느냐하는 문제는 오막사라무님도 고려하지 않으신거 같구요
ㅎㄷㄷㄷ
패턴이 ‘우리도 이렇다 그래서 마찬가지다’ 하는식으로 미꾸라지도 못살 똥물타기는 ㅉㅉ
저는 상관없으니 저 미개한 일본 풍습 욕할거임 ㅋㅋㅋ
그냥 니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도쿄 한복판을 뼈다귀로 장식하면 되겠구만...
시대(정치)가 그렇게 만든거죠. 글내용에도 있지만 세금을 얼마나 걷어갔으면 저렇게 까지했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글애도 엄마가 애를 죽이는데 죄책감이 없었다고 써있는데 그건 모르는 일인거구요.
어떻게 갓낳은 제 자식을 죽이는에 죄책감이 없었을까요.
19세기에 중국에서 이런 사례를 보고 놀란 영국인들이 역시 미개하다는둥 떠들다가 자기나라 통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었죠.
일본이 덧씌운거라면 정말 충격입니다.
사실이라면 고려장에 대한 제대로 알려서 더이상 언급되지 않게 해야하지 않을까요.
와.. 사료가 하나도없는데 애들보는 만화에 버젓이 등장하다니..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네요.
기근이 들면 아이를 살해하는 현상은 전세계 어디에나 곧잘 있어요. 심해지면 인육을 먹기도 하구요.
그런데 마비키의 특이한 점은 딱히 기근이 없어도, 꾸준히, 너무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마을 하나에 모든 집이 '1남1녀'인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 특유의 살인적인 세율에 있습니다. 글에 '50%가 넘는 세율'이라고 되어있는데, 50%가 제일 낮은 수준이었고, 곧잘 70%까지 세율이 올라가곤 했답니다. 그냥 단순하게 지금 소득세를 50~70%로 매긴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빡빡한지 상상이 되지요. 그러다보니 부모 입장에서 부양할 수 있는 피부양자의 수는 한정 될 수 밖에 없으니, 보통 아이는 둘, 그리고 노동할 수 없는 부모는 곧잘 버리는 현상이 있었던 거지요.
한국은 옛날부터 세율이 낮았습니다.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지만, 어쨋든 맹자였나, 공자였나 말에 '맥족은 세율이 1/20으로 너무 낮다'란 말이 있을 정도였고, 그 외에도 여러 자료로 보건데 세율은 평균적으로 10% 남짓이었습니다. 우리가 '삼정의 문란'으로 기억하는 조선후기 탐관오리의 수탈을 포함해도 고작 30%남짓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대신 세금의 차이만큼 조선 정부는 약했고, 일본 정부의 힘은 강했지요. 실제 나라의 포텐셜(?)차이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국력 차이는 더 심하게 났습니다. 세금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만큼 백성을 생각해 세율도 낮추고 으리으리한 토목공사를 자제한 조선의 선택이 꼭 잘못된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