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쪽에서 음모론의 분위기를 풍기는 글들을 보면, 상당수가 미국 내지 국제적인 음모조직 내지는 어떤 카르텔이 존재해서 이들이 FED를 통해 강달러기조를 조작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주장들 중에서 제일 근거를 많이 드는 게 레이건 시대의 강달러 기조로 인해 신흥국이 파산했다는 건데, 신흥국이 80년 대 정말 어려웠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니 이런 생각을 부정하는 것도 좀 애매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돌려서 생각해보면, 이런 국제적인 음모 카르텔이 존재한다 치고, 이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신흥국의 경제 파탄을 이끌어내면 어떤 이득이 생기는 걸까요? 중남미를 비롯한 신흥국들이 본격적으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물결이 강력해지고 좌파운동이 득세하기 시작한 게 다름아닌 80년대 경제위기를 겪고나서부터입니다. 이때 나온게 그 유명한 “종속이론”입니다. 우리나라 운동권에까지 널리 퍼졌을 정도죠. 정치적으로 미국이 중남미에서 무리한 비밀군사작전을 펼치면서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부담을 감수할 수 밖에 없게 만든 게 다름아닌 신흥국의 경제위기로 인해 촉발되었던 거지요.
꼭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라도, 신흥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디폴트가 미국 내의 자본가나 존재한다고 주장되는 이런 음모론적 카르텔의 입장에서 어떤 도움이 되는 걸까요? 이것 또한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폴 볼커가 금리 20%씩 때려가면서 강달러 기조를 펴기 시작했던 건 81년 6월부터입니다. 그런데, 신흥국들이 본격적으로 경제위기에 봉착해서 나가 떨어지기 시작한 건 훨씬 뒤인 80년대 후반부터죠. 5년이나 되는 시간차는 어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설령 강달러 기조가 신흥국을 어려움에 봉착하는 중요한 원인이라 할지라도, 그게 “직접적”인 원인이라 하기에는 너무 큰 시간차이입니다. 당연히 그 사이에 강달러에 의해서건, 다른 원인에 의해서건 좀 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그 시간차 사이에 존재해야 말이 됩니다.
사실, 인과관계로 따지면, 강달러보다 훨씬 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요인은 존재합니다. 음모론자들이나 그런 선명한 원인을 애써 무시하지만, 사우디가 OPEC의 합의안을 무시하고 석유를 무한정 뽑아내기 시작한 게 1986년이고, 바로 그 사건을 계기로 곧바로 유가가 60불에서 25불로 며칠만에 반토막이 나버립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던 당시 120불이던 유가를 6년동안 강달러기조를 지속시켜가면서 겨우 60불로 정상화(석유파동 이전 수준)시켰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강력하고 충격적인 변동성이지요.
그렇다면, 80년대 신흥국의 경제위기를 “강달러”가 일으킨거라고 하는게 올바른 분석일까요? 아니면 원자재가격 폭락이 야기한거라고 하는게 올바른 분석일까요? 마찬가지로 지나친 달러화부채가 신흥국에게 올무로 작용한 건 일단 “너무 많이 빌렸다” 쪽에 방점을 두는게 맞을까요?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해서)갑작스레 상환능력이 쪼그라들었다”에 방점을 두는게 맞을까요?
왜 개연성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적인 관점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느냐 하면,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면 당연히 복잡한 생각을 안해도 되니 머리를 덜 써도 되고 편합니다. 세상의 문제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 일으키는 거니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 자신의 국가, 내가 지지하는 특정한 집단은 무고하고 순수하다는 면죄부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고하고 순수한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의 나 자신이라는 소속감이 얼마나 큰 심리적 만족감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지는 뭐 두말하면 잔소리죠.
하지만, 그런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하다가는 문제가 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심리적인 만족감과 안정감을 지향하려는 습관을 버리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불편하고, 심리적인 불안과 불안정감을 감수하더라도 세상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내 몸에 체화시켜야 투자과정에서 실수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신흥국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만 그런게 아닙니다. 미중 무역전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단순하고 도식적인 관점에 매몰되면 안됩니다. 누군가가 정말로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그림을 그리고 미국과 중국 사이의 수많은 지점에서의 갈등을 컨트롤하고 조율하고 있다는 식의 전제가 비생산적인 이유도 그렇기 때문일겁니다. 그냥 트럼프는 자기 재선을 위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있고, 그렇게 모든걸 다 하다 보니 이렇게 온 것이고, 그건 시진핑도, 문재인 대통령이나 김정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각각의 입장들만 고려해도 작금의 사건전개는 얼마든지 깔끔하게 설명이 가능하고 앞으로의 시나리오도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틀리고 욕을 먹지만, 장기간 꾸준히 해당 문제를 파고들어 연구해 왔던 전문가들의 말에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는 거지요. 항상 허튼소리만 하고 자꾸 틀리기만 한 가짜 전문가인지, 아니면 여러번 틀리긴 하지만 충분히 들어줄 부분이 많은 전문가인지를 구별하는 건, 솔직히 국어공부만 일정수준 이상 하고, 책을 꾸준히 읽으면서 기본 이상의 독해력만 가지고 있다면 어려운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이 중요하기도 한거겠죠. 지금처럼 세월이 하수상할 때일수록 이러저러한 주장들이 판치는 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차려야 피같은 내 돈을 허망하게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살아움직이는 생물이니 "예측"이 아닌 "대응" 만이 살길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