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는 자기 삶의 애환이 담겨져 있지만, 이 사람도 배경이 독특한 만큼 연주에서 울려나오는 깊이가 참 좋더군요. 그리 길지 않은 손가락으로 건반 위로 빈틈없이 움직이는 타건법도 근사하구요.
쇼팽 콩쿨 최초의 아시아인 우승자. 그리고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보 포고렐리치와 관련되어 당 타이 손은 자주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인이고 베트남 출신이기 때문에 인기스타로 발돋움하지 못합니다.
당 타이 손에 대해서 찾아보고 알게된 후로 그에 대해 알게된 내용을 꼭 정리해둬야 겠다는 생각이 늘 머리속에 맴돌았습니다. 이 만화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요. 블로그는 하지 않고, 위키는 쓰기 어렵고, 고클은 좀 복잡해보이고.. 우연히 알게된 클리앙 클래식 동호회에 왠지 글을 남기고 싶네요.
1. 출생 및 성장
당 타이 손은 1958년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월남과 월맹으로 나누어져 내전중이었습니다.
당 타이 손의 어머니는 체코 프라하 음악원에서 유학을 했었고 프랑스 낭만주의적 경향에도 어느정도 정통한 베트남 최초의 여성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는 처음 피아노를 어머니를 통해 배웠는데 쇼팽을 처음 접한 것도 그의 어머니를 통해서 였습니다. 인터뷰에서 그가 회고하기로는 7살 정도 쯤에 어머니가 쇼팽의 녹턴과 마주르카를 처음 들려주었는데 정말 아름다웠고, 이후로 어머니를 따라서 종종 연습을 해보았다고 하구요. 이 때는 내전 와중에서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시기였고 당 타이 손은 하노이 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8살 때인 1965년 미국이 월남전에 참전을 하게 되자 그의 가족들은 산속 깊은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전기도 안들어오고 문명생활을 접하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피아노를 가져가긴 했지만 전쟁통에 소를 이용해서 끌고간 피아노는 망가졌고, 비까지 맞아서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악보도 피아노도 없었던 산속 피난 생활 중에 그는 낮에는 손으로 그린 종이 피아노를 두드려 소리를 연상하며 연습하고, 밤에는 촛불을 켜놓고 악보를 그렸습니다.
2. 오직 쇼팽 뿐인 환경
그러던 중 당 타이 손의 어머니가 1970년 쇼팽 콩쿨의 참관인(심사위원말고)으로 초청되어 폴란드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쇼팽 악보 전부, 그리고 쇼팽 작품들이 녹음된 것을 챙겨왔습니다. 그 녹음 중에는 1965년 콩쿨 우승자였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도 있었습니다.
당 타이 손은 그때까지 한번도 다른 사람의 연주가 녹음된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듣게된 곡은 바로 아르헤리치가 연주한 열정적인 피아노 협주곡 연주였습니다. 피아노 소리를 제대로 듣지도 못하던 환경에서 그가 받았을 충격과 동경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등은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오직 그에게는 쇼팽 악보 전부와 쇼팽 녹음만이 있었습니다.
그가 계속 종이 건반으로 연습했는지, 전기는 계속 안들어왔는지는 인터뷰 내용등에서 물어본 사람이 없어서 정보가 없었지만 그가 서구 출신 피아니스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불리한 환경에서 악전고투를 하며 피아노를 배워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3. 러시아 유학
길었던 전쟁은 1973년 미국과 동맹국이 철수하고, 1975년에 월남의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끝이 납니다. 이로서 베트남은 공산국가가 됩니다. 냉전은 더욱 심해지고 전세계는 소련측과 미국측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당 타이 손은 하노이 음악원에 적을 두고 계속 피아노에 정진 합니다. 그러던 중 1974년 하노이 음악원에 교환교수로 와있던 소련의 카츠 교수의 눈에 띄어 모스크바 유학을 제안받게 됩니다. 그후 1976년 하노이 음악원을 졸업한 당 타이 손은 1977년부터 모스크바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이하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나이 18살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에는 후에 피아니스트 겸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는 미하일 플레트네프, 그리고 훗날 평생 그와 함께 할 이름 이보 포고렐리치 등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당 타이 손은 1980년 쇼팽 콩쿨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서 부터 쇼팽 위주로 음악을 접해온 그가 쇼팽이 태어나고 자란 폴란드에 가보고 싶고 쇼팽이 남긴 음악만으로 열리는 콩쿨에 참가를 하고 싶은 건 당연했을 겁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1980년 쇼팽 콩쿨 참가자를 선발하기 위해 열린 오디션에서 당 타이 손은 1위로 선발됩니다.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은 의외의 실력자 출현에 술렁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 콩쿨 우승자로 이미 인기스타였던 플레트네프도 당 타이 손의 피아노에 호기심을 표시하기도 했고, 특히 당시 함께 선발된 동갑내기 포고렐리치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소련에서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발매된 음반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포고렐리치는 당 타이 손을 그의 기숙사 방으로 초대해서 그가 어렵게 입수했던 음반들을 함께 듣곤 했습니다.
4. 1980년 쇼팽 콩쿨
드디어 당 타이 손은 쇼팽 콩쿨이 열리는 바르샤바에 오게됩니다. 당시에는 어릴 때부터 접해온 쇼팽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 우선이었고, 콩쿨 우승은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최종 결선에 올라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아노 협주곡에 착용할 별도의 연주복을 준비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때까지 피아노 협주곡 협연 자체를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옷이 없었기도 했다는군요. 최종 결선에서 그는 자신의 옷이 아닌 빌린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가게 됩니다.
게다가 쇼팽 콩쿨은 그가 처녀출전한 콩쿨이었습니다. 생애 최초 나간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게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무 경력이 없었던 그가 주최측에 제출한 신청서에는 단 2줄이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 출신지 베트남 하노이
-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에서 학업중
주최측이 나중에 당 타이 손에게 한 얘기에 의하면, 지나치게 짧은 내용에 당황한 주최측은 그의 참가를 거절하려고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트남 출신자로 쇼팽 콩쿨의 참가국이 더 늘어나는 점, 그리고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에서 학업중이라면 초급 연주자는 아닐 거라는 점을 고려하여 결국 그는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폴란드는 소련측 공산국가였는데 같은 공산국가인 베트남을 배려한 면도 있어 보입니다.
당시 쇼팽 콩쿨은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던 시기였습니다. 1960년 우승자 마우리치오 폴리니, 1965년 우승자 마르타 아르헤리치, 1970년 우승자 게릭 올슨, 1975년 우승자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등 지금 들어보아도 화려한 이름들로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의 당시 콩쿨에는 현재 글렌 굴드 이후 바흐 스페셜리스트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안젤라 휴이트도 참가를 했었습니다. (그녀가 참가한건 확실한데 성적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당 타이 손에게 최초의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1965년 우승자였던 아르헤리치는 당시 피아노계에서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었고 1980년 콩쿨에는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하였습니다.
한편, 1980년 콩쿨에서의 당 타이 손과 관련하여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시 그가 착용한 의상입니다. 유튜브 등을 통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스타일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정말 눈 버립니다. 비틀즈 등을 통해서 눈에 익은 1980년대 인기 스타일이긴 한데.. 당시 그의 장발, 큼지막한 회색 자켓, 이상한 안경은 볼 때마다 참 어색합니다. 피아니스트라기 보다는 빌게이츠와 같은 컴퓨터 폐인 너드를 연상시킵니다.
5. 포고렐리치는 천재란 말이에요.
복장이 어찌되었든 간에 당 타이 손은 1차, 2차 결선을 무난히 통과하며 최종 3차 결선까지 올라갑니다. 특히 나중에 별도의 특별상을 받은 그의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 연주는 매우 탁월했습니다.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는 폴란드의 춤곡으로 러시아의 압제에 시달리던 고국 폴란드을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격려하던 쇼팽의 정서가 담겨있다고 평가되는데, 중국,프랑스,미국 등 외세에 시달리던 베트남 출신 연주자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통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있는 듯 합니다)
만화 피아노의 숲을 보면 주인공인 카이가 쇼팽 콩쿨 경연 도중 전주곡 중 가장 마지막곡 Op.28-24를 연주하면서 마무리인 포르테시시모(fff)를 주먹을 쥐고 내려치는 모습에 관객들이 경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1980년 쇼팽 콩쿨의 유튜브 녹화를 보면 당 타이 손도 콩쿨에서 이 곡을 연주했었고 놀랍게도 그가 해당 부분을 만화와 동일하게 건반을 주먹을 쥐고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세게 치는 것과 다르게 퍼지는 울림은 교회 종소리 보다도 더 깊은 음색을 보이구요. 이쯤되면 지금까지 펼쳐진 당 타이 손의 이야기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을 볼 때 그의 인생이 만화보다 더 만화같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당 타이 손을 포함한 당시 콩쿨 참가자들의 연주는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의 관심에서 다소 밀려나있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원인은 함께 참가했던 포고렐리치 때문이었습니다. 포고렐리치는 10여명이 진출하는 최종 결선에 나서지 못하고 2차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왔고 앞으로도 틀림없이 오랫동안 전해질 이야기가 탄생하게 됩니다.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지금도 그렇지만 극단적으로 개성이 강하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탁월한 연주실력으로 주관적 해석을 고집하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참신하고 새로운 연주라는 사람들과 악보를 무시한 불편하고 낮선 연주라는 사람들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본인 스스로가 '콩쿨은 피아니스트를 걸러내는 훌륭한 제도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하는데 굳이 콩쿨이 아니더라도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사람이 많은데도 그가 쇼팽콩쿨 등 여러 콩쿨에 참가했던 것을 볼 때 본인이 한 말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어쨌튼 그는 콩쿨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미스터치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강약과 템포로 강렬하고도 탁월한 연주를 선보입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에게서는 이렇게 주관적인 연주를 콩쿨에서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 쏟아져 나옵니다. 우여곡절 끝에 1차 결선을 통과시키기로 의견이 모아지자, 심사위원중 한명이었던 루이스 켄트너가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심사위원직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후로 켄트너는 바르샤바에 발길을 아예 끊습니다.
이렇게 2차 결선에 올라간 포고렐리치는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었고, 2차 결선에서도 또다시 주관적 해석으로 템포와 강약을 무시한 과감한 연주를 합니다.
결국 포고렐리치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최종결선에는 올릴 수 없다고 의견이 모아집니다. 그러자 심사위원장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이에 반발합니다. 포고렐리치는 천재이다.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하는 사람을 탈락시킨 심사위원으로 이름을 남기느니 심사위원을 때려치겠다며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그 길로 그녀는 제네바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일설에서는 격론 끝에 포고렐리치의 탈락이 확정되자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카메라에 대고 그는 천재라고 외치고 사퇴했다고도 하고, 집으로 그녀가 가면서 호텔방에 3살짜리 딸 마저 두고 돌아갔다고도 하는데 워낙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된 소재라서 인터넷 검색으로는 사실과 낭설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르헤리치의 열정적 연주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저도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정말 좋아합니다), 템포와 강약이 다소 과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입니다.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의 연주 스타일과 유사한 포고렐리치의 과감한 연주에 호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포고렐리치는 1980년 쇼팽 콩쿨에서 심사위원장을 포함하여 심사위원 2명을 사퇴시키는 엄청난 소동을 일으키며 중도 탈락하고 맙니다.
6. 제10회 1980년 쇼팽 콩쿨 우승자
서구 기준으로 볼 때 동남아시아는 아프리카와 크게 다를바 없는 풍족하지 못한 지역이었습니다. 내전으로 황폐화된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온 흑인 청년이 쇼팽콩쿨에 참가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떤 시선으로 볼까요? 콩쿨 내내 당타이손은 그가 베트남 출신이기 때문에 안쓰럽다는 눈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포고렐리치 등 대부분의 쟁쟁한 경쟁자들이 다른 국제 콩쿨에서 이미 다양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어 인기를 누리고 응원을 얻었던 것과 비교할 때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듯한 무명의 당 타이손은 많은 부분에서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함께 왔던 동료인 포고렐리치가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독차지해 버리고, 어린 시절부터의 우상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도 자신이 아닌 포고렐리치를 응원했던 상황에서 당 타이 손은 과연 어떤 기분으로 마지막 최종 결선을 준비했을까요.
최종 결선인 쇼팽 피아노 협주곡 연주에서 당 타이 손이 준비한 것은 2개의 쇼팽 협주곡 중 2번이었습니다. 만화 피아노의 숲에서도 언급되지만, 쇼팽 콩쿨에서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압도적으로 참가자들에 의해 선호됩니다. 그리고 당 타이 손 이전까지 참가자들 중에 2번으로 우승한 사람은 1명 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체 우승자들 중에서 2번 우승자 현황을 찾아보았는데 능력부족으로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참가자 대부분들이 외면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생애 처음 참가한 콩쿨에서, 생애 처음으로 협연을 하게 된 당 타이 손은 연주시 입을 옷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빌려입은 옷을 입고 오케스트라가 기다리고 있는 피아노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하아.. 이건 아무리 떠올려봐도 만화의 한 장면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10회 쇼팽 콩쿨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뿐만 아니라 심사위원들에게 특별한 감명을 주지 않는 한 수여되지 않는 피아노 협주곡 특별상도 함께 받아 냅니다. 이로서 당 타이 손은 마주르카상, 폴로네이즈상, 피아노 협주곡상 3개 특별상을 휩쓸게 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포고렐리치가 아니라 당 타이 손이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종이 피아노를 두드려서 연습했던 사람이 생애 최초로 참가한 콩쿨에서 처음으로 협연한 연주로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한편, 제네바로 귀국했던 아르헤리치는 우승자가 당 타이 손으로 결정되자 그에게 전보를 보냅니다. 축하한다. 당신의 쇼팽 연주는 정말 아름다웠다. 앞으로도 계속 발전하기를 바란다.
먼 뒷날의 이야기이지만 계속 정진한 당 타이 손이 아르헤리치와 2010년 쇼팽 콩쿨에 심사위원으로 나란히 앉아 의견을 사이좋게 주고 받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더군요. 2005년에도 두 사람 모두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5년 일찍 그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아르헤리치가 갑작스런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우리나라의 강충모 교수를 추천했습니다. 그래서 역시 아르헤리치가 당 타이 손이 불편해서 자리를 피했다는 억측들이 생기기도 했고, 덕분에 한국도 쇼팽 콩쿨 심사위원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7. 포고렐리치가 드리운 긴 그늘
포고렐리치는 최종결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연주와 사건들로 결국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콩쿨 탈락이 심사위원들간 세력다툼 때문이라고 믿었던 그는 자신의 탈락에 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항의를 하는 의미로 포고렐리치는 우승자인 당 타이 손과 수상자들의 콘서트가 예정된 날 같은 시간에 장소를 빌려서 연주회를 열기로 합니다.
사람들은 우승자의 연주에 대한 관심보다는 화려한 소동의 탈락자가 연주회까지 연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었고, 자신을 탈락시킨 심사위원들에 대한 항의는 연주회의 대성공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당 타이 손이 우승자로서 받아야했던 주목은 반감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하여 포고렐리치의 그늘은 당 타이 손의 앞길에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결국 1980년 쇼팽 콩쿨 사건은 포고렐리치와 아르헤리치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됩니다. 안타깝게도 당 타이 손은 재료로 사용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성이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아르헤리치의 경우에는 이 사건이 그녀의 뚜렷한 주관과 고집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언급되며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게 됩니다. 그런데 탈락에 대한 항의로 사퇴를 했다라는 이 화끈한 에피소드는 아르헤리치가 그해 쇼핑 콩쿨 참가자들 중 포고렐리치만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아르헤리치와 같은 일류피아니스트가 당 타이 손을 실력있는 피아니스트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부정적 의미가 됩니다.
아르헤리치가 당시 참가자 중 오직 포고렐리치만 우승할만한 실력자라고 인정했는데 그가 탈락하자 분노하여 사퇴를 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포고렐리치의 탈락을 결정한 심사위원들에 대한 반발과 항의로 사퇴를 한 것인지 그녀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은 아르헤리치가 포고렐리치만 인정해서 사퇴를 했고 당 타이 손 등 다른 참가자들은 그보다 못했다고 여기게 되었고 이 에피소드가 언급될 때마다 당 타이 손은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포고렐리치의 경우도 천재라는 별명이 항상 따라다니면서 엄청난 행운을 쥐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천재인데 콩쿨에서 탈락하고 우승하지 못했다는 말은 당시 우승자인 당 타이 손을 재능이 없는데도 그저 어찌하다가 우승을 하게된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결국 포고렐리치가 천재라는 말은 포고렐리치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당 타이 손에 대한 악담이 되어 그의 앞길을 가로 막게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앞길을 가로 막은 것은 베트남 출신 아시아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맞섰던 베트남은 서구측과 상당히 고립된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당 타이 손은 해외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외에서 연주회가 기획되었더라도 입국 비자를 얻어야만 했고 베트남정부의 허가를 얻어야만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대사관을 통해 신청을 해서 본국인 베트남까지 요청이 도달하고 외교부의 작업들이 완료되어 회신되는데 2달 이상 걸리는 것이 흔했습니다. 같은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현 세르비아) 출신이었던 포고렐리치는 이런 점에서 본국이 미국과 전쟁을 하지도 않았고, 위치가 유럽에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우승자였는데도 피아노계에 그의 음악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어렵게 성사된 연주회에서도 비평가들에게 그가 아시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젓가락질 하듯이 피아노를 치는 것 같다라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당 타이 손 이전에는 일본의 우치다 미츠코가 쇼팽 콩쿨에 참가하여 2위로 입상했었는데 지금은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그녀도 당시에는 여전히 무명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아시아인 연주자도 없는 상황에서 유력한 콩쿨의 우승자는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방패막이 없이 풍파를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당 타이 손이 피아노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는 것은 포고렐리치의 활발한 활동과 비교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승 후 초기에는 도이치 그라모폰(DG)을 통해 음반도 냈지만 본국인 베트남에서는 음악수요가 거의 없었고 국외에서도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으로 음반이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르헤리치의 천재 에피소드를 등에 업고, 수려한 용모의 미남인데다 백인이었던 포고렐리치의 데뷔 음반은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갔습니다. 포고렐리치는 쇼팽 콩쿨 우승자를 능가하는 천재로 자리를 잡아갔고, 피아노계에서 당 타이 손의 이름은 점점 작아져 가게 되었습니다.
포고렐리치가 화려하게 세계를 무대로 한 피아니스트로 활약을 하는 동안 당 타이 손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돌아가 계속 공부를 하게 됩니다. 많은 실망과 아쉬움을 품고 지내야 했던 세월이지만, 인생의 아픔은 결국 음악하는 사람을 더 깊이 있게 만듭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피아노에 정진을 합니다.
8. 현재의 당 타이 손
당 타이 손의 우승 이후 일본, 한국, 중국 등 동양계 연주자들이 활발하게 콩쿨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0년 쇼핑콩쿨에서는 15년만에 탄생한 콩쿨 우승자가 중국의 리윈디(윤디 리)로 결정되었는데, 당시 최연소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라는 결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동양인에 대한 피아노계의 편견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당 타이 손은 몬트리올 대학의 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고, 캐나다 영주권을 얻어서 몬트리올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초청 독주회와 여러 유수의 관현악단들과 협연을 갖는 한편 쇼팽콩쿨 등 주요 콩쿨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등 활발하게 활동 중입니다. 2005년 15회 쇼팽콩쿨에서는 오프닝 갈라콘서트의 유일한 객원 연주자로 초청되어 다시 쇼팽콩쿨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최근의 당 타이 손은 고국인 베트남이 그의 우승 이후 단 한명의 국제 콩쿨 입상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고국의 재능있는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에서 어릴 때 베트남 하노이에서 친구와 귀뚜라미를 잡으러 강가로 가곤 했던 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잊혀지지 않는다는 당 타이 손은 자신 베트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일에 대한 설움보다는 고국의 후배들이 형편 때문에 제대로 된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커 보였습니다.
후기 :
처음에는 만화 피아노의 숲 때문에 쇼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이 우승을 다투는 내용을 보면서 아시아인 우승자가 있긴 있을까, 중국이나 일본이겠지 하고 찾아봤는데 당황스럽게도 베트남 출신인 사람이 최초의 우승자였습니다. 게다가 뒷 이야기는 흥미진진했고, 여러 음악 동호회에서 당 타이 손의 쇼팽 연주는 상당히 좋다라는 평들이 있었구요.
마침 당 타이 손의 녹턴과 다른 음반을 구할 수 있게 되어 들어보던 중에 유튜브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가 피아노의 숲 카이가 연주한 전주곡 마지막 곡의 연주가 뜨길래 보게 되었습니다. 빠르고 유려한 연주에 헉... 마무리에서 주먹으로 내려칩니다.
그 뒤로 당 타이 손에 완전 마음을 뺏겨서 여러 해외 인터뷰 자료들도 뒤져보고 닥치는 대로 알아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포고렐리치 사건만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앞 뒤 내용도 위에서 쓴 것과 같이 만화처럼 흥미진진 하더군요.
이렇게 알아본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도 공유하고 싶어서 글을 써봤는데.. 예상보다 긴 글이 되어버려서 띄엄띄엄 마음 내키는 대로 끊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댓글로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고 달아주신 분 감사드리구요.
혹시 필요하신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참고로 역대 수상자들을 보면 물론 미츠코 우치다도 있지만, 일본에서는 꾸준히 3위 입상자를 냅니다. 튀지는 못해도 저력이 있는 것 같아요 (국력 알력일수도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