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남부에 일주일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기간중 루트가 하루에 150~200km정도 이동 예정이라, 렌트카 이용 후 빌린 도시에서 반납이 가능해서 하루 40유로 정도에 5일간 H모사에서 i30급 차량 렌트를 신청했습니다. 보험은 Super Cover로, 하루 30유로 정도가 추가, 5일간 총 렌트 비용은 Tax 포함 370유로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겨우 5일 다니는 데 뭐 Super Cover 까지 필요하겠나 라고 생각했는데, 길거리에 차 대 놓으면 유리창 깨놓고 물건 훔쳐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해서, 20만원에 마음 편히 다니자는 생각으로 보험을 넣었습니다.
받은 차량은 SKODA 1.6 디젤 세단을 받았습니다. 주행거리 2,700km짜리 새 차, 근데 미션이 먹었는지 울컥울컥거리고 브레이크도 제멋대로 먹어서 운전에 조금 곤란은 있었습니다. 말라가에서 출발해 시외로 빠져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해안도로를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IC를 빠져나와서 해안따라 가는 도로 삼거리에서 앞차가 좌회전을 하기에, 여유가 있으리라 판단하고 좌회전을 하는데 좌측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접근합니다.
경치에 반쯤 넋 놓고, 시차에 정신 없고, 우리와 다른 도로체계(좌회전 후 가변차로 진입해서 본선으로 끼어드는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다는건 다 핑계고, 좌우주시를 충실히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어, 어, 하며 저도 모르게 속도를 줄였고 오토바이가 그대로 제게 와서 충돌 후 오토바이는 좌측 앞문에 부딪혀 서고 운전자는 넘어졌습니다. 저는 교차로 가운데 거의 정지상태, 오토바이는 10m쯤 전부터 달려와서 빠르지는 않았지만 충격이 있으면서 부딪힌 상태입니다.
우선 기어를 P로 놓고 문을 열어 보는데 잘 열리지 않습니다.
오토바이 무게 때문인지 억지로 밀어 나오니 이번엔 오토바이가 기어가 안 풀려서 앞으로 움직입니다.
한적한 도로였지만, 다행히 주변을 지나던 운전자와 사람 두세명이 사고현장 근처에 있어서, 오토바이를 힘으로 세우고,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다가갔더니 다리 부분이 아픈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은 일어나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핸드폰을 꺼내서 주변 지나가는 사람에게 911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영어는 통하지 않지만, 손짓 발짓으로 대강 다 알아 듣더군요. 저는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라 나인원원 나인원원 하니 반대쪽에서 어떤 아저씨가 핸드폰을 가리키며 자기가 전화를 하고 있다는 표시를 해 줍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여서 도와줬습니다.
몇분만에 경찰차 한대가 오고 오토바이 운전자를 살핍니다.
사고현장 주변 교통통제와 차량 사진촬영 페인트표시 등등 후에 차를 구석으로 빼라는 표시를 하더군요. 이때까지 제 차량은 사고위치에 그대로 정차해 있었고 오토바이는 움직인 탓에 구석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일반 경찰차가 제일 먼저 왔었고, 교통경찰이 와서 제 여권과 국제운전자면허증, 렌트카 차량등록증을 요구해서 가져갔고, 왔다간 경찰은 10명이 넘는 것 같습니다. 경찰차만 5대 정도는 왔었습니다.
이쯤에서 생각이 나서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했고 사고접수를 했습니다.
앰블란스가 와서 오토바이 운전자를 병원으로 후송해 가는데 걸린 시간이 약 15분 정도 걸렸고, 다리가 골절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어느 도시에 있는 어느 병원으로 갈 거다, 괜찮을 거다, 라고 오히려 위로의 말을 해 주더군요.
이 점은 모여든 동네 사람들도 비슷했습니다. 어디서 왔냐, 사고 나서 놀랬겠다, 너무 걱정 마라 보험이 있으니까, 나머지 잘 놀다 가라, 뭐 이런 류의 손짓발짓 대화들... 저는 미안한 마음과 놀란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오히려 스페인 사람들이 저를 달래 주더군요.
경찰은 제게 사고현장을 벗어나지 말것을 당부하면서 Police Report 작성에 들어갔고 현장에 온 다른 경찰이 다각도에서 사고위치 측량(각 교차로 진입구로부터 몇m 위치인지)과 차량상태 확인 기타 증빙서류 촬영을 했습니다.
렌트카 회사에서는 택시를 한대 보냈더군요. 만약 공항에 가는 길이었다면 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인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고 수습을 위한 직원이 와서 차량을 다른 곳으로 일단 옮겨 놓고, 다음 순서를 위해 대기했습니다. 스페인어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관계로, 보내준 콜택시 기사 아주머니가 영어가 좀 통해서 몇가지 통역을 도와줬고, 일단 저는 타 도시로 계속 이동 예정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차량을 받으려면 어차피 렌트카 사무실로 가야 해서, 택시는 보내고 수습직원과 같이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여기부터는 말이 거의 잘 안 통해서, 구글 번역기에 많이 의존을 했습니다.
경찰은 제게 사고경위를 물었고, '좌회전 하는데 경치 보다가 한눈이 팔렸던 것 아니냐, 많이 있는 일이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보험이 있으니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뭔가 열심히 서류 작성을 하더니, 제 여권과 각종 서류들을 돌려주면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no problem, 남은 여행 잘 하기 바란다'며 쿨하게 자리를 떴습니다. 여기서 렌트카 영수증(보험사실이 포함된)을 경찰이 가져가려고 했는데, 제가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다고 하자 본인이 사진을 찍고는 제게 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보니 Police Report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물었더니, 종이에 본인 경찰번호와 사고번호 등등을 몇가지 적어 주었습니다.
사고 오토바이는 동네 지인들이 와서 가지고 돌아갔고, 그 사이 레카차가 와서 사고차량을 어부바 하고, 공항 렌트카 사무실로 갑니다.
아무리 Super cover 보험이라지만 대인사고에 대한 죄책감도 있고,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몰라서 스페인 주재 한국 영사관에도 전화를 해 봤는데,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연락 달라는 원론적인 답 밖에는 안 주더군요...
렌트카 사무실에 도착해서 차량을 내려놓고 짐을 꺼내서 Office에 갔더니 새로운 차 줄테니 영수증을 달랍니다. 그리고 Police Report를 요구하는데, 아까 받은 번호를 주니 자기가 Reference로 갖고 있겠답니다.
조금 뒤, 새 차가 왔는데 BMW 116D이더군요. 기존과 동일한 조건이냐? Super Cover 유효하냐? 확인했더니 그냥 다 동일한 조건이라고 가면 된답니다. 얼얼하게 뭔가 믿어지지가 않아서 Is everything done? 했더니 나머지는 보험이 다 알아서 할 거라고 걱정 말고 가랍니다.
영 마음은 찜찜하고 애석했지만, 일단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와 차량을 반납하면서, 사고 처리는 어떻게 잘 되었는지를 물으니 어차피 풀 보험이니까 걱정할 것 없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사고 후기입니다.
운전 수년 했지만 사고처리를 해본 건 처음이고, 그것도 말도 안 통하는 타지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얼떨떨했습니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나마 저의 경우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이었고, 경찰도 기본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했으며,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라서 생각보다는 잘 처리가 되었습니다만...
혹시나 비슷한 일을 겪어 당황한 마음에 구글을 찾으실 분들께 작은 팁이 될까 해서 사고경과를 남겨 놓습니다.
저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니 아래 사항들은 해외 렌트카 사고시 참고가 되실 것 같습니다.
1. 사고현장을 절대로 이탈해서는 안 됩니다.
-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경우 뺑소니로 오인받아 형사적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 최대한 사고 초기 수습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변 사람, 경찰들도 다 그런 사정을 참작하리라 생각합니다.
- 잠시라도(차량을 옮겨 놓는다거나, 서류를 가지러 간다거나) 자리를 뜰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동승자나 렌트카 직원의 도움을 받고, 본인은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혹은 그런 일은 미뤄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경찰 지시하에서만 현장을 뜰 수 있습니다.
- 차량도 경찰 지시가 있을 때 까지는 옮기지 않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
2. 911 신고와 렌트카 회사 사고접수는 최대한 빨리 합니다.
- 나라마다 911/119/112 등등 번호가 다를 수 있으니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스페인의 경우 번호가 다양해서 그냥 현지인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 전화가 연결되더라도 사고현장이 어디인지 말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지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 렌트카 회사는 사고현장까지 오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가급적 빨리 접수를 해야 내 편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생깁니다.
3. 관련 서류는 가급적 원본을 본인이 가져야 합니다.
- 경찰에 서류를 제출하는 것은 좋은데, 원본은 돌려받고 사본 내지 사진 형태로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나중에 렌트카 회사와 보험문제를 확인하거나, 사고에 대한 수습에 원본이 상당히 중요한 Reference가 되는 것 같습니다.
- Police Report는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정 어렵다면 사건번호라도 받아 두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경찰이 떠나기 직전에 떠올라서 물어서 간신히 이걸 받았는데, 받지 못했다면 확인이 상당히 어려울 뻔 했습니다.
- 원본 확보가 어렵다면 양해를 구하고 모든 서류를 카메라로 찍어 두세요.
4. 죄인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 사고를 낸 것은 본인의 책임이지만, 그 수습 과정에서 과도하게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 다친 사람에게 최대한의 성의를 다해 현장을 수습하고, 경찰에게 성실하게 상황을 진술하고,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 필요한 조치를 다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내 책임이라고 말로 인정해서 애매한 책임소재의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I'm Sorry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 기본적으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억지로 잘 설명하려고 하다 보면 더 오해를 키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는다, 영어 통하는 사람을 구해 달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은 것 같습니다.
- 정 여의치 않으면 영사관에서 전화를 통한 간단한 통역 정도는 제공해줄 것도 같았습니다. (딱히 협조적인 느낌은 아니기는 했습니다만....)
5. 교통문화가 다른 해외에서의 운전에는 두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 과거에 다른 나라에서도 렌트카 운전을 해본 적이 있어서 조금은 방심했던 탓도 있는데, 교차로에서는 무조건 정지, 로터리 진입시에는 무조건 서행, 양보, 고속도로에서는 가급적 2차로 주행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은 것 같다는 반성을 다시한번 합니다.
- 한국에서라면 피할 수 있는 상황도 해외에서는 더 어렵고 복잡한 법인 것 같습니다.
- 렌트카 회사는 Global한 큰 회사가 여러모로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더 수월한 처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저의 아픈 추억이 다른 분들께는 하나의 사전지식으로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포르투갈에서 렌트한 골프 범퍼 긁어먹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정리도 깔끔하시고....추천~~~
특히 한국인들이 습관적으로 할 수 있는 i'm sorry는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는 내용이 되니 주의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CLiOS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깔끔한가 봅니다
다행이에요
스크랩해서 보관해야겠어요.
여담이지만, 말라가 주변 해안풍경 너무 멋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