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9년 만에 다시 만났다. 블로그를 하면서 좋은 점은 내가 읽었던 책의 리뷰를 다시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9년 젊은 내가 이 책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했는데 당시 아마도 딸과 단둘이 롯데월드에 갔다 놀이기구의 긴 줄을 기다리며 읽었던 모양이다. 롯데월드에는 피천득 선생님의 기념관이 있는데 그걸 보면서 우연의 일치에 놀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롯데월드에 다시 가게 된다면 피천득 님의 기념관에 가보고 싶다. 아마도 먼 훗날 손주를 데리고 가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9년 전에도 그랬겠지만 다시 읽은 수필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피천득 님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삼촌 댁에서 자랐지만 선하고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때로 장난꾸러기 같은 면도 있지만 대부분은 감성이 참 풍부했던 분인 것 같다. 음악회를 찾아다니고 쇼팽 듣는 것을 좋아하는 그분이 사랑하던 딸 서영이의 아들 스테판이 유명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데에 그의 영향이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그의 어머니가 뛰어난 거문고 연주자였다고 한다.
다작을 하지 않았던 피천득 선생님은 원래 시인이셨는데 그의 수필이 오히려 유명해졌다. 영문학을 공부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그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시집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수필들은 하나하나가 참으로 매력적인 글들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비원을 즐겨 찾는다는 저자는 후세인 자신을 위해 비원을 설계했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좋아했다. 내가 비원에 간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조만간에 한 번 가서 거닐며 피천득 선생님의 발자취를 느껴보고 싶다.
이 책이 개정되어 나오면서 앞뒤에 작가나 수필에 대해 설명하는 글들이 붙어 있다. 원작은 어떠했을지 이 책을 읽다가 궁금하기도 하고 밑줄 긋고 싶은 욕구가 샘솟아 바로 주문했다. 피천득 선생님이 여성을 굉장히 존중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는 글이 말해 준다. 과연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나 어머니, 유순이, 그리고 딸 서영이에 대해 예찬에 가까운 글이 등장한다. 읽다가 궁금한 것이 이분의 부인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신기하게 글에서는 서영이의 어머니가 그리 키가 크지 않았다는 것 외에 다른 언급이 없어 더 궁금해졌는지도 모른다. 찾아보니 두 아들과 딸에 대한 소개는 나오는데 부인에 대한 것은 이름 외에는 없어 더 궁금해졌다.
책 중에 마음에 쏙 드는 부분이 정말 많았다. ‘맛과 멋’이라는 아주 짧은 글은 시처럼 줄 바꿈이 많은데 글의 내용에 너무 공감이 갔다. 맛이 일시적이고 감각적이고 현실적인데 비해 멋은 정서적이고 여운이 깊고 교양을 필요로 한다. 저자가 멋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한 것처럼 나도 살고 싶다. 오월을 보내며 ‘오월’이라는 글을 읽은 것도 의미가 있었다. 여름이면 비취가락지로 바꿔 끼는 어머니의 햐안 손가락을 연상하며 앵두와 모란과 어린 딸기를 떠올린다. 전나무의 연한 살결같이 보드라운 바늘잎과 스물한 살의 그가 밤차를 타고 해변가에 가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글귀를 모래 위에 쓰고 돌아온 일을 떠올리며 쓴 글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나이는 먹었지만 저자는 여전히 오월을 지내고 오월의 연녹색은 나날이 번져간다. 그가 보냈던 오월을 지금 나도 보내고 있다.
‘송년’이라는 글에서는 새색시가 김장 삼십 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되는 인생을 말하며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이야기한다. 저자는 반세기를 호탕하게 낭비하지도, 화끈하게 항거하지도 못하고 가끔 한숨을 쉬며 뒷골목을 걸어오며 늙었다고 자학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의 글을 읽으며 당시의 상황을 짐작한다. 시대에 큰 목소리를 내는 이도 있었을 것이고, 인생을 불태우는 역작을 낳은 이도 있었을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세월을 보내며 나이만 먹어 간다. 그래서 이 글이 더 공감 가는지 모른다. 위대한 인물보다 친숙한 ‘찰스 램’의 글을 좋아하는 저자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저자가 좋아했다는 찰스 램의 수필을 읽어보아야겠다.
이 책을 읽고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9년 후 글을 쓰긴 썼다. 책으로 나올지는 모르지만. 편집자님께 넘긴 지가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메시지를 해볼까 하다가도 오래 걸리시겠지, 하며 내려놓는다. 9년 전에 읽은 책이 어쨌든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지금 읽는 책도 9년 후의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책을 선별하여 오늘도 내일도 읽고 싶어 진다. 9년 후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정말 궁금하다.
* 목소리 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eKrn1KmCvf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