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한 내용, 혹은 결말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goodreads.com을 사랑합니다. 특히 관심 있는 번역서가 나오면 책을 사거나 읽기 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고 어떤 평가를 했는지 반드시 사전에 확인합니다. 읽고 나서는 사람들이 어떤 소감을 남겼는지 읽어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매년 실시하는 분야별 장르별 올해의 책 투표 히스토리는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해서 서핑하곤 합니다. 이 책은 2019년 '올해의 스릴러' 투표에서 1등으로 선정된 작품입니다. 또한 이 책은 저자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데뷔작이고, 같은 해 모든 분야를 통틀어 선정하는 '올해의 데뷔작' 2등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이 책은 왠지 땡기지 않았습니다. 표지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물사진 표지를 싫어하는 데다가, 표지만 보고 이 책을 3류 로맨스 추리소설일 거라고 단정했습니다. 나 말고도 표지 때문에 읽지 않았다는 사람 몇몇을 인터넷에서 보기도 했습니다. 쌈마이적 디자인은 차치하더라도, 10대 후반 정도로 추정되는 표지의 여인네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이 책의 주인공은 30대 후반 여류 화가인데 말입니다.
그 30대 후반 여류 화가 '알리샤 배런슨'이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한 죄로 체포됩니다. 체포된 뒤 실어증에 걸린 듯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도 해서 그녀는 결국 감옥 대신 정신병원에 수용됩니다. 이 책, 일인칭 소설의 주인공 '나' - '테오 파버'는 남자 심리상담가입니다. '나'는 이 사건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정신병원에 취직해서 그녀의 심리 치료와 상담을 시작합니다. 몇 년 전부터 영미 스릴러에서 자주 보이는 병렬 전개 형식입니다. 여류 화가 '알리샤 배런슨'의 일기와, 주인공 '나'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됩니다.
결말은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런 스타일의 결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말 바로 전 페이지까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조그만 반전들이 소소하게 뿌려지고, 등장인물들 간의, 매우 흥미 있는 갈등들이 세련된 표현으로 이어지면서 페이지는 술술 넘어갑니다. 스릴러 범죄물이라고 하지만, 살인사건은 도입부에서만 발생할 뿐, 여러 등장인물 간의 사랑과 갈등에 대한 이야기 비중이 훨씬 더 크게 보입니다. 웰메이드 치정물입니다.
작가 '알렉스 마이클리디스'는 케임브리지에서 문학을 전공한 재원이라고 합니다. 사이프러스에서 태어난 그리스 혈통의 영국인입니다. 이 소설의 모티프도 그리스 신화입니다.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한 '알케스티스'의 이야기입니다. 신화의 내용을 모른다 해도 작중에 자세히 나오므로 미리 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작가는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처럼 그리스 문화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듯, 소설 속에서 대놓고 표현합니다. 잘생긴 사람은 그리스 조각상, 예쁜 여자는 그리스 여신같다고 하고, 심지어 더운 날씨는 마치 아테네의 여름같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인공의 이름 '테오'도 '테오도르'라는 그리스식 이름(영어 발음으로는 시어도어)의 약칭이고, 런던에 있는 병원에서 작중 내내 주인공을 믿고 서포트해주는 상관도 그리스 사람, 선한 영향력의 동료도 이름상으로 보면 발칸 쪽이나 터키쉬 계열로 추정됩니다.
작가가 특정 심리학 분야에 좀 과도하게 경도된 것 같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유아~청소년 시기에 부모로부터의 애정이 결핍되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비정상적 심리나 행동양식을 가진다는 글이 많이 나오고 그 뉘앙스가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깔려있습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심리적 불안이나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고, 모두 부모가 무관심했다던가, 혹은 학대를 했다던가, 결손가정이라던가 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고와 가치관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약간 거북했습니다. 번역도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 책의 번역가가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동일 인물의 말투가 초반과 후반이 다른 어색함도 있었고, 드문드문 비문도 보였고, "~일 터였다, ~할 터였다"라는 특정 표현을 계속 남발하는 것도 좀 거슬렸습니다.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가의 후속작 '메이든스'를 벌써 구입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기대 중입니다. 이번 달 내로 읽을 생각입니다. 이 작가의 다른 후속작이 또 빨리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