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겨울에 한 중년 남자가 산골짜기 펜션에서 의문의 죽음을, 그로부터 1년 후 겨울, 또다시 여기서 젊은 남자가 죽습니다. 그로부터 또 1년 후 이 펜션에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1년 전 죽은 그 젊은 남자의 여동생이 주인공입니다. 석연찮게 자살로 처리된 오빠의 죽음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정체를 숨긴 채 숙박객으로 가장해서 친구 한 명과 함께 잠입합니다. 기묘하게도, 2년 전 사건의 숙박객들과, 1년 전 사건의 숙박객들, 그리고 오늘의 숙박객들이 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펜션의 이름이 '머더 구스'인지라,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으로 시작되는 영국의 머더 구스 전래동요의 가사가 목판에 새겨져 각각의 객실에 걸려있습니다 (저의 딸내미 유치원 다닐 때 이 영어동요 부르는 것을 가끔 봤었는데, 이 노래의 가사가 이렇게 긴 줄 몰랐네요) 주인공은, 오빠가 죽기 직전 각 객실마다 다른 소절이 적혀있는 이 동요의 가사가 모종의 암호였으며 그 암호를 거의 다 풀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자신도 친구와 함께 암호를 풀어나가기 시작하는데 쩜쩜쩜.
<백마산장 살인사건>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등단 후 3번째 작품이며,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에 쓰인 소설입니다. 제가 중고서점에서 구입하고 읽은 이 책은 구판이며, 얼마 전 <하쿠바 산장 살인사건>이라는 개정판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의 여러 소설에서 설경이 배경으로 나오는 것을 보니 작가가 이 계절을 무척 좋아하나 봅니다. 읽다 보니 요즘의 장르소설을 많이 읽는 분들에게는 식상할 수도 있는, 백 년 전 크리스티 여사님의 추리소설들이 떠올랐습니다. 폐쇄 공간, 그 안에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여러 명의 인물, 암호, 밀실, 트릭, 등장인물들 간의 (나중에 밝혀지는) 숨겨진 관계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는 형사(탐정)... 크리스티의 소설에 많이 나왔던 장치들이자, 현재의 히가시노 게이고는 잘 쓰지 않는 정통 추리소설의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현대에서는 소년탐정 코난에서 가장 자주 보입니다 ㅎ)
읽는 내내 한겨울 서걱서걱 차가운 공기가 있었고, 오빠가 죽은 살인의 현장에 잠입한 주인공들의 긴장감도 사그러들지 않던 깔끔한 작품이었습니다. 결말을 한두 번 더 슬쩍 비트는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작법이 마지막 페이지까지도 흥미진진함을 유지시킵니다. 초보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뭇 풋풋함이 있었고, 80년대 일본의 버블 분위기도 살짝 느껴볼 수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처음으로 단편 7개를 담아 1990년 출간한 단편소설집입니다. 그 1년 전인 1989년에 나온 <살인 현장은 구름 위>라는 단편집이 있었으나 그 책은 주인공이 같은 연작 소설집이었고, 각각 다른 인물들과 다른 사건을 소재로 한 단편집은 이 책이 처음입니다.
잘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특징이, 군더더기 없는 짧고 간결한 문장, 돌아가거나 잠시 다른데 들렀다 가지 않는 직진적 구성, 그리고 최소한의 묘사와 대화입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것이, 기존 다른 작가들의 단편 추리소설들처럼 각 단편 하나하나가 짤막한 에피소드가 아닌, 나름 완성된 기승전결을 가진 중편, 혹은 장편 분량의 이야기였습니다. 다소 만연체로 쓰거나 주변 인물의 곁가지 스토리를 몇 개 집어넣었더라면 충분히 장편 하나를 뽑아낼 만한 구성들이었습니다. 6번째 단편 <굿바이 코치>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추리소설의 관점에서 보면 사건과 전개는 다소 무리한 설정이었습니다만, 여주인공의 대사, 작가의 문체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히가시노의 문학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을 읽고 감탄해서 히가시노의 소설을 출간 순으로 전부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 일종의 '챌린지'라고나 할까 - 거의 100권에 달하는 그의 소설 중 이제 대략 20권을 읽었습니다. 30~40년 전 통속적 추리소설들이다보니 시절 묵은 유치함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그의 초기작들을 읽으면서, 전부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나? 괜히 시작했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만, 이렇게 읽다 보니 어느 한 대중소설 작가가 성장했던 길을 몰래 따라가보는 듯한 재미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