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이 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언젠가 읽으려고 사 두고 잊고 있었나 보다. 추석 동안 읽을 책들을 제법 빌려 왔는데 조금씩 읽어보니 마음이 동하지가 않아 집에 있는 책들을 쭉 보다가 이 책을 드디어 읽어보아야겠다, 싶어 꺼내 들었다. 우리가 요즘 말하는 에세이보다는 무거운 중수필이다. 중수필은 사회현상이나 정치와 같이 무거운 주제의 논문에 가까운 글이므로 개인적인 동시에 학술적인 면을 띠기도 한다.
에세이의 형식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미셸 드 몽테뉴는 상인이었던 부모에게서 상속받은 재산으로 일찍 은퇴한 후 자신의 탑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수상록을 집필하였다. 이후 여러 번에 걸쳐 수정하였고, 내용을 더하여 완역본은 1000페이지가 넘어간다고 한다. 내가 읽은 책에는 명성, 자만심, 비겁함, 독서, 서재 생활, 대화, 결혼과 사랑, 질병에 대해 쓴 내용이 담겨 있고 검색해본 다른 책에는 5개의 장으로 62가지의 주제가 있었다. 몽테뉴는 처음에는 짧은 글을 주로 썼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긴 글들을 썼다고 한다. 몽테뉴 자신이 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주제가 글 속 여기저기에 숨어있긴 하지만 내용이 일목요연하다기보다 징검다리 건너듯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 엮여 있어 자칫 잘못하면 읽다가 이게 무엇에 대한 내용이었더라, 하며 앞을 들추게 된다. 스스로 자신의 글을 폄하하는 내용을 적다니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이거나 자신의 부족함까지 내비치는 자신만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려 450여 년 전 쓴 수상록에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살림을 잘해야 한다는 그의 글을 보면 당시 여성의 사회적 인식이 지금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종교적인 영향과 문화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시대를 지나오면서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느끼는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습성이나 취향도 있지만 철학자들의 사상을 인용하며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해박함과 사회적인 문제를 고찰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통찰력을 담았기에 책이 더 깊이 있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 권의 책으로 수상록을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수상록을 읽었다 하려면 천 페이지에 달하는 완역본을 읽은 후에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내용 중 현시대에 맞지 않는 것들도 분명히 있지만 그 부분들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질병이나 인간의 욕망, 독서, 그리고 글 쓰는 것에 대한 내용과 같이 어느 시대이든 변치 않는 주제들은 450년을 관통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책을 읽고 프랜시스 베이컨과 데카르트, 흄과 같은 철학자를 비롯하여 에릭 호퍼나 아시모프와 같은 현대 작가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고, 여행을 즐기며, 몸이 괴롭지만 책을 읽고, 돈에 대해 조금은 둔감했던 그는 앞으로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다른 버전의 수상록도 읽어보고 싶다.
* 목소리 리뷰
https://www.podty.me/episode/16423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