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나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1. <전쟁과 평화>를 완독한 후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인류유산을 대표하는 대문호의 히말라야 산맥과 같은 글들을 3주나 읽다가 갑자기 깡통느낌 물씬 풍기는 단문 위주의 가벼운 장르물을 보자니 '아아~ 이런걸 계속 읽다간 지난주에는 고상했던 나의 독서의 품격이 떨어지고 말거'라는 걱정이 들었는데, 웬걸, 이틀만에 '역시 나에게는 이런 B급 컬쳐가 딱인거'라며 며칠전보다 독서에 더 집중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2. <가면산장 살인사건>과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두 작품은 소설 외적으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히가시노의 초기작들이자,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지 않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출간되었다는 점입니다. <가면산장 살인사건 (1990)>은 24년이 지나서, <그녀는 계획이 다 있다 (1988)>는 무려 33년이 지나서 출간되었습니다. 히가시노의 소설이라면 재판,3판에 웬만한 책들은 리커버까지 찍어낼 정도로 잘 팔리는 나라에서 그리 묵혀져 있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2년, 일본에서는 히가시노의 데뷔 25주년을 맞아 그때까지 내놨던 그의 70여개 작품들에 대해 대대적인 팬투표가 있었는데, - 이 순위는 지금도 제가 히가시노의 소설을 사서 읽느냐, 빌려서 읽느냐의 중요한 기준이기도 합니다 - <가면산장살인사건>은 41위.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는 69위를 차지합니다.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는 2000년 이전에는 지금처럼 흥행이 보장된 작가가 아니었고 2000년을 기점으로 <백야행>, <용의자X의 헌신> 같은 메가히트작이 나오면서 그 이전의 별 볼일 없던 작품까지 재조명을 받게 된 케이스지요.
3. <가면산장 살인사건>은 그의 다른 초기작들처럼 그다지 특색없는 '클로즈드 써클 추리물' - 저마다 그럴듯한 살인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폐쇄된 장소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 입니다. 초기작들을 읽어가며 매번 느끼지만, 문학적 재능은 전혀 느껴지지 않으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은 정말 탁월합니다. 스케일도 작고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배경도 한정적이라 짤막한 TV추리단막극 한편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히가시노의 전매특허는 '스피드를 동반하는 가독성'인지라 확실히 페이지는 휙휙 넘어갑니다.
전형적인 클로즈드써클 추리물의 결과가 아니라 다소 의외의 형태로 결말이 지어집니다. 이 결말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고 관점에 따라 신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허나 저는 이런 패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작가가 초반부터 중요한 걸 의도적으로 숨기며 심지어 미필적으로 거짓표현까지 사용합니다. 혹자들은 이걸 '서술트릭'이라는 형태로 부르기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일종의, 독자에 대한 기만으로 여기기 때문에 좋게 보지 않습니다. 제 평점은, 지금까지 제가 읽은 히가시노의 책 13권 중에 가장 낮았던 <11문자 살인사건>와 <졸업:설월화 살인게임>의 바로 윗 순위에 두기로 합니다.
4.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는 히가시노 팬투표 순위도 최악에 가까울 뿐더러 일본에서 책팔이도 시원치않아서 제목을 변경해서 재판을 찍었던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제목인 <교코의 꿈 - 도우미 살인사건>이 <윙크에 건배>로 변경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선 더 생뚱맞게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마 영화 <기생충>에서 나와 밈으로 회자됐던 대사에서 착안한 듯 한데, 저는 개인적으로 유행어를 책이나 영화 제목에 갖다쓰는 걸 매우 한심하게 봅니다. 출판사도 기존 히가시노 소설의 판권사들이 아닌 '하빌리스'라고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는데 - 나중에 보니 예전에 나왔던 <방황하는 칼날>도 이 출판사가 개정판을 냈더군요. 기존 출판사 바움은 망한 듯 - 표지 또한 언뜻보면 쌈마이 감성에 라노벨 느낌도 나는....
그런데 의외로 저는 이 책을 좋은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1/3쯤 지나서 중단하고 동네 알라딘에 가서 한 권 사가지고 와서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5060 미국경제 부흥기의 뉴욕감성, 7080 일본 버블시대의 도쿄감성이 들어가있는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 책이 딱 그런 코드였습니다. 이 소설의 첫 장면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첫 장면에 대한 오마쥬(?)인 듯하고, 버블의 일본에서 날이면 날마다 펼쳐졌던 흥청망청 파티의 시대에 주요 비즈니스의 하나였던 뱅큇(연회) 컴퍼니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 회사에서 근무하는 컴패니언 - 도우미, 서버라 불리우는 - 을 직업으로 하는 20대 처자가 주인공인 추리소설입니다. 또한 버블향 만연히 풍기는 보석회사, 부동산회사 등이 주요한 배경이고 그 임원들이 주요한 등장인물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첫번째 제목이었던 <교코의 꿈>이 가장 잘맞는 제목인 듯 합니다. 연회 도우미로 일하며 재벌가 중년남에게 시집가는 것이 꿈인 교코라는 여성 주변의 살인사건이 소재이며,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이 주인공이 형사와 함께 사건 해결에 접근해가는 무용담에 가깝습니다. <방과 후> <동급생> <마구> <학생가의 살인>에서 보듯이 초창기에 주로 고등학생, 대학생 학원물을 썼던 히가시노가 과감하게 화류계(?)를 배경으로 하는 신선한 시도를 했으며, 또한 코미디와 개그가 강하게 튀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이 확실하게 망했기 때문에 히가시노는 이후에 이런 코미디와 개그를 매우 자제한 듯 한데 저는 재미있었기 때문에 아쉬운 느낌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망했던 이유는 대충 알겠습니다. 후반부, 우연이 너무 많이 발생하고 결말에서 주는 통쾌감, 응징감이 많이 떨어집니다. 어떤 책을 읽고나서 그 책을 평가할때, 내용보다 소설 전체적으로 흐르는 정서가 더 중요하게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이 제게는 그랬습니다. 다른 부분은 쳐줄만한 게 없었습니다. 분위기는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