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나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무슨 연유인지 그의 소설에 오랫동안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1년 전 쯤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처음 접했는데 예상 외로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의 초기작들만 읽어본 상태이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스토리는 직선이고 캐릭터들은 스테레오인데 그 재료들을 탁월한 빌드업 능력으로 잘 버무려서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작가였습니다. 이케이도 준과 더불어 일본의 "아주 쉽게 잘 읽히는 흥미만점의 소설"계열의 메가셀링 투톱을 이루고 있다고들 하는데, 저도 머리가 복잡한 상태이거나 어려운 책들을 읽고 난 뒤면 히가시노 게이고와 이케이도 준의 책을 집어드는 편입니다. 두 사람의 소설들을 '집필 순으로 전권을 읽어보자'고 해서 읽어나가는 중이고, 대략 100편 가까운 그의 작품 중에서 15번째, <숙명>을 다 읽었습니다. 100편 가까운 그의 소설을 다 사서 볼 수는 없기에 자타공인 몇몇 걸작은 구입하고 나머지는 집근처 도서관이나 이북으로 대여해서 보는 중입니다.
인터넷에서 <숙명>의 서평들을 찾아보면 (무료로 책을 받고 쓴 영혼없는 리뷰들 제외하고) 이 작품은 평가가 좋지 않은데, 평가가 박한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1. 살인을 당한 피해자가 비중도, 별 의미도 없는 인물입니다. 재미있는 추리소설이란 무릇, 피해자가 죽임을 당해 안타깝거나, 혹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어서 놀랍다거나 해야 스토리 전개에 탄력이 붙고 긴박함이 동반되기 마련이겠지요.
2. 역시 평가가 박했던 전작 <브루투스의 심장>에 이어 반복된 점이기도 한데, 사랑, 배신, 분노, 연민 등의 인간 본능과 뜬금없는 첨단과학과의 조합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소설에서 첨단과학 소재의 활용은 이과 출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한데, 전문분야의 지식이란 작가에게는 양날의 검인 것이겠지요. 은행원 출신 이케이도 준은 정말 신이 내린 활용 능력을 발휘 중이고요.
3. 마지막 결말의 1~2페이지를 읽는게 약간 고역이었습니다. 서로 맨날 물고 뜯어도 동아시아 한,중,일 3국에게는 다른 문화권에서는 볼수 없는 특이한 공통의 정서가 있습니다. 또한 다같이 "그건 좀 그렇다..."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반복 중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 집필 순서대로 읽어나가니 작가의 역량이 점점 발전해 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등장인물도 점점 많아지며 걸쳐진 세월도 점점 길어집니다.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스케일이 점점 넓어지고 문학적 스펙트럼도 넓어진다는 방증이겠죠.
2. 책을 1/3쯤 읽었을때 저는 이 작품이 더 이상 추리소설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그냥 '소설'로 읽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추리소설임에도 범인이 누군지 그닥 궁금하지도 않았고, 등장인물 간의 사랑과 갈등이 어떤 식으로 결말을 맺을지가 매우 궁금해져서 읽어나갔습니다.
3. 결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결말 직전까지 매우 흥미롭고 속도감 있게 읽은 책입니다. 이 소설은 '단서를 모아나가며 범인을 쫓아 정의를 구현하는 탐정이나 형사의 추리소설'은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문학'의 범주로 놓고 보기는 민망하지만, 사랑과 이별,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우월감과 열등감, 결혼과 불륜, 살인과 동정, 가족의 결합과 분열 등등 꽤 여러 종류의 인간의 감정과 본능을 아주 심플한 문장으로 재미있게 이야기 해나가는 소설입니다.
집필 순으로 읽어나가는 중인데, 다음 책은 그동안 한국에서 미출간이어서 스킵했던 7번째 작품 <교코의 꿈>입니다. 무려 33년이 지나고 한국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계획이 다 있다>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마치 슬쩍 최근작인 것 마냥 나온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