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아(그리스)와 일리온(트로이) 간의 오랜 전쟁이 있고, 전쟁에서 승리한 아카이아 연합군 장수들은 순탄치 않은 귀향길에 오르게 되는데, 그 중 한 사람, 오디세우스는 특히나 더 오랜 세월, 힘든 여정을 거쳐 고국으로 귀환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련의 이 인간사의 배경에 신들을 그려넣었고, 시인들은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구슬프게, 때로는 격정과 분노를 실어 이 기나긴 노래들을 수천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불러왔습니다.
천병희선생님께서 완역하신 책이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익히 알고 있었고 알퍅하고 부스러기같은 지식들도 있었지만, 완독의 경험은 없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아주 조금 읽다가 포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 고전문학과 인문학책들을 읽으면서, 서양의 문화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흔적은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진하게 흩어져있다는 걸 체감하였고, 이 시점에서 도저히 안읽고 지나갈 수는 없겠다고 생각해서 집었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간내에 명료하게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므로, 완역본 대신 편역본을 선택했습니다. 아우구스테 레히너는 나름 유명하고 권위있는 고전 편역가입니다. 원전을 보면 중복되는 싯구나 서술이 많은데, 이런 것들을 좀 걷어내고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으로 바꿨다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리아스가 약 430페이지, 오디세이아가 600페이지 정도, 두 권 합쳐서 1,000페이지가 넘는 만만치 않은 분량입니다.
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서양 문화와 서양 인문학의 근원이라 불리우는지 알 것 같습니다. 신들의 이야기지만 인본주의가 보입니다. 신들에게서 초능력을 빼고 보면 인간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수천년이 지나도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은 오늘의 우리와 같습니다. 일리아드의 전쟁씬에 올림푸스의 신들이나 장수들 대신 마블이나 DC의 히어로들을 집어넣어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군인들을 대신 집어넣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전문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 서양예술, 미술에 관심이 있으신 분, 유럽여행에 관심이 있으신 분, 인문학 책을 읽어보고 싶으신 분, 서양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 대부분 읽어보셨겠지만, 혹시 저처럼 게을러서 미뤄두고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아직 안읽으신 분들은, 여러 출판사의 책들이 나와있으니 일독을 강력히 권해드립니다. 새로운 책눈이 열립니다. 심지어 제가 지금 짬짬이 읽고있는 <공정하다는 착각>하고도 연관되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제가 읽은 책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책이고 아우구스테 레히너 컬렉션으로 5권짜리 세트도서입니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아이네이스>, <파르치팔의 모험>, <니벨룽의 반지>로 구성되어있고, 물론 낱권으로도 살수 있습니다. 저는 그 중 4권을 구입했는데, 개인적으로 <니벨룽의 반지>는 제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얇은 페이퍼백으로, 제가 선호하는 '책날개가 없는' 디자인입니다. 책은 가벼운 편입니다. 표지는 대리석무늬를 연상케하는 디자인이고 책이름의 첫 이니셜을 각각 크게 박아 세트도서임을 알게 합니다. 저는 책의 디자인도 매우 중시하는 편인데, 마음에 드는 책들입니다. 제 돈 주고 산 책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