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나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가끔 아무계획없이 시내 대형서점에 나가 세계문학전집코너 앞에서 쓰윽 둘러보면서 "제목만 보고" 두세권 집어들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책도 그렇게 사온 책 중에 한권입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작가나 줄거리에 대해 전혀 알고 있는게 없었으며, 단지 영화화가 됐었고, 뮤지컬도 있었고, 가끔 연극무대에도 올라오는 작품이다..라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책 뒷면을 슬쩍보니 동성애 주제의 소설이라고 설명되어있습니다. '아, 이거 잘못샀나....흠.. 환불할까....'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선호하는 코드가 아닐 뿐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한 건 이유가 있을 것이야'하는 생각과 '읽어보고 그닥이면 팔아버리지 뭐...'하는 생각으로 들고 온 기억이 나네요.
선뜻 손에 잡기가 쉽지 않아서 몇 달 지나고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소설 속에 '흠뻑' 빠져버렸네요. 특히 몰리나의 영화이야기는 '흥미진진' 그 자체였습니다. '몰리나의 영화 리뷰' 뭐 이런거 혹시 따로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상상까지 할 정도로 말이죠. 그러고보면 많은 분들이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겁니다. 몰리나처럼 영화줄거리를 이야기해 줬던 경험, 발렌틴처럼 넋놓고 영화 얘기를 들었던 경험.
책을 다 읽고 난 후 작가 마누엘 푸이그에 대해 좀 찾아봤습니다. 몰리나와 발렌틴, 두 메인 캐릭터는 아마 작가의 육체와 영혼을 각각 독립적인 다른 사람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본인의 욕체와 영혼에서 나온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리 가슴이 절절할 정도로 너무나 공감이 가는 대사와 성격이 표현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몰리나에게는, 제가 '절대 선호하지 않는'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움'을 느꼈고 발렌틴에게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타국에 망명하고 남겨진 고향과 연인,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영혼을 보았습니다. 다 읽고나서 이틀정도 지났는데 아직 여운이 가시질 않네요. 여운을 떨처버리기 위해서 빨리 다른 책을 집어들어야겠습니다.
※ 이 소설은 희곡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원래 희곡 형식을 좀 부담스러워 했는데, 이 소설을 읽고나서 희곡 형식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어진 것 같은 신기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책장 구석에 오랫동안 방치된 희곡 몇 편을 꺼내서 조만간 읽어 볼 생각입니다.
※ 제가 느끼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아쉬운 점은 인쇄상태입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세계문학전집 도서의 글자가 이렇게 흐리멍텅하다는 것이 좀 짜증스럽습니다. 이 책도 읽는 내내 신경이 거슬렸네요. 세계문학전집 많이 팔아서 벌었을텐데 제발 잉크값 종이값 좀 더 써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