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읽을 때 그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멋진 ‘필립 말로’의 전형적인 모습에 첫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가 50이 넘어 쓴 첫 장편이라는 하루키의 말에 잠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완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40대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고 계속 써 왔던 보수가 저렴한 잡지의 단편소설들 덕분이었습니다. 하루키가 여러 단편을 모아 하나의 장편으로 만들었다는 추측을 할 만큼 사건의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각광 받는 이유는 모든 것을 능가할 작가의 문장력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매력적인 인물과 그가 시시각각 느끼는 것들을 눈으로 보듯 그릴 수 있는 비유를 첨가한 장면 묘사가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챈들러의 책은 <기나긴 이별>과 <호수의 여인> 두 권을 읽었는데 이 책은 시작 부분부터 재미있는 문장들이 많아 밑줄을 긋고 싶은 마음에 바로 구입하고 싶어졌습니다. 헌책으로 사려고 했더니 이전에 구입한 도서라고 떠서 책장을 보니 이 책이 꽂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전에 챈들러의 작품들을 읽으려고 사 두었다가 아직 읽지 못한 책이었습니다. 두 책을 비교해보고 싶어 앞부분을 한 문장, 한 문장 자세히 보니 이전 번역자님께 죄송한 마음이지만 이 책의 번역이 훨씬 마음에 들어 새 책으로 주문했습니다. (문학동네는 아직 헌책이 없었습니다.) 같은 책도 번역가에 따라 이렇게 다른 느낌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외국 도서는 번역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이야기는 필립 말로가 의뢰받은 스턴우드 장군의 저택을 방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정당한 돈 벌기를 좋아하는 말로는 탐정 일을 하면서도 부유하게 살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옷을 신경 써서 차려입고 갔지요. 하루 25달러에 경비를 따로 받는 그의 보수에 비하면 장군이 제시한 사백만 달러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만난 장군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로 죽음에 가까운 노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장군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캐러 다니다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장군의 두 딸이 연루된 사건에 점점 깊이 다가갑니다. 말로를 따라다니며 그의 눈으로 보는 사건의 정황과 쓸쓸한 듯 매력적인 일상에 내 손은 이미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넓은 팬층을 보유하고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레이먼드 챈들러의 다른 책들도 더 찾아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사실 이 책의 원서도 사 두었습니다. 늘 욕심으로 원서를 사 두기만 하고 읽지 않을 때가 많은데 왠지 원어에서 느낄 수 있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고 싶습니다.
--- 본문 내용 ---
-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늘하늘하고 축축한 열기가 수의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노인은 마치 목이 머리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14쪽)
- 이 방은 내가 살아가는 곳이다. 내가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여기뿐이다. 내 소유물은 모두 이곳에 있다. 나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물건들, 내 과거와 얽힌 물건들, 내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물건들이다.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책 몇 권, 사진 몇 장, 라디오, 체스 말, 오래된 편지, 그런 것들이 전부다. 보잘것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모두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다. 그런 방에 그녀가 들어왔다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욕지거리는 그 사실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191쪽)
- 나는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자동차 매연과 도시의 길거리를 여전히 기억하는 듯 퀴퀴한 단내를 머금은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192쪽)
- 내가 문을 잡아주자 그는 조심스럽게, 마치 내가 그 앙증맞은 엉덩이를 걷어차기라도 할까봐 걱정스럽다는 듯 조심스럽게 내 앞을 지나갔다. 우리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정말 조그마한 남자였다. 키는 160센티미터도 안 될 듯하고 체중은 정육점 주인의 엄지손가락 무게에도 못 미칠 듯싶었다. 근엄하고 영롱한 두 눈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쓰는 듯했지만 그래봤자 껍데기 한 짝만 남은 생굴처럼 연약해 보일 뿐이었다. ... 내가 마음만 먹으면 홈에서 2루까지 단숨에 던져버릴 만큼 작고 우스꽝스러운 친구인데 제법 강단이 있다. 큰 놈들이 설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작은 놈. 왠지 이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195, 204쪽)
* 팟티 목소리 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