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엔가 헌책방에서 이 책을 구입했다. 그때 산 네 권의 책 중 이 책을 마지막으로 접했다. 양장의 빨간 표지가 예뻤으나 두께에서 밀렸다. 들고다니기에 조금은 큰 책이긴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고는 계속 가방에 넣어 다녔다.
섬에 있는 서점 주인, 그의 자존심 만큼이나 취향도 까다로운 그는 아내를 잃고 술을 가까이 하며 하루하루 무료하게 지내고 있던 차에 거래하던 출판사에서 신입사원이 방문한다. 전임자의 죽음으로 새로운 기회를 잡은 신입 어밀리아는 독특하고 까다로운 취향을 지닌 에이제이와의 유쾌하지 않은 첫 만남에도 자신이 밀고 싶어 하는 책 '늦게 핀 꽃'을 두고 돌아간다. 꽤 오랜 시간 후 만남의 계기가 되는 복선이다. 이때만 해도 재미있을까, 없을까 고민하며 멈출지 계속 읽을지 고민했었다. 귀한 책이 사라지고, 갑자기 한 아기가 나타나면서 에이제이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데 이런 황당한 사건들의 뒤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들의 제목과 작가 이름, 내용이 계속 등장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책과 관계된 일들로 사건이 엮이게 된다. 첫 사건들은 마지막까지 연결되어 있고, 처음에 에이제이가 했던 당돌한 발언들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변주된다.
이야기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한 순간 행복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잠깐의 불행으로 인생의 마지막으로 치닫지 않듯, 어떤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어떤 행복은 또다른 불행의 서막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배경을 왜 섬으로 골랐을까, 하고 궁금해 했는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인간은 섬처럼 동떨어진 존재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나와서 배경은 섬이지만 인간은 섬이어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돈만을 위해 아무 책이나 들여놓지 않았던 에이제이가 훌륭하게 꾸려온 섬의 유일한 서점, 사람들 간의 연결고리가 되었던 이 서점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실재하지 않는 섬과 서점이어도 말이다.
--- 본문 내용 ---
- "싫어하는 걸 말하면 어떨까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말물, 죽은 사람이 화자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싫어합니다. 딴에는 기발하답시고 쓴 실험적 기법, 이것저것 번잡하게 사용한 서체,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삽화 등 괜히 요란 떠는 짓에는 근본적으로 끌리지 않습디다. 홀로코스트나 뭐 그런 건 전 세계적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다 마뜩잖더군- 부탁인데 논픽션만 가져와요. 문학적 탐정소설이니 문학적 판타지니 하는 장르 잡탕도 싫습니다. 문학은 문학이고 장르는 장르지. 이종교배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어린이책, 특히 고아가 나오는 건 질색이고, 우리 서가를 청소년물로 어수선하게 채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사백 쪽이 넘거나 백오십 쪽이 안 되는 책도 일단 싫어요. TV 리얼리티쇼 스타의 대필 소설과 연예인 사진집, 운동선수의 회고록,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소설, 반짝 아이템, 그리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뱀파이어물이라면 구역질이 납니다. 데뷔작과 칙릿, 시집, 번역본도 거의 들여놓지 않아요. 시리즈물을 들이는 것도 내키진 않지만 그건 내 주머니 사정상 어쩔 수 없고, 당신의 편의를 봐서 말하는데, '빅히트 예정 시리즈' 같은 건 그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안착하기 전까지는 나한테 말도 꺼내지 마쇼. 그리고 로먼 씨, 난 무엇보다 말이죠. 별볼일없는 노인들이 별볼일없는 자기 아내가 암으로 죽었다고 끼적거린 얄팍한 회상록들은 도대체 참을 수가 없더군요. 제아무리 잘 쓴 글이라고 출판사 영업사원이 얘기해도, 제아무리 어버이날에 무진장 팔릴 거라고 장담해도." 어밀리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당황스럽다기보다 화가 났다. 에이제이의 말에도 일리가 없진 않았지만 그의 태도는 필요 이상으로 모욕적이었다. 어쨌든 나이틀리 프레스는 그런 종류의 책들 중 절반은 아예 취급도 안 한다. 어밀리아는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나이차가 크진 않다. 열 살 이상은 아니다. 좋아하는 게 저렇게 없나 싶기엔 너무 젊다. "그럼 뭘 좋아하세요?" 그녀는 물었다. " 그 외엔 전부 다." 그가 말했다. "내가 좀 단편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면이 없지 않죠. 손님들은 당최 사볼 생각을 안 하지만." (25~26쪽)
- 수술 후, 그는 한 달 코스의 방사선 치료를 위해 격리병동으로 옮겨졌다. 방사선 때문에 면역체계가 무너져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니콜의 사망 이후 기간까지 포함해서, 이토록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술에 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사선을 쬔 그의 위가 알코올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마야 이전의 삶, 어밀리아 이전의 삶이 이랬다.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인간은 홀로 된 섬으로 있는 게 최상은 아니다. (296쪽)
-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C.S. 루이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루이스를 다룬 영화 <샤도우랜드>(윌리엄 니콜슨 극본)에서 극중 루이스(엔서니 홉킨스 분)의 대사로 나온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301쪽)
*팟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