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글과 똑같은, 역시 굼시렁거리는 혼잣말입니다. 그래서 반말입니다.
거기다가 쓰고나니 길기만하고, 재미는 없고, 잘난 척하는 글로 읽히기도 하네요.
하지만 그런 의도는 없고, 저의 솔로 라이딩 예찬입니다.
읽으시다가 재미는 없고, 길기만 하다고, 중간에서 욕하실거면, 처음부터 읽지 마시길.. ㅜㅜ
-솔로 라이딩. 생각의 감옥에서 탈옥하는 자전거 라이더..-
자전거 안장에 오를 때면 가끔 주문처럼 되뇐다.
"세상을 탈옥해, 나는 세계로 나간다."
생각과 생각이 얽혀 만든 복잡한 세속의 거미줄을 끊어내는 의식이다.
선방의 낡은 방석에 앉아 묵직한 화두를 틀어쥐듯,
나는 좁디좁은 안장 위에 올라 '페달링'이라는 화두를 잡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이른바 페달링 명상, 동중선(動中禪)의 시작이다.
20여 년, 하루 40장 이상의 원고 써야하는 내가 절실했던 것은 집중을 넘어선 몰입이다.
누구나 내면에 놀라운 재능의 우물을 품고 있지만, 그것을 길어 올리는 일은 만만치 않다.
단순한 집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집중을 넘어 몰입의 심연까지 뚫고 들어가야만,
비로소 내 스타일의 문장이 샘물처럼 터져 나온다.
마침표를 찍고 원고를 다시 읽어 내려갈 때,
"이거, 정말 내가 쓴 글이 맞나?" 하는 경이로운 탄성이 터져 나오던 기억들이 있다.
긴 세월, 나를 지탱해 준 것은 가끔 찾아오던 그 압도적인 몰입의 순간들이었다.
생각의 꼬리를 끊어내면 의식은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한다.
글을 써야 한다는 목적도, 잘 쓰겠다는 얄팍한 욕심도 휘발되고,
오직 '쓰는 행위' 자체만 남는 진공의 공간이자 순간.
그곳에 닿으면 내면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이미지가 거침없이 이합집산한다.
늘 보던 뻔한 세상이 다르게 읽히고,
습관적인 루틴을 박살 내는 직관적이고 색다른 언어들이 벼락처럼 쏟아진다.
파문 한 점 일지 않는, 깊고 오래된 내면의 연못으로 빠져 들어가야만 겪을 수 있는 세계다.
그 지경에 도달하면 내 의식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을 넘어, 빛을 모으는 '돋보기'로 진화한다.
한여름 땡볕 아래 종이를 펼쳐놓아 보았자 수분이 마르는 '변(變)'에 그친다.
하지만 한겨울 동짓날의 힘없는 햇살이라도,
작은 돋보기로 초점을 뾰족하게 맞춰 종이 위를 비추면,
기어이 연기를 내며 타오르는 '화(化)'를 일으킨다.
몰입을 통해 도달한 명상의 상태는,
내 안의 에너지를 한 점으로 모아 기어이 나를 불태우는 과정이다.
인간의 재능이란 결국 몰입의 다른 이름이다.
그 몰입은 명상을 통해 도달하기도 하고,
묵묵히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 우연히 찾아오는 행운이기도 하다.
명상은 문명과 함께 잉태된 오래된 생존 술수다.
언어와 이성이 빚어낸 문명의 부작용,
그 끊임없이 꼬리를 무는 번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려는 절박한 몸부림이다.
2,500년 전 붓다는 생각의 꼬리가 고통의 뿌리임을 꿰뚫어 보았다.
"나는 주막의 주인이다. 오가는 생각은 그 주막에 들르는 손님이다. 손님을 주인으로 착각하지 말라."
자신이 주인인지 손님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주인의 자리를 되찾아 주려는 것이 참선의 본질이다.
노자 역시 『도덕경』에서 인간이 얄팍한 언어로 세계를 난도질하는 것을 매섭게 비판했다.
절대적이라 착각하는 세상의 가치들은 사실 언어가 만들어낸 옹졸한 이분법에 불과하다.
'좋다'고 이름 붙이는 순간 '싫다'가 생겨나고, '최고'를 규정하는 순간 '최하'가 탄생한다.
하지만 세계의 실상은 어떤가.
상황과 관계에 따라 좋을 수도, 싫을 수도 있으며, 어제의 최고가 오늘의 최하로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정해진 실체란 없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이것이 세계의 진짜 얼굴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변화무쌍한 '동사(動詞)'의 세계에 억지로 꼬리표를 달아,
굳어버린 '명사(名詞)'의 감옥에 가두려 든다.
상황에 따라 물은 하늘을 나는 구름이 되기도 하고, 떨어지는 빗방울이 되기도 하며,
단단한 얼음이나 쏟아지는 폭포수, 심지어 허공의 무지개로도 변신한다.
그래서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차원 높은 선(善)은 물과 같다"고 설파했다.
'나'라는 굳어진 실체(명사)를 고집하지 않고, 마주치는 상황마다 기꺼이 제 모습을 바꾸며 흘러가는 물.
그것이야말로 박제된 환영이 아니라 펄떡이는 동사로서,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궁극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강조한 일상의 법도 역시 궤를 같이한다.
삿된 생각이 없는 '사무사(思無邪)'의 경지가 우리 삶의 기본값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소소한 일상에도 지극한 정성을 다하게 된다(致曲).
그리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마디마디, 그 상황의 참맛을 기민하게 알아채고(知味),
찰나의 순간 가장 최선의 길을 찾아내는 것(時中).
삿된 망상 없이 온전히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펄떡이는 일상이야말로 유가의 명상이다.
거창한 철학을 떠나 세상을 똑바로 보자.
우리가 마주한 세계의 실상은 잠시도 쉬지 않고 요동치는 '동영상'이며, 변화하는 '동사'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간 찰나를 뒤돌아보며 인과율의 틀에 가둬,
그 역동적인 동사를 한 장의 '명사(사진)'로 박제해 버린다.
결과가 있으니 원인이 생겼을 뿐,
-결과가 실제하지 않으면 원인이라 할것이 없다. 원인은 결과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날것의 세계는 원인도 결과도 아니다.
그저 이성이 지나간 자리에 명사로 박제된 환영을 붙들고 끙끙댈 뿐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론』도,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도, 붓다의 '몽환포영(夢幻泡影)'도,
결국 삶은 멈춰있는 명사가 아니라, 찰나에 태어나고 사라지는 동사임을 직시하라는 서늘한 일갈이다.
오감으로 부딪히는 찰나의 체험은 결코 굳어버린 언어로 묶어둘 수 없다.
혀끝에 닿는 소금의 짠맛을 어찌 수만 마디 말로 온전히 설명하겠는가.
직접 맛보아야만 아는, 언어 이전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언어가 늘 멍청한 껍데기인 것만은 아니다.
'사랑해'라는 뻔한 말도 어떤 감정과 억양이 실리느냐에 따라 비아냥이 되기도 하고,
세계를 구원하는 전부가 되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박제된 언어가 아니라, 그 너머에서 요동치는 생생한 '동사적 감각'이다.
거창하고 복잡한 동서양 철학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종착지는 단 하나, '언어 너머의 그 무엇'이다.
머릿속의 시끄러운 이성을 끄고 몸의 감각으로 들이받아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세계.
그것만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의 전부다.
언어로 지어진 잡생각의 소용돌이를 지우고,
몸의 감각을 깨워 '언어 너머'의 세계,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단숨에 진입하게 해주는 그것이 바로 자전거,
자전거 라이딩이라고 단언한다.
낡은 문헌의 권위가 아니라, 오로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안장 위에서 페달을 굴려본
내 생생한 체험을 증거 삼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구라'라고 해도 좋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틱낫한 스님의 '걷기 명상'은 아주 쉽고 단순하다.
그 수행이 가 닿으려는 목적지는 명확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과 땅의 접촉을 '알아차리는' 것.
판단 없이 대상을 '바라보며' 지금 여기에 온전히 깨어있는 것이다.
"발을 들어 올려 숨을 들이쉽니다. 발을 앞으로 내밀어 발꿈치와 발가락이 땅에 닿을 때 숨을 내쉽니다.
나는 이미 도착했습니다. 발걸음마다 도착하십시오. 그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걷는 행위는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가는 수단이 아니다.
오직 '지금 여기 이 순간'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있음을 감각하며, 매 걸음이 곧 종착점임을 깨닫는 일이다.
이 걷기 명상의 구체적인 행위는, 자전거의 페달링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일치한다.
안장 위에서 끊임없이 태극을 그리며 돌아가는 '밀고, 밟고, 끌고, 당기는(밀밟끌당)' 페달링.
힘을 주어 밀고 밟을 때 숨을 내쉬고(呼), 힘을 빼며 끌고 당길 때 숨을 들이마신다(吸).
호흡과 페달링의 리듬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이 기막힌 춤은,
틱낫한 스님이 말한 걷기 명상의 완벽한 안장 위 버전이다. (원형 페달링의 구체적인 기술은 다른 챕터에서 다룬다.)
스스로를 돌아보자. 오늘 하루,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물렀던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삶의 거의 모든 시간을 실재하지 않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저당 잡힌 채 살아간다.
그 들끓는 생각의 지옥에서 건져내는 강력하고 확실한 탈옥의 기술이 있다.
안장 위에서 쉼 없이 굴려 내는 '페달링'이다.
단언하건대, 두 다리의 근육과 숨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그 페달링의 순간은,
내가 땀 흘려 겪어본 그 어떤 명상법보다 압도적이고 완벽한 탈출이다.
세상이 감춰둔 진짜 펄떡이는 아름다움을 찾아보고 싶은가?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 관심이 있다면 자전거 안장 위에 올라 페달을 굴려보시라.
그리고 묵묵히 나의 페달링을 지켜보면 된다.
그곳에 생각이란 이름의 감옥을 탈옥하는 길이 열려 있다.
솔로 라이딩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