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자전거도 사랑하라.'보다 훨씬 재미없는 글입니다.
다른 글과 똑같은, 역시 굼시렁거리는 혼잣말입니다. 그래서 반말입니다.
읽으시다가 재미는 없고, 길기만 하다고, 중간에서 욕하실거면, 처음부터 읽지 마시길.. ㅜㅜ
[날것의 즐거움, 혹은 날탱이의 오만방자함]
수박 겉핥기를 예찬한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붓는 일과 같다는 생각에서다.
밑 빠진 시루에 물 한 사발 무심하게 부었을 뿐인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 뚜껑을 열어보면 콩나물은 손가락 마디만큼 훌쩍 자라 있다.
흘러내린 물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콩이 본래 품고 있던 자양분 덕이다.
사람의 내면도 그 콩과 다를 바 없다.
끊임없이 물을 붓다 보면 어느 날엔가 싹이 트고 무럭무럭 자라난다.
참, 수박 겉만 핥고 진짜 끝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인간이라면, 계속 핥다 보면, 그걸 어떻게 참겠는가.
그 수박은 결국 뽀개지게 되어 있다.
방송 아카데미에서 작가를 꿈꾸는 지망생들에게 전수하던 독서법도 이와 결을 같이 한다.
이름하여 ‘어처구니없는 날것의 독서법’이다.
세상에 널린 고전과 명작을, 이제 막 20대 초중반인 그들이 어느 세월에 다 정독한단 말인가.
그래서 고안해 낸 꼼수다.
먼저 줄거리를 파악한 뒤, 3페이지 혹은 5페이지씩 과감하게 건너뛰며 읽힌다.
책을 덮은 뒤 뇌리에 남은 깨달음이나 단상만을 짧게 메모하게 한다.
그렇게 띄엄띄엄 읽더라도 저자나 감독의 폭발적인 열정이 행간을 뚫고 나와, 기어이 멱살을 잡힌다.
그래서 마음이 동하면, 아무리 뜯어말려도 필연코 그 책을 씹어 먹듯 정독하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정독한 이와
수박 겉핥기로 읽어 치운 이가 두달 쯤 지나서 토론을 벌이면 승자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뇌리에 남은 통찰의 총량은 엇비슷하다.
정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미세한 감동은 놓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백 페이지 속에서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한두 개의 굵직한 깨달음을 건져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평생 곁에 두고 씹어 삼켜야 할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수많은 책은 결국 앙상한 에피소드와 몇 줄의 단상으로만 남기 마련이다.
(아마도 당신이 지금 핥고 있는 이 글 또한 그중 하나일 테지만.)
자전거 라이딩 스킬 역시 이 '날것의 즐거움'으로 익혀가는 중이다.
유튜브 속 고수들의 라이딩 영상이나 사이클 아카데미의 튜토리얼을 보고,
무작정 흉내 내는 것은 전형적인 수박 겉핥기다.
본래 제대로 된 기술을 습득하려면 전문가 곁에서 끊임없이 지적받고 교정받는 피 말리는 훈련이 필수다.
하지만 날탱이의 수박 겉핥기로도 길은 열린다.
초보 시절, ‘멧돼지’ 이미지로 강렬하게 기억되는
‘케이 트레이닝스쿨’ 대표의 평로라 훈련 영상을 접했다.
영상을 본 직후, 내가 가장 먼저 결정한 일은 멀쩡히 잘 쓰던 평로라를 치워버리고,
그가 타던 ‘삼창 평로라’를 새로 지른 것이다.
폼은 어설플지언정, 장비라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똑같이 세팅하는 것이,
배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뻔뻔하게 우기면서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숱한 깨달음을 준 그 영상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평로라 훈련법과 페달링 훈련법은 단연 쵝오임을 밝힌다.
팬데믹 시절, 길고 긴 '솔로' 라이브 영상을 보면 얻는 것이 정말 많다. )
무릇 몸으로 배우는 공부의 삼대 원칙은 ‘수파리(守破離)’에 있다.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守), 배운 것을 딛고 일어서 틀을 깨며(破),
마침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만의 춤을 춘다(離).
재즈의 전설적인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의 조언도 같은 맥락이다.
"음악을 마스터하라. 악기를 마스터하라. 그리고 모두 버리고 네 멋대로 연주하라."
국선도의 ‘거거거중지(去去去中知), 행행행리각(行行行裏覺)’이라는 진언도 있다.
가고 가고 가는 중에 알게 되고, 하고 하고 하는 중에 깨닫게 된다.
남다른 능력이란 결국 ‘지성무식(至誠無息)’, 쉼 없이 나아가는 지극한 정성에서 비롯된다.
기우제를 지내기만 하면 어김없이 비를 부른다는 인디언 주술사 ‘레인메이커’의 신통력도 비결은 단 하나다.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유튜브를 뒤적이며 날탱이로 배운 겉핥기 스킬이 과연 실전에서 통하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명쾌하다.
내 몸에 체화될 때까지 핥고 또 핥으니까 결국 구멍이 뚫리더라.
빙판 위, 김연아의 허공을 찢듯 날아오르던 아름다운 트리플 점프도
뼈를 깎는 ‘행행행(行行行)’의 결과지,
타고난 재능 하나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평로라 위에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허벅지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순자(荀子)의 ‘노마십가(駑馬十駕)’를 중얼거렸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 리를 간다. 하지만 둔한 늙은 말도 쉼 없이 걷고 또 걸으면,
열흘이면 마침내 그곳에 닿는다.'는 가르침이다.
생각해 보라. 천리마가 하루에 천 리를 주파해 그 화려한 이름표를 달기까지,
가죽이 찢어지고 근육이 파열되는 고통을 얼마나 감수해야 했을까.
(내가 머리는 잘 굴리고 있는 듯...ㅋ)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시작한 내 자전거 라이딩은
노마(駑馬)의 둔탁한 조랑말 걸음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뭐가 그리 급한가. 대회에 나가 포디엄에 오를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기량을 과시할 일도 없다.
그저 오롯이 내가 즐거워 굴리는 페달이다.
오늘도 평로라 위에서, 그리고 북악의 가파른 오르막 위에서 나는 쉼 없이 수박 겉을 핥는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레인메이커처럼.
이 지극한 겉핥기와 우직한 조랑말의 뜀박질 덕분에,
세 시간짜리 아라뱃길 왕복의 고독한 솔로 라이딩은, 단 1분도 지루할 틈이 없다.
‘케이 트레이닝스쿨’ 만세! 원장님 만세!!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