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당에 2023년 6월 7일 입당했습니만,
2020년부터 ROM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ROM족'이란 말을 쓰는 연식이 제법되는 로드라이더입니다.
그동안 자당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게시판이 침체돼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가끔 들리시는 당원 여러분들이 재미있게 읽는 글이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아,
아직 초고 정리 중인 재미없는 글들을 -저는 유용한 글정도는 된다고 우기는 중입니다.- 올리는 중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읽어 주시면, 계속 올리겠습니다.
아니 많이 읽지 않으셔도 자주 올릴 작정입니다.
자당 게시물이 많지 않더라도.. 자주 들려 주시길.. ㅎ
이번 글은 '평로라의 한계를 아십니까?'보다는 짧지만, 역시 굼시렁 거리는 혼잣말입니다. 그래서 반말입니다.
읽으시다가 재미없고 길기만 하다고, 중간에서 욕하실거면 처음부터 읽지 마시길.. ㅜㅜ
안장 위에서의 서핑: 세상은 즐기는 자의 것이다.
‘산이 있어서 산에 오른다’는 명언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전거가 있어서 자전거를 탄다.'고 해야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군가 자전거를 왜 타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명쾌하다.
‘맛있으니까!’
자전거 라이딩이 맛있다고? 그렇다. 침 넘어갈 만큼.
자전거의 수많은 맛 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발맛', 즉 페달링이다.
제대로 된 페달링으로 클릿 슈즈 바닥부터 쫀득하게 전해지는 체인 텐션의 맛은,
한여름에 즐기는 냉면 면발보다 찰지고 달다.
그래서 페달링이야말로 자전거 라이딩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기꺼이 우기는 축이다.
(물론 자전거의 맛이 어찌 페달링 하나뿐이겠는가만은.)
유튜브를 도배하다시피 한 세계 최정상 타데이 포가차르(Tadej Pogačar).
그의 훈련 영상을 보면, 저건 외계인이 아닐까 싶다.
존2에서 350와트 이상을 뿜어내는 그 무시무시한 퍼포먼스.
그런데 결국은 ‘완벽한 페달링’을 벼려내기 위한 지난한 과정의 일부다.
360도로 돌아가는 체인링의 모든 궤적에서 힘의 흐름이 끊기지 않아야 체인의 팽팽한 장력이 유지된다.
한 번에 쾅 내리찍는 펀치도 아니고, 쉼 없이 던지는 잽도 아니며, 태극권 같은 유연함만도 아닌,
열거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정교한 기술이다.
동양 고전 『중용』 26장에는 '지성무식(至誠無息)',
'정성을 다하여 쉼 없이 나아감'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몸치 중의 몸치인 내가 인고의 훈련 끝에 원형 페달링을 겨우 흉내 내기 시작하고 나서야,
온몸으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바로 이 '지성무식'이다.
이 쉼 없는 이어지는 페달링을 장착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졌다.
자주 달리는 성산대교에서 행주대교 구간. 경기도 경계에 이르면 매서운 서풍이 덮쳐온다.
예전에는 맞바람에 밀려 고통스럽게 페달을 짓이겼지만,
지금은 뒷골목 깡패 같던 그 바람이, 가르고 나갈만한 '파도'로 변했다.
맞바람의 저항을 뚫고 새로 깔린 아스팔트 위를, 서퍼처럼 미끄러지듯 내달리던 그날의 선명한 '발맛'을 기억한다.
바람의 지독한 저항을, 유년시절 방역차의 흰 분무를 쫓아 달리던 유희로 바꾸어 버린 순간이었다.
이 안장 위에서 파도를 타기까지, 삶의 여정은 변화의 연속이었다.
90년대엔 10년을 스쿠버 다이빙에 빠져 살았고,
2000년대엔 20년 가까이 산에 마음을 빼앗겨 인수봉 아래서 뜨거운 주말을 보냈다.
그러다 2019년 늦가을 3단 하이브리드 안장 위에서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긴 뒤, 지금의 로드 라이더로 변모했다.
장비도 흐르는 물처럼 굽이쳤다. 15만 원짜리 중고 엘파마는 메리다를 거쳐 자이언트 TCR 어드밴스 KOM으로 바뀌었고,
투박했던 시마노 클릿 슈즈는 S-Works 아레스로 변했다. (물론 파워미터만큼은 외발 4iiii를 고집하며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초심이 변했다고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과정(Process)' 철학이나 주역의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 말하듯,
세계의 본질은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다.
타인을 대하는 선한 태도만 굳건하다면,
개인의 유희 영역에서 일어나는 숱한 변화는 기꺼이 만끽해도 좋은 무죄(無罪)다.
이토록 모든 것이 쉼 없이 변하지만, 라이더의 삶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징글징글한 장벽이 하나 있다.
바로 '현관령(현관문 밖을 나서는 일)'이다. 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관 문턱 넘기가 설악 그란폰도의 조침령 넘기만큼 팍팍하다.
그런데 그 장벽을 넘어 일단 안장 위에 오르기만 하면, 내면 깊은 곳에서 고요한 평안함이 차오른다.
현관령만 넘으면 부암동령, 청운동령, 사직-북악 업힐쯤은 동네 마실 다니듯 오를 수 있다.
(사는 동네라서 ‘마실 다니듯’이라 표현했을 뿐,
작정한 날의 업힐은 입에서 피 맛이 날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걸 굳이...)
개인적인 상황 탓에 주로 혼자 달리지만, 북악 팔각정으로 이어지는 1시간 남짓의 코스에서 지루할 틈은 없다.
특히 업힐에 올라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헐떡임 속에 들어가면, 나는 속세를 떠난 구도자가 된다.
생각은 멈추고 에고(Ego)가 소멸하며, 오직 '기어코 오르고야 만다'는, 날 선 '동사'만이 펄떡인다.
혈기 넘치던 시절 땀 흘리며 굴렀던 유격 훈련보다, 업힐 안장 위에서 치르는 사투가 물리적으로 훨씬 더 빡세고 맵다.
(물론 북악 업힐은 10분 내외고, 군대는 20개월의 차이가 있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말이다.)
이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는 이유는 하나다. 고통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리는 찌릿한 쾌감 때문이다.
마치 진흙을 뚫고 수면 위에 활짝 피어나는 연꽃처럼, 내 마음 저 아래 가라앉아 있던 정체 모를 희열이 솟아오른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세계 역시 신을 창조한다."
화이트헤드의 이 통찰처럼, 세계의 일원인 우리는 안장 위에서 펌핑 나기 직전의 다리 근육을 지옥으로 느낄 수도,
천국을 향해 가는 즐거움으로 바꿀 수도 있다.
내 눈앞의 세상이 끔찍한 비극이라고 믿는 자의 가슴에, 어떻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여유가 깃들겠는가.
삶의 마디마디에 숨겨진 찰나의 재미를 발라먹을 줄 알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한 대긍정과 이웃을 향한 우정이 싹튼다.
피 맛을 보며 올라온 북악 업힐 정상에서 나는 이 진실을 마주했다.
어떤 명품 자전거, 어떤 값비싼 저지를 입었든,
필드에 나선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그저 '자전거 타는 사람'일 뿐이다.
안장 위에서 자전거와 합일하여 거친 저항을 파도 삼아 서핑하듯 질주해 나가는 것.
기적 같은 이 세계를 매일 내 두 다리로 굴려내며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라이더의 진짜 즐거움이라고 우긴다.
머물러 있는 것은 없고, 영원히 움켜쥘 수 있는 소유의 영역도 없다.
피부, 근육, 뼈조차 최소 2개월에서 2년이면 완전히 새로운 조직으로 교체된다는 물리학의 진실 앞에서는
내 몸뚱이조차 영원한 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한 내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 세계를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박제해 곁에 묶어 두는 것이 아니다.
숨겨진 그 재미들을 끄집어내, 순간순간을 씹어 맛보는 태도이다.
세상은, 세상의 모든 길은, 세상의 모든 자전거는, 온전히 즐기는 자의 몫이다.
긴글 읽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전거당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