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라이딩 예찬'이란 제목으로 한 혼잣말입니다.. 그래서 반말입니다.
길이도 제법 됩니다.. 참을성이 요구되는 글이니..
다 읽으시고.. 화내실 거면.. 읽지 마시길...( 어그로 끄는 거 절대 아닙니다.ㅜㅜ)
자전거 라이딩 예찬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옛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수많은 학술 자료가 이를 증명한다.
땀 흘리는 운동은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고양시킨다. 요즘 우리가 헬창이 되고, 런너가 되는 이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변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육체의 피로보다 정신의 피폐를 더 깊이 호소한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포모(FOMO) 현상과 지나치게 파편화된 초개인화 라이프스타일은
우리 내면의 고갈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육체가 안정되어야 정신이 맑아진다는 말은, 곧 정신이 안정되어야 육체도 건강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
1960년대부터 서구의 수많은 지식인과 직장인들이 명상에 심취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 시절 스즈키 선사의 젠(ZEN, 禪) 사상에 열광하고, 오쇼 라즈니쉬 같은 명상가들의 철학이 큰 반향을 일으켰던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불안은, 우리를 '생각의 감옥'에 가둔다.
그 철옹성같은 감옥에서 탈옥하려는 절박한 몸부림이 '명상'이라는 거대한 트렌드를 만들었다.
자전거 라이딩 역시 그 흐름의 한 부분이다. 1980년대부터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서구인들이
로드나 MTB 자전거에 앞다투어 올라탄 이유는 단순한 육체 단련을 넘어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다.
안장 위에서 페달을 밟는 단순한 동작은, 단순한 운동 이상의 '수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집중과 몰입에 이르는 직관적이고 쉬운 기술이며,
페달링을 화두 삼아 일상의 번뇌를 초탈하는 강력한 '동적 명상(動的 瞑想)'이다.
명상은 마음에서 ‘나’라는 에고(Ego)를 잠시 지워내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 기술은 머리로 익힐 수 없다.
수많은 책갈피 속에서 쌓아 올린 생각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땀 흘리며 체득해야 하는 '실상의 공부'다.
생각이 만들어 낸 복잡한 관념의 지도를 과감히 접고,
지금 여기, 발끝에서 느껴지는 페달링에, 페달의 감각에 온전히 몰입하는 훈련이다.
고탐 싯달타 붓다가 추천한 최상의 명상은 들숨과 날숨을 챙기는 '호흡 명상'이다.
이는 에고- 혹은 자존감이라고 해도 좋다.-를 내려놓고 '지금 여기'를 살아가게 하는 최상급의 기술이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상념과 집요한 자의식 속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 지금 여기에 머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어려운 과제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가 있다.
머리가 아닌 온몸의 세포를 열어 느끼는 것, '감각'하는 것이다.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입안에 넣었을 때를 떠올려 보자.
혀끝으로 풍미를 감각하고, 이로 살며시 베어 물고 삼키는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나'라는 에고를 까맣게 잊고, 입과 혀로 느껴지는 경이로움과 하나가 된다.
자전거 명상도 이와 같다. 매번의 페달링이 마치 진귀한 음식을 한 입 베어 물듯
그 쫀쫀한 발맛을 음미하는 과정이 될 때, 안장 위는 가장 완벽한 명상처가 된다.
자전거 라이딩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속도계를 확인하며, 목표로 한 평속을 유지하기 위해 묵묵히 페달을 밟는다.
평속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한 항속이다. 힘으로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페달링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를 추월해 치고 나가는 다른 라이더의 뒷모습이 시야에 꽂힌다.
순간 평정심은 무너지고 페달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이른바 자존심을 건 '병림픽'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 객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얼마 달리지 못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다독이려 결국 페달링을 늦춘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느라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지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잠시 후 호흡이 돌아오면, 저 멀리 점으로 멀어지는 상대를 향해 다시 가열차게 페달을 밟아본다.
이내 엉덩이에 뻐근한 안장통이 시작되고 허벅지가 터질 듯한 압통이 덮치면,
다시 페달링을 멈추고 숨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제야 눈앞에서 사라진 괘씸한 라이더를 마음에서도 훌훌 떠나보낸다.
찰나의 경쟁심을 다스리지 못해,
애초에 계획했던 라이딩 페이스를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린 '나약한 의지'를 자조하며,
다시 나만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다.
물론 이 좌충우돌 또한 자전거 라이딩이 주는, 날 것의 즐거움 중 하나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만 더해보자. 이 즐거움은 깨달음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도로 위에서 우리의 눈은 주변 상황을 기민하게 직시하고,
머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공도의 환경 속에서 자전거와 나의 밸런스를 조율한다.
그리고 모든 감각은 오직 페달링의 둥근 궤적에 집중된다.
여기서 핵심은 내 억지스러운 의지로 페달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다.
묵묵히 돌아가는 페달의 회전 위에 그저 나의 의지를 가볍게 얹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며, 자전거를 타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자'.
페달링을 하며, 페달링을 하는 내 두 다리를 '지켜보자'.
감각으로 시작해 마침내 그 감각마저 잊어버린 채,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그 치열한 페달링의 순간을 한 걸음 물러서서 물끄러미 관조(觀照)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물아일체의 회전이며, 수많은 명상의 기술들이 닿고자 하는 궁극의 경지다.
우리의 삶은 결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뻗어 있는 안전한 아스팔트가 아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파도를 타고 넘어야 하는 서퍼의 격렬한 움직임과 같다.
삶의 파도는 힘으로 뚫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타고 넘어야 하는 대상이다.
'나'라는 무거운 에고를 꽉 움켜쥐고서는 결코 그 파도에 올라탈 수 없다.
에고의 무게를 기꺼이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파도의 흐름을 같이 할 수 없다.
라이더들은 지속주라고 한다. 평지에서 나를 추월하는 라이더를 만나 건,
낙타등 길이 반복되 건, 계획한 케이던스와 파워, 심박으로 변함없이 해가는 안정된 페달링이다.
변화무쌍한 노면과 바람 등 도로환경 속에서 그런 페달링을 하는 것은,
긴박한 일상에서 치밀한 계획 없이, 그저 '대충' 흘러가며 살아가는 무책임한 삶의 태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이라는 그 아찔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런 지속주의 라이딩 - 규칙적인 생활의 또 다른 해석이라고 해도 좋다. -은
놀라울 만한 지구력과 효율을 보장한다.
안장 위의 우리는 세계의 거대한 흐름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매 회전 페달을 굴리는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면,
집요했던 에고는 어느 순간 아침 햇살에 증발하는 이슬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페달링을 지켜보는 나를 놓치지 않는다면,
순간의 병림픽으로 그날의 내 라이딩 계획을 망치는 일은 없다.
그처럼 온전히 감각하며 페달링을 하듯, 매 순간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간다면 어떨까.
'지금 여기'를 만끽하는, 치열하지만 고요한 과정 속에서,
우리의 일상 역시 ‘세계의 순리대로 묵묵히 잘 굴러갈 것’이라는,
깊고 단단한 평온함이 마음 가득 채워진다.
체인링이라는 쳇바퀴에 스스로를 몰아 넣는 자전거 라이딩이지만,
작은 쪽배로 대양의 파도를 타고 넘는 위대한 선장과 다르지 않다고 뻐길 수도 있고,
도로의 요철과 장애를 세계의 풍파와 같다고 우기며,
우리는 어찌됐건 위대한 라이더라고 짜벅하며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