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블로그에 포스팅한 글을 그대로 가져와서 평어체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아무쪼록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 은폐된 북관동 연쇄 아동납치살인사건’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여(余)는 당연히 추리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띠지에 쓰여 있는 화려한 수상 이력 중에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이 있었다. 그러나 곧 위화감을 느꼈던 것은 그때 여가 서 있던 곳이 소설 코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왜 여기에 있지? 진열하다가 잘못 두었나?’
호기심이 동한 여는 책을 집어 서문을 읽어 보았다. 앞뒤 표지에 쓰여 있는 홍보용 문구보다 서문을 먼저 보는 게 그 책의 내용을 보다 신속,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일본 관동지방의 지도를 펼치고 북부의 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0킬로미터 정도의 원을 그린다. 집들이 늘어서 있는 그곳은, 밝은 햇살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 작은 원 안에서 17년 동안 무려 다섯 명의 어린 소녀가 모습을 감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들까? 그 아이들은 모두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거나 유괴된 채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더구나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소설이 아니라 사실... 역시 논픽션인가.’
서문 읽기를 잠시 중단하고 책날개의 저자 약력을 살핀다.
시미즈 기요시(清水潔). 일본 탐사보도의 전설이 된 기자. 1958년 도쿄 출생. 신초샤 <FOCUS> 편집부를 거쳐서, 현재 니혼TV 보도국 기자・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설인가 하고 집어든 책이 논픽션이었다. 보통은 이쯤에서 내려놓아야 했을 텐데, 그 뒤로 이어지는 저자의 이력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1999년, <FOCUS> 기자 시절, 사이타마 현 오케가와 역에서 발생한 ‘오케가와 스토커 살인사건’에서는 경찰보다 먼저 용의자를 찾아내 경찰에 알렸다. 이후 경찰이 사건을 왜곡, 축소시키며 피해자 측의 명예까지 훼손시키자 사건의 진실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경찰의 부조리를 보도하여 일본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그 결과, 사건을 은폐하려던 관련 경찰들은 징계・면직당하고 피해자도 명예를 회복한다. 이 보도로 ‘일본 저널리스트 대상’, ‘편집자가 선정하는 잡지 저널리즘상’을 수상했다.
가만, 가만... 이건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 아닌가? 검・경찰이 사건을 왜곡, 축소하고 언론마저 외면하여 피해자가 구제받지 못하고 도리어 손가락질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비일비재한 일. 게다가 요즘은 검・경과 언론의 적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높은 시기. 아무래도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책을 구입하여 귀가한 여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잔잔한 음악을 틀어 놓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한순간 오한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고 보니 시곗바늘이 새벽 4시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보니 틀어 두었던 음악도 어느 새 끝나 있었다. 원래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이지만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읽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왜 이렇게 손발이 차지?’
식어 버린 차를 따뜻이 데워 마시며 잠시 생각했다. 여는 긴장하고 있었고, 또 분노하고 있었다. 이게 과연 일본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일까? 아니다. 일본 사회와 닮은 곳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일 게다. 그래서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일 게다.
2005년, 니혼TV로 이직한 시미즈 기자는 일본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한 범인을 브라질까지 추적하여 보도했고, 그의 제보로 범인은 현지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니혼TV에서는 탐사보도에 일가견이 있는 그에게 ‘일본을 움직일 수 있는 1년짜리 탐사보도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자신의 장기인 ‘미해결 사건 탐사보도’로 방향을 잡은 시미즈 기자는 동료 리포터가 준비한 미해결 사건 리스트를 뒤적이다가, ‘어차피 할 거라면 공소시효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사건을 선택하여 해결해 보자’는 대담한 길을 선택한다. 그러던 그의 눈에 띈 것이 1996년 7월 군마 현에서 발생한 ‘요코야마 유카리 유괴사건’이다. 작은 도시의 파친코 가게에서 당시 4세에 불과했던 소녀가 납치당해 행방을 감춘 이 사건은 범인으로 의심되는 남성의 모습이 CCTV에 찍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궁에 빠져 버린 사건이다. ‘CCTV 영상이 있음에도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낀 시미즈 기자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엄청난 사건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1976년부터 1996년 사이에 군마 현 오타 시와, 바로 인접한 도치기 현 아시카가 시에서 유사한 수법에 의해 어린 소녀들이 유괴・살해당한 사건들이 연달아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피해자들의 나이는 4~8세. 다섯 중 넷이 살해당했고 하나는 지금까지 행방불명인 상태. 17년 동안 3~6년의 시간차를 두고 인접한 두 도시를 오가며 발생한 유사 사건. 심지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넓이는 반경 10km에 불과하다. 시미즈 기자는 즉시 사건들의 공통점을 나열해 보았다.
어린 소녀를 노린 범죄
유괴 현장 중 세 곳은 파친코 점
시신 발견 장소 중 세 곳은 강변의 갈대숲
사건 대부분은 주말 등 휴일에 발생
어떤 현장에서도 우는 아이의 모습은 목격되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이 동일범에 의한 연쇄 아동납치살인사건이라는 가설을 세운 시미즈 기자는 여기에 ‘북관동 연쇄 아동납치살인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심도 깊은 추가 조사에 착수한다. 오랜 탐사보도 경력을 통해 그는 인접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수사할 때 각 지역의 경찰들 사이에 발생하는 알력이나 떠넘기기 관행 등이 사건 해결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본 경찰청은 각 지역 경찰청 간의 수사 협조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광역중요사건 특별수사요강’이라는 대책을 만들어 두었지만, 어린 소녀 네 명을 살해하고 시신 일부를 유가족에게 보내는 등의 잔혹한 범죄로 전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던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통해 특별수사요강의 허점이 이미 드러나 있던 터. 그렇기에 시미즈 기자는 자신의 가설이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조사를 계속한다.
그 ‘치명적인 결함’이란 다섯 건의 사건 중 한 건의 범인이 이미 체포되었고, ‘범인의 자백’과 ‘DNA형 감정’이라는 결정적 증거에 의해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며, 범인 스가야 도시카즈가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라는 것이었다. 즉, 다섯 건의 사건을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사건’으로 볼 수 있는 연속성도 이미 단절되었고, 경찰이나 언론이 이 건을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이유도 명확해진 셈. 비록 스가야 도시카즈가 뒤늦게 자신이 누명을 썼다며 무죄를 호소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 과학경찰연구소가 DNA형 감정을 통해 진범임을 확인했다면 번복의 여지는 없다.
하지만 시미즈 기자는 ‘만약 스가야 씨가 정말 무죄라면 진범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편안하게 잘 살고 있고, 바로 내일이라도 여섯 번째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 초조함을 느끼고 자신의 석연찮은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2주 후, 그는 언론과 검경, 법원 관계자가 모두가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을 게 분명한 어떤 사실을 발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한다. 그리고 상호 모순 없는 비교 검증을 통해 한 남자의 그림자를 특정해내고 사건 현장으로 뛰어든다.
치열한 취재를 거듭하고, 수많은 반대와 방해를 헤치며 1년 동안 50여 회의 특집 방송을 거듭한 끝에 시미즈 기자는 스가야 도시카즈 씨가 무죄임을 밝혀내고 만다. 일본 사법부는 부당한 강압수사와 거짓 자백, 조작된 증거를 근거로 무려 17년 반 동안 죄 없는 사람에게 억울한 옥살이를 시킨 것이다. 심지어 그 기간 동안 ‘진범’은 ‘시효 만료’라는 특전을 얻었다. 시미즈 기자가 ‘사법부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피해자(스가야 씨)에게 고개를 숙이는’ 파격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도, 진범은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평온한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시미즈 기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이다.
그는 경찰이 자기방어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생산하는가, 또 언론은 경찰 쪽에서 흘러나오는 위험한 정보에 얼마나 쉽게 조작되는지 그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한다. 유명한 베테랑 기자인 그조차도 사법부와 언론이 만들어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수하는 거짓의 벽 앞에서는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가야 씨의 무죄 선고가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임을 알리고자, 사법부가 덮고 넘어가려 하는 ‘북관동 연쇄 아동납치살인사건’의 진실과 그 뒤에 숨어들려 하는 진범의 정체를 알리고자,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폭로하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당초 ‘미해결 사건’을 추적하겠다며 시작했다가 ‘이미 해결된 사건’을 뒤쫓게 만든 힘.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특집 취재’의 무게와, 지금까지 쌓아 온 경력과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을 떨치게 만든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본 언론에, 경찰에, 사법부에, 사회 전체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베테랑 기자는 그것을 ‘다섯 소녀들의 웃는 얼굴과, 이 나라에서 가장 작은 그들의 목소리’였다고 술회한다.
그의 이 한마디야말로 여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적폐에 분노하는가? 피땀 흘려 이 나라를 굴려 가는 민초들을 자신들의 권력과 축재를 위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비뚤어진 권력자들과, 자신들의 책무를 망각하고 그들에게 기생하는 언론, 경찰, 사법부의 일각 때문이 아닌가? 그 거대한 부정에 맞서 작은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시미즈 기자의 모습은 ‘정의’라고 칭하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 오늘날 이 사회를 살며 분노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 ‘정의’를 지향하고 있는 기자들과 검・경찰 종사자들에게 반드시 이 책을 일독하기를 강권하고 싶다.
저자 : 시미즈 기요시 | 역자 : 문승준 | 출판 : 내친구의서재